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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 고구려 사극이 인기가 높다. <주몽>과 <태왕사신기>, <연개소문>과 <대조영>, 그리고 <바람의 나라>에 이어서 지금은 <왕녀 자명고>가 상영 중에 있다. 이런식으로 대대적인 고구려 사극의 등장은, 그만큼 사람들이 고구려라는 나라에 향수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사극 제작자들도 이 아이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고구려 사극 방영은 시청자들에게 고구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인다. 또한 사극 제작자들 또한 조선시대 사극에 비해 소재가 많고, 또 사료의 공란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번에 방영하고 있는 <왕녀 자명고>의 주인공은 당연히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바람의 나라>에서도 잠깐이지만 호동왕자가 대무신왕의 아들로 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두 사극에서 동일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등장이 그리 싫지는 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래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작품이나 연극, 뮤지컬, 만화 등 다분야에 걸쳐서 그 소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번에 이렇게 드라마로도 방영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화를 볼 때마다 누구나 "과연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자명고나 자명각이라는 게 무엇일까?"라는 식의 질문을 가져본다. 또한 혹자는 "혹시 낙랑공주가 호동왕자에게 이용당한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럼 이런 의문에 하나하나 답을 찾아가보도록 하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인 로맨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현재 SBS에서 방영하는 <왕녀 자명고>에 나오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모습.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현재 SBS에서 방영하는 <왕녀 자명고>에 나오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모습.
ⓒ 왕녀 자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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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실존한 이야기일까? 이러한 의문을 갖는 이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전승은 『삼국사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중 대무신왕에 대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대강 말하자면 이렇다.

옥저를 여행하던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 왕자 호동을 만나게 되고 낙랑에 초대한다. 낙랑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고 호동왕자는 다시 고구려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낙랑의 고각을 없애라고 하며 낙랑공주는 이에 갈등하게 된다. 결국 낙랑공주는 그 고각을 없애고 이 틈을 노린 대무신왕과 호동왕자는 낙랑을 공격해 멸망시키지만, 낙랑왕 최리는 낙랑공주를 죽이고 항복하게 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아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여기에서 낙랑은 중국의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아닌 별개의 낙랑국으로 보이며 고구려와 낙랑국은 당시 경쟁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그 두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 사랑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고구려에서는 그 사랑을 위해서는 공주가 낙랑의 고각을 없애는 희생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이는 쉽게 말해 조국을 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신을 하고 사랑을 찾을 것인가, 사랑을 저버리고 조국을 구할 것인가. 이 어려운 선택을 막 소녀티를 벗은 낙랑공주에게 너무나도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역사 이야기에서 가장 불쌍하고 슬픈 건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이 낙랑의 공주이다. 당시 사회적 배경을 보았을 때 추정되는 그녀의 나이는 고작 10대 후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짊어져야 했던 짐은 너무나도 무겁고 목숨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그녀를 그렇게 고민에 빠지게 하였던 낙랑의 자명고와 자명각. 이건 도대체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자명고와 자명각, 그 정체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뿔나팔과 북. (왼쪽)무용총벽화에서 나오는 뿔나팔, (오른쪽)덕흥리벽화분에서 보이는 북
▲ 고구려의 뿔나팔과 북. (왼쪽)무용총벽화에서 나오는 뿔나팔, (오른쪽)덕흥리벽화분에서 보이는 북
ⓒ 전호태 저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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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에게 호동왕자가 부탁한 것은 자명고와 자명각을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자명고와 자명각은 한자를 풀어서 보면 '스스로 소리 내는 북'과 '스스로 소리 내는 뿔나팔'이다. 여기에서 흔히들 자명고와 자명각을 북과 피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명각은 피리라고 보기보다 나팔에 가깝다. 『삼국사기』에서도 뿔나팔(角)이라고 하여 피리(笛)와는 구분하고 있다.

고대 전쟁에서는 악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전투가 시작될 때는 서로간의 함성소리와 먼지들, 그리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군대를 지휘하기가 지휘관들로서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럴 때 이용되는 것이 악기와 깃발로서 보통 전투에서는 나팔, 북, 징 등을 가지고 가서 이를 가지고 진군과 퇴각을 알렸다. 이 외에 더 세부적으로 정하여서 전투 시에 어떠한 명령을 내리는 표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를 통하여 이들의 존재가 보인다. 덕흥리벽화분과 안악3호분, 수산리벽화분 등에서는 행렬에 북이 등장하여 당시에도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용총의 벽화에서는 뿔나팔을 불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삼실총과 안악3호분, 수산리벽화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군사적인 용도에서 자명고와 자명각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낙랑의 자명고와 자명각은 적들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운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자명고와 자명각이 울리면 대번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과 교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고구려가 원한 것은 그러한 자명고와 자명각을 없애버려 낙랑의 방어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럼 실제로 자명고와 자명각은 존재했을까? 역사적인 사실로서 본다면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존재에 대한 해석은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왕실 무기고로 보기도 하며 당시 전투에 쓰인 여러 악기들을 지칭한다는 설, 혹은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한 보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실제로 전투에서 활용된 면을 본다면 방어체계의 일환이라고 보거나 그에 수반되는 도구 등이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낙랑공주는 결국 사랑을 선택하였고 이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군은 군대를 이끌고 낙랑을 공격하였고, 결국 낙랑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최리는 자신의 딸에 크나큰 배신감을 지녔고, 결국 스스로 딸의 목숨을 빼앗아 버리게 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에게 이용당했을까?

환도산성. 호동왕자의 할아버지인 유리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산성. 그 중 성벽의 모습이다.
▲ 환도산성. 호동왕자의 할아버지인 유리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산성. 그 중 성벽의 모습이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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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는 과연 호동왕자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된 비운의 여인이고, 호동왕자는 잘생긴 외모 아래에 자신의 사랑마저 내버릴 수 있는 추악한 심성의 남자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된 것이 적어 그 사실관계를 확실히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보면 이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하나 보인다. 이는 낙랑정벌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첫째아들이긴 하였지만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게 아닌 측실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게다가 당시 호동왕자의 어머니 쪽 세력은 힘이 미미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라도 호동을 아꼈던 대무신왕으로서는 이러한 호동왕자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구체적인 사례가 낙랑정벌. 낙랑정벌의 가장 큰 공신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낙랑공주와 내통하여 자명고와 자명각을 없애게 한 호동왕자라고 하겠다. 이로써 호동왕자는 고구려 내에서 입지가 다져졌고 태자 임명을 눈앞에 두었지만, 이를 정실부인, 즉 원비(元妃)로서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원비는 호동이 자신에게 예로써 대접하지 않고 음란하게 대한다고 대무신왕에게 모함을 하였다. 하지만 대무신왕은 이를 믿지 않고 질책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함을 계속하자 대무신왕도 호동왕자에게 경고를 한다. 그러자 호동은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변명하면 자신의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는 불효를 범하는 것이라 하여 칼에 엎드려 자살한다.

하지만 단순히 모함했다고 하여 변명치 않고 죽은 것은 너무나도 석연치 않다. 게다가 이는 낙랑정벌에 바로 이은 기사로 볼 때 상호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녀의 죽음에 가슴 깊이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는 길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 저승에 가서라도 사랑을 이루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자살, 그리고 저승에 가서라도 우정을 간직하자는 사다함과 무관랑의 결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까?

그럼 결국 이 둘을 사지(死地)에 몰아놓은 비련한 자는 누구일까. 결국 두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바로 대무신왕에게 있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대무신왕 또한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왕이었다. 그의 첫 번째 형인 도절은 요절하였으며, 두 번째 형인 해명은 자살을 선택하였고, 그의 동생인 여진마저 물에 빠져 죽었다. 게다가 그의 어린 시절은 부여의 압박과 협박에 아버지인 유리왕이 힘겨워하던 시절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본의 아니게 전쟁터를 누벼야 했다.

천재적인 전쟁 지휘관이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어두운 멍이 있던 대무신왕. 그는 인간의 정리(情理)를 또다시 전쟁에 이용하지만 그 대가는 아들과 며느리 될 사람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인간이었기에 이러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여생을 보낸 불행한 왕이라고 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그리고 대무신왕을 통해 호동왕자설화를 분석해본 글입니다.



#호동왕자#낙랑공주#고구려#대무신왕#왕녀 자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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