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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속기사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 및 토론회 전경
 법원 속기사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 및 토론회 전경
ⓒ 신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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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기능직 속기사들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판사들의 신문을 챙기고, 판사들의 책상을 청소하고, 난에 물을 주고, 커피를 탄다. 하루 종일 행정업무를 포함한 판사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복사 및 형사사건 공소사실을 입력하며, 전화를 놓칠까 싶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눈치를 보게 된다. 오후엔 간식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한다."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대한민국 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속기사들의 얘기다. 법원 속기사들의 주요 업무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재판과정을 기록하는 것임에도, 물론 일부이겠지만 마치 판사의 개인비서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이 같은 충격적인 증언은 노동건강연대, 인천대 노동과학연구소 그리고 법원공무원노동조합 속기분과가 최근 전국 법원에 근무하는 속기사 612명을 대상으로 '법원 속기사의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를 조사하고, 응답자 428명의 결과를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리에서 나왔다.

법원 속기사는 쉽게 말해 법정에서 판사가 앉아 있는 법대 바로 앞에서 타자 같은 것을 치는 법원직원을 떠올리면 된다.

이날 '법원 속기사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 및 토론회'가 법원 속기사들이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과중한 업무와 계약직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조사결과 발표와 이에 대한 개선책을 촉구하는 자리라고 예상한 것에 비하면 충격의 강도가 세다.

이날 토론회에는 법원 속기사 문제를 다룬 첫 조사이자 최초의 토론회인 점을 반영하듯 법원공무원노조 집행부들과 법원 속기사 등 많은 방청객이 참여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판사 비서하러 법원에 온 게 아닌데... 충격과 스트레스 커"

법원노조 속기분과 권경희 대표
 법원노조 속기분과 권경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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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노조 속기분과 권경희 대표는 "법원에서 속기사만큼 조서작성 업무를 뛰어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공판중심주의 등 재판환경 변화로 법원마다 속기사 충원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인데, 속기사들 중 누구도 판사 비서업무를 하는 근무형태를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애초에 비서업무를 작정하고 법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충격과 스트레스는 더욱 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권 대표에 따르면 증인신문은 보통 오후 2시에 시작해 때로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속기사들은 재판에 참여해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다음날부터 조서작성 업무를 한다. 특히 계약직 속기사들은 1주일 평균 3~3.5회의 재판일정을 소화하는데 재판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조서작성을 해야 하니 야근 내지 주말 특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이 문제에 관한 법원의 태도가 노골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법원에서는 속기사 채용면접을 진행하면서 '속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에 들어와 차(Tea)를 탈 수 있는데 보조업무를 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했다"고 털어놨다.

또, "채용 시 합격자 처우란에 '임용 후 속기업무 외에 판사실 조무업무, 일반행정 지원업무 및 송무지원 업무를 할 수 있음'이라고 기재하는 법원도 있다"며 "결국 속기사들에게 재판 속기는 주업무가 아닌 잡무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권 대표는 "법원행정처는 판사실에 근무하면서 재판에 참여하는 속기사들에게 같은 업무를 하는 법원사무원과 형평성을 맞춘다며 민원수당 3만원을 지급해 주고 있다"며 "이것을 누가 형평에 맞다고 생각할지 의문"이라고 법원행정처를 겨냥했다.

그러면서 "판사실 비서업무는 속기사와 사무원을 막론하고 현 시대의 정서에도, 법원 직원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으며, 일선 판사들도 많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므로 반드시 업무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 대표는 특히 "법정의 근무환경이 속기하기에 적합한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라고, 속기사들을 일반직으로 전환하는 장기적인 로드맵을 마련해 법원 속기사의 위상 및 업무를 바로잡기 바라며, 아울러 그에 걸맞는 실질적인 직무교육도 바란다"고 당부했다.

"법원 속기사,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까봐 불안"

계약직 속기사로서 어렵게 증언에 나선 강보배씨
 계약직 속기사로서 어렵게 증언에 나선 강보배씨
ⓒ 신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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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토론회에 법원 속기사들을 대표해 어렵게 증언을 하러 나온 의정부지법 소속 속기사 강보배씨는 "법원에 입사할 때 자랑스럽게 대한민국 법원의 속기사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18개월 동안 법원에서 속기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은 처음처럼 대한민국 법원의 속기사라고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이유가 "항상 따라붙는 계약직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라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법원에 소속된 속기사 612명 중 408명만이 정규직이다.

강씨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법원 속기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큰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다"며 "이제 곧 계약한 2년이 다가오는데 계약 연장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들보다 정규직 되는 기간이 더 오래 걸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부당한 대우에도 내 권리를 찾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속기사들은 계약직을 거쳐 정규직이 됐을 때 '드디어 법원직원이 됐다'는 말을 듣는다"며 "속기사들은 계약직일 때도 항상 법원직원이라는 자부심으로 똑같은 자리에서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해 왔는데도 '계약직일 때는 다른 직원들에게 법원직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서러움과 소외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강씨는 "속기사들은 지금도 적은 임금과 수당에도, 재판이 늦게 끝나서 몸이 힘들어도, 어깨와 손목의 통증에도, 시끄러운 업무환경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내용도 모르는 어려운 사건을 증인신문조서로 정서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에도, 내 손에서 증인신문조서를 완성돼 나올 때의 뿌듯함과 속기사로서 자긍심이 있기 때문에 묵묵히 견디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올해는 인원동결이라는 이유로 계약직 속기사들의 정규직화는 더욱 먼 꿈이 돼버려 정말 불안하다"며 "점점 정규직화의 꿈이 늦춰지는 것도 불안하고 계약직이라서 법원가족에서 소외되는 것도 서럽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 "이러다 입사할 때 품었던 속기사로서 자부심과 긍지도 잃게 될까봐 불안하고, 그래서 법원에서 일하는 게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까봐 불안하다"며 "결국 언젠가 법원에서 쫓겨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에 법원에서 일하면서도 법원직원이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강씨는 "언제쯤 계약직이라는 불안함 없이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냐며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자부심을 갖고 내 일을 사랑하는, 불안하지 않은 대한민국 법원의 속기사로 일하고 싶다. 대한민국 속기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며 법원행정처에서 계약직 속기사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법원 속기사 작업환경과 건강문제 대책 마련 시급"

법원속기사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 및 토론회 모습
 법원속기사 노동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 및 토론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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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법원 속기사들은 어떻게 근무하고 있을까. 법원 속기사들의 노동환경 및 건강 실태를 조사한 노동건강연대 정최경희 산업의학전문의는 "속기사들은 장시간에 걸쳐 지속되는 재판 동안 휴식도 없이 고도로 집중하며 일하기 때문에 노동 강도가 매우 높고, 이로 인해 근골격계 장애의 위험성이 타 직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다"고 밝혔다.

목, 어깨, 허리, 손목 등에 통증이 나타나는 근골격계 질환은 고정된 자세로 장시간 반복적인 일을 했을 때 주로 생기는 것으로 이날 토론회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됐는데, 법원 속기사들의 근골격계 질환은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실제로 법원 속기사들은 무려 97.4%가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는 '근골격계 통증호소율'이 비교적 높은 철도정비 노동자 95.2%나, 자동차부품공장 노동자 94.8%에 비해서도 높은 수치다.

또 "속기사들의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상태는 매우 불량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응답자 429명 중 건강군은 단지 2명에 불과했고, 잠재적 스트레스군이 56.9%(223명), 고위험군이 42.6%(167명)으로 나타났다"며 "고위험군이 이렇게까지 높게 나온 경우는 볼 수 없었다. 즉각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심각성을 우려했다.

여기에 속기사의 무려 60.5%가 자신의 청력이 손실된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응답했고, 청력 손실과 흔히 동반돼 나타나는 귀가 울리는 증상인 '이명'(耳鳴) 경험율도 45.3%에 달했다. 이는 속기사들이 장시간 동안 이어폰을 끼고 일하기 때문이다. 또 응답자 2명 중 1명은 일 때문에 소변을 참고 일했다.

정 전문의는 "현재 법원속기사들은 혼자서 장시간 고밀도의 노동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건강문제 특히 근골격계 질환과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킨다"며 "법원은 현재와 같은 위험한 업무체계를 국회 등에서 실시하고 있는 2인 1조 체계로 시급히 변경하고, 휴식시간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연구를 통해 법원 속기사들의 근골격계 질환,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청력감소의 문제가 밝혀지고 심각성이 드러나게 됐다. 이 문제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유해인자로 관리하고 그로 인한 장애를 감시하도록 정해져 있는 질환들이나, 그간 속기사들은 체계적인 조사나 건강진단조차 받지 못했다"며 "이번 조사를 계기로 법원 속기사들의 작업환경과 건강문제에 대한 주기적인 모니터링이 이뤄지고, 그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법원속기사들의 근골격계 질환과 작업환경측정을 조사한 인천대 김철홍 교수(노동과학연구소 소장)도 "근골격계질환 통증을 호소한 속기사는 97.4%에 달해 거의 대부분이 증상을 호소했고, 또한 2개 부위(어깨, 목 등) 이상 통증을 호소한 속기사는 95.8%, 3개 부위 이상의 복합적인 통증을 호소하는 속기사는 86%에 달해 법원 속기사들의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노출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근골격계 질환의 위험이 높은 법원의 근무환경을 평가한 결과 목, 어깨, 손목, 허리 등 부위의 근골격계 질환의 위험을 일으킬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빠른 시간에 법원 속기사들의 근무환경이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노조위원장 "이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다. 가슴 아프다"

법원노조 오병욱 위원장은 토론회에 앞서 인사말에서 "속기분과 조합원들이 투쟁의 주체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도 흔들림 없이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텨 줬기 때문에 속기용역화 저지투쟁이 성공적으로 끝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며 속기사들을 격려했다.

이어 "비록 속기사들의 정규직화는 미루어졌지만 그 부분은 또 여성분과 및 여성위원장과 일반직화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그 부분을 수면 위로 떠올려 투쟁을 전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주기도 했다.

아울러 "이번 조사결과를 훑어보니 옆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 차마 몰랐다. 근골격계 질환이 의심이 되는 분들이 3분의 2 정도가 되는데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와 비교해도 무려 30% 이상이 고생하고 있다는 게 대단히 가슴이 아프다"며 "이명 증상이 있다는 분들이 과반이 된다는 것도 참 가슴 아픈 현실이나, 이 부분은 법원행정처와 협의해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인터뷰할 때 속기사들 대부분 눈물 흘려... 좋은 결과 있길"

한편, 이번 조사와 자료집을 마련한 노동건강연대는 비실명으로 속기사들의 인터뷰를 담은 조사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대부분의 속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보고서에는 일부만 잘라서 담았기 때문에 격한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인터뷰 때는 지나간 일을 꺼내놓으면서 많이들 울었다. 오랜 기간 그걸 꾹꾹 누르고 살도록 만든 것은 뭘까."

조사 후기는 "법원을 돌며 만난 속기사들은 우리에게 무척 친절히 대해줬다.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매우 의식하며 주눅이 든 모습이었지만, 조금만 이야기하다보면 그동안 맺혔던 이야기를 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에 설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 보고서가 좋은 성과를 남겼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로이슈, #법원 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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