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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경기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 남한강 둔치.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에 참가한 아이들은 마냥 신났다.

 

남한강에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고운 모래가 덮인 둑길에선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 위에서 정지비행을 하고 있는 황조롱이를 보고 탄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지난 16일 교원소청심사로 해임이 확정된 송용운, 김윤주, 설은주, 박수영 교사 등 일제고사 해직교사들의 얼굴도 잠시나마 활짝 폈다. 이들은 이날 '남한강 생태학습 도우미'로 체험학습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아이들의 모습에 행복해한 사람들은 같이 길을 나선 학부모들이었다.

 

학부모 "아이가 불이익 받을까 걱정되지만..."

 

강원도 춘천에서 온 엄재철(44)씨는 둑길을 걷는 내내 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자가 "딸과 계속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다"며 말을 걸자 "언제 이런 시간이 있겠냐"고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기자가 일제고사에 대해 생각을 묻자,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일제고사 일정이 바뀌기 전부터 아이와 함께 이 시험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나도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부족한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딸의 학교에선 이미 학기 초에 반 평균성적을 고르게 하기 위한 '반편성시험'을 치렀다. 결국 학교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왜 또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정부에서 온 김영미(44)씨는 "나라가 미쳤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이날 체험학습에 나섰다.

 

김씨는 "의정부시는 비평준화 지역이라서 아이들이 성적에 대한 압박이 큰 편인데, 얼마 전 한 아이가 성적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보고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며 "모든 나라의 정책이 1% 상위권만을 위해 나오는 것 같다"고 분을 터뜨렸다.

 

그는 특히 "일부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그 1%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렇게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지금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헛된 기대감 때문에 아이를 고통으로 내몰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학부모 대다수가 이들과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일제고사 거부에 대한 부담감도 상당했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의 한 초등학교 학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학교로부터 2차례나 전화를 받았다.

 

"전날에도 전화가 여러 번 왔다.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는데 처리를 안 해주고 계속 전화만 하고 체험학습을 가면 안 된다는 내용의 가정통신문도 보냈다. 그냥 무시할 수 있지만 이후에 아이가 선생님들로부터 다른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이 된다."

 

"우리를 공부로봇 만드는 시험 싫어요"

 

 

아이들도 입을 모아 학교로부터 받은 '설움'을 털어놨다. 일부 아이들은 체험학습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도 담임교사로부터 "학교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갔던 거원중 장정원(14)양은 "학교에서 지난해 거원초등학교 6학년 9반 아이들 중 체험학습 갔던 아이들만 따로 체크해 일제고사 보라고 강요했다"며 "어쩌면 내일 따로 시험을 봐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거원초등학교 6학년 9반 학생들은 지난해 일제고사 파문으로 담임 선생님(박수영 교사)을 잃었다.

 

장양은 "어제도 담임선생님이 6번이나 전화하고 쉬는 시간에도 교장·교감 선생님이 불러가 체험학습을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학생주임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한테 '6학년 9반 아이들은 말썽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ㄷ 중학교의 우아무개(14)양은 "어제 오후 6시에 담임선생님이 내가 오지 않으면 퇴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모님이랑 함께 가서 1시간 동안 체험학습 가지 말란 이야길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역시 당당했다. 교복을 입고 체험학습에 참여한 김정연(14. 호계중)양은 "학교 친구들도 다 시험보기 싫다고 했다"며 "그 아이들을 대표해서 교복을 입고 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학교에서 필요하지도 않은 시험을 보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자연 체험하는 게 백 배 낫다"며 "일제고사는 우리를 공부로봇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여주 신륵사에서 남한강 강변을 따라 진행된 체험학습은 여주대교 밑에 와서 끝이 났다.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대형 천에 함께 낙서를 하며 마지막 수업을 만끽했다.  

 

지난해 12월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해 해임당한 송용운 교사(선사초)는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시험으로부터 탈출해 자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작년 10월보다 훨씬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에 왔다. 교육당국이 이것을 보고 일제고사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포기하면 좋을텐데 지금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1~2년간 일제고사를 치를 때마다 이 같은 학생과 학부모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교육당국이 일제고사를 하루 빨리 포기하길 바란다."


태그:#일제고사, #체험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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