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두 얼굴 곰보바위
 두 얼굴 곰보바위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만날 반 토막 산행을 했으니 오늘은 종주등산 한번 해보는 게 어때?"
"그거 좋지. 이제 산행 경력도 좀 쌓았으니 종주산행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일행들이 쉽게 동의를 해준다. 수락산이야 한 두 번 오른 산이 아니다. 젊었을 때부터 오른 횟수를 모두 합치면 수십 번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오른 산이었지만 한쪽 끝자락에서 시작하여 가장 긴 코스를 걸어 소위 종주등산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3월 17일 황사까지 희부옇게 뒤덮인 수락산을 종주 등산하게 된 것은 일행들이 모두 흔쾌히 동의를 해줬기 때문이었다. 산행은 지하철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고개역을 출발한 일행 3명은 덕릉고개로 오르다가 왼편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행 초입에서 만난 재롱둥이 황구

"아휴! 얘 좀 봐요? 귀여워 죽겠네, 꼬리뿐만 아니라 엉덩이까지 살살 흔들면서 걷는 저것 좀 봐요?"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자 할머니 등산객 3명이 커다란 개를 어른다. 개는 야채상 트럭과 함께 온 녀석으로 살이 디룩디룩 오른 커다란 황구였는데 이 녀석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아주 귀여운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주인이 던져 준 커다란 오이를 덥석 입에 문 녀석은 그 오이를 입에 물고 트럭 주변을 돌며 꼬리와 함께 엉덩이까지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 주인아저씨가 파는 오이 사세요. 아주 맛있는 오이에요!" 하고 자랑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들자 얼굴만 슬쩍 보여주고 다시 뒤뚱뒤뚱, 예의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 사진 찍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주인이 "이 녀석 아저씨 사진 찍게 거기 앉아봐!" 하는 명령을 듣고서야 잠깐 동안 얌전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 재롱둥이 황구 녀석이 귀여워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준 다음 골짜기를 타고 올랐다.

커다란 오이를 입에물고 엉덩이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린 누렁이
 커다란 오이를 입에물고 엉덩이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린 누렁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송암사 대웅전
 송암사 대웅전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곧 자그마한 절집이 나타났다. 송암사였다. 아담하고 작은 절집은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대웅전 앞 등산로 길가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불상 앞에는 양 볼과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돌조각 화상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도안사로 오르는 길이다. 길은 여전히 콘크리트 포장으로 좋았지만 경사가 조금 급해졌다. 저 위에 돌사자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안쪽이 도안사다. 도안사로 오르는 길가엔 하얀 알루미늄 판에 쓰여 있는 글들이 등산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산길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명언들에 감동을 받다

글1- "길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있고,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의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도 다만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뜬 구름 같은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청담 수상록 중에서-

글2- "저 산골짝에 흐르는 물소리 예사로 듣지 마오,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소리라오, 가슴 어깨를 펴고 앞을 보고 걸으시오,  걸으면서 생각하고 뛰면서 일을 하오, 고난이 극심할 때라도 꺾여서는 아니 되오."  -도안사-

글3-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상,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더라도, 아무리 걸식만 하고 살았더라도 한 줌 재로 화할 인생인데 내 것만을 챙기고 남의 마음에 상처만을 남긴다면 허무한 인생에다 원망만 잔뜩 짊어진 채 가는 인생이 될 것이다." -혜자, 사람노릇하고 살기 어디 쉬운가? 중에서-

일행 한 사람이 2번째 글을 읽으며 "이 글은 꼭 힘겹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 하는 말 같다"고 한다. 많은 공감을 했나 보았다. 글을 모두 읽고 돌아서는 일행들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산길을 오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글을 읽으며 잔잔한 감동이 일었나 보았다.

도안사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절집 담장 아래 묶여 있는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으며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대웅전 앞마당에 돌탑과 나란히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저 홀로 외로운 모습이다.

재미 있는 표정의 송암사 마당 돌화상
 재미 있는 표정의 송암사 마당 돌화상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도안사 대웅전 앞마당의 돌탑과 소나무
 도안사 대웅전 앞마당의 돌탑과 소나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등산로는 범종각 옆으로 나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가파른 산길이다. 20여 분 올라가자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나타난다. 바위들의 표정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고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바위산 수락산에서 만난 다양한 표정의 바위들

능선길에서 만난 '곰보바위'도 그랬다. 바위면이 곰보처럼 움푹움푹 파인 곳이 많아서 곰보바위라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편과 왼편에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표정의 바위들을 넘고 틈바구니를 지나 오르다보면 도솔봉이다. 도솔봉 능선에 오르는 길은 그 모양이 매우 이국적이다. 도솔봉에 올라 바라보는 서울 동북부 풍경이 전에 몇 번인가 밤에 올라 바라보았던 풍경하고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부터 주봉까지 가는 길은 능선길이다. 높고 낮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바위와 봉우리들을 만난다. 산 전체가 바위산인 수락산 만큼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많은 산도 드물 것이다.

투구바위, 철모바위, 곰바위, 공룡바위, 종바위, 계란바위, 양파바위, 소녀바위, 하강바위, 기차바위, 가면바위, 남근바위. 그런데 남근바위는 자세히 살펴보니 요리사 모자 같은 모양이어서 이름을 바꿔주었다. 오르내리는 능선길의 모습도 다양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가파른 바윗길에는 매끄러운 바위면에 쇠못을 박아 놓고 양쪽에 쇠줄 손잡이를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전에는 그냥 밧줄을 걸어놓아 붙잡고 오르내리던 곳이다. 쇠못을 밟고 오르내리기가 조금 편리하긴 하지만 혹시 그 쇠못을 잘못 밟아 삐끗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도솔봉 능선 오르는 길
 도솔봉 능선 오르는 길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로 뒤덮인 봉우리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로 뒤덮인 봉우리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비좁은 바위틈을 통과하고 위험하고 미끄러운 바위를 오르내리며 어렵사리 주봉 정상에 올랐다. 해발 637미터, 커다란 바위 아래 세워져 있는 정상 표지석이 여간 초라한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그 표지석을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산위에 올라 먹는 도시락과 정상주 한 잔의 맛

"저쪽 끝으로 내려가려면 아직도 네 개의 봉우리를 지나야겠네."
정상에서 바라본 동막골 산자락이 황사바람 속에 아스라하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이다. 조금 내려가다가 주말이면 막걸리를 팔던 주인 없는 주막에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제법 세찬 황사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주막(?) 덕분에 점심자리가 아늑하다.

"오늘은 정상주 없는 겨?"
도시락을 꺼내 먹으려는 순간 일행 한 사람이 술을 찾는다. 왜 없겠는가. 비록 아주 적은 양이긴 하지만 내 배낭 속엔 항상 작은 우유병에 담긴 정상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점심 도시락과 컵라면을 안주 삼아 마시는 한 잔의 정상주가 일행들의 산행 기분을 한껏 고조시킨다.

산 위에서 먹는 점심 밥맛이야 항상 꿀맛이다. 그 꿀맛같은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봉우리 한 개를 지나자 내리막길이다. 그런데 반대쪽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상당히 심각하다. 만만찮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올라온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바로 기차바위(홈통바위) 절벽을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찔한 모습이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아슬아슬한 절벽이 족히 70~80미터는 될 것 같다. 절벽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우리 저쪽 우회코스로 내려가지?"
전부터 고소공포증이 있는 일행 한 사람이 다른 길로 내려가자고 한다. 절벽은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훨씬 더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절벽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만일 일행 중 한사람이라도 밧줄을 붙잡고 내려가다가 현기증 때문에 밧줄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남근바위라고요? 요리사 모자바위
 남근바위라고요? 요리사 모자바위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아슬아슬한 기차바위 절벽길
 아슬아슬한 기차바위 절벽길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좋아 저 위쪽에 우회로가 표시되어 있더구먼."
그렇게 산길을 조금 돌아 내려섰다 뒤돌아보니 기차바위 절벽에 매달려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간 아슬아슬한 게 아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길가에 우리 또래로 보이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은 누워 있고 다른 한 사람이 누워있는 사람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바로 기차바위를 내려오다가 다리가 너무 긴장하여 쥐가 났는데 풀리지 않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던 사람들이었다. 내려온 다음에 쥐가 났으니 망정이지 절벽 중간쯤에서 쥐가 났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일행이 배낭에서 근육을 풀어주는 스프레이를 꺼내 쥐난 부위에 뿌려주자 금방 시원하다며 일어난다.

기차바위 절벽 내려오다 위험했던 나이든 등산객들

옛날에는 그 정도 절벽은 무리 없이 오르내렸던 실력이어서 안심하고 내려오다가 변을 당할 뻔 했다고 한다. 역시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세월의 벽이었던 셈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시절 생각에 빠져 범하기 쉬운 위험한 산행의 일단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높지 않은 봉우리 세 개를 넘어서자 그 다음부터는 평탄한 내리막길이었다. 능선길에서 바라본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황사 때문에 시야가 희부옇게 흐린 것이 흠이었다. 맞은편의 도봉산과 사패산의 풍경도 안갯속의 그것처럼 희미하다.

길가의 진달래 꽃망울이 조금 부풀어 보이는 것이 머지않아 꽃을 활짝 피울 것 같았다. 평평한 안부에서 잠깐 쉬며 과일을 먹었다, 과일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의 여성등산객을 만났다.

내려가는 능선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주봉
 내려가는 능선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주봉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상계동에서 올라왔다는 젊은 여성등산객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가까웠다며 서둘러 내려가고, 멀리 강서구 방화동에서 왔다는 오십대의 아주머니도 빨리 집에 돌아가 저녁을 지어야 한다며 서둘러 내려간다.

"산에 올라와도 바쁜 일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야."
"유유자적은 우리 같은 백수들이나 누릴 수 있는 여유인 셈이지..."

일행들이 모처럼 백수의 자유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보았다. 그렇게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 도착한 곳이 처음에 계획했던 동막골이다. 당고개역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수락산, #종주등반, #이승철, #당고개역, #동막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