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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연예인들 자살 원인도 우울증이라 밝혀지고 있고, 불황을 틈타 직장 내 우울증 환자도 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뿐인가요. 산후우울증 역시 주부들 사이에서는 큰 관심거리죠. 그래서 들어봤습니다. 가상이지만, '우울'의 처절한 생존기를.  <편집자말>
내 이름은 '우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울증'이라고 부르지요. 제 이름을 많이 들어 보셨다구요? 당연합니다. 생각보다 저를 반기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저는 다른 질병 형제들이 특정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달리, 어린 나이부터 노년 그리고 건장한 남성들부터 출산한 여성들까지 폭넓은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거든요.  

 

내 이름은 우울,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러나 저를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어르신들과 암과 같은 내 친구들을 만난 사람들 그리고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엄마들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또 저를 가장 그리워하는 계절은 햇빛이 빨리 떨어지는 가을과 겨울인데, 요즘 같은 불황에는 제 인기가 점점 좋아지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저를 만나기 위해서 특별한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쉽게 저를 만나려면 '좌절'이나 '상실' 등의 제 친구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지요. 그들은 사실 저보다 사람들과 더 친하거든요. 문득,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집안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말러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와 형제들과도 돈독하게 지냈었습니다. 이래 뵈도 말러의 음악에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자부하고 있다구요.

 

생각해보면 의외로 저는 인간 세상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제 친구들의 경우, 우선 저를 만나면 밥맛을 잃어 잘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거든요. 이래 저래 밥값이나, 유흥비 등을 아낄 수 있는 셈이지요. 요즘 같은 불황에 저랑 친구하시면 그야말로 딱이죠. 그렇다고 너무 움직이지 않아서 살찌는 것까지 제 탓이라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또 성욕도 감소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많이 벌어지는 불필요한 성적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준답니다. 

 

저와 만나면 '허무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쓰다보니 제가 생각해도, 저는 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같이 느껴지네요. 물론 잠을 일찍 깬다거나 피로감을 많이 느낀다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서로 길들여져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애교로 봐주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와 만나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인생 자체가 허무하다는 거죠. 인생 뭐 별 거 있나요? 부조리한 이 시대.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 아니겠냐구요.

 

만약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실패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구 탓을 하겠어요? 이 모든 것이 당신 책임인데 말이에요. 세상 돌아가는 일이 이럴진대, 사람들은 외려 저를 죄인 취급해요. 억울하지만, 당신과 함께 하려면 이 정도 수모는 참아야겠지요?

 

주변에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소주 한 잔 하며 훌훌 떨쳐낼 거라구요? 그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에게 꼭 붙어있는 저를 끌어내려 할 거예요. 그리고 '희망'이나 '활기'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서 저와 당신의 관계를 훼방할 거예요. 당신, 정말 저랑 헤어지길 원하는 건가요? 

 

의사들은 마치 저를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의사를 찾은 당신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할 겁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라, 취미 활동을 해라 등등. 그리고 특히 여러 가지 약들을 권할 것입니다. 의사들은 '우울증 약'이라는 약을 처방할 것인데, 그 약들은 저와 당신의 관계를 떼어놓을 거예요. 과연 그 약이 당신과 내 사이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의사와 사람들을 경계하세요, 그러면 저와는 이별입니다

 

의사들은 제가 사람들의 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요. 제가 당신과 함께 있는 공간은 당신의 '뇌' 속이에요. 당신의 뇌 속에 있는 여러 호르몬들을 교란시켜 저와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울증 약'은 사람들의 뇌 속에 있는 호르몬들을 정상적으로 만들어 저를 당신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우울증 약'이 없던 예전에는 쉽게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좋은 약들이 너무 많이 나와 의사들의 지시대로 복용만 하면 제가 도저히 당신의 뇌 속에 발을 붙이기 힘들 정도예요.

 

당신이 저와 계속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주변 사람들을 절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당신의 부모 형제와 친구들은 저와 당신의 관계를 끊기 위해 무던히 애쓸 것이니, 가급적 그들도 멀리하세요. 제발 부디, 가급적 혼자 있어주세요. 제가 위로해 드릴게요. 저는 위로가 필요한,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주로 찾아가니까요. 

 

반건호 경희의료원 정신과 교수님은 나와 같은 정신질환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을 하는 것"을 추천하시더군요. 일거리가 없으면 일을 '찾아서'라도 하라고 하시네요. 

 

이전 사례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해요. 일을 찾아 나를 떠났던 사람들은 성취감을 느꼈다는 둥, 봉사활동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기분이 좋아졌다는 둥 하면서 저를 영영 떠나가 버리더라고요.

 

저는 무관심을 먹고 삽니다. 당신의 유일한 친구일 때만이 저는 행복하다고 느껴요. 하지만, 그래도 굳이 저를 떠나시겠다면 저는 잡을 힘이 없어요. 저는 스스로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갈 수 있으니까요. 저를 떠나시겠다면 부디, 처방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태그:#우울증,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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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면허의사(의사+한의사). 한국의사한의사 복수면허자협회 학술이사. 올바른 의학정보의 전달을 위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학과 한의학을 아우르는 통합의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건강 정보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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