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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목사 주유원? 생경스럽지만...

 

나는 목사다. 그러나 갑자기 목사의 일을 할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52살(당시) 난 사람이, 목회하는 일밖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 택한 일이 바로 주유원이었다. 절망과 비개를 가슴에 안고 세상이란 파고 위에 몸을 던지고 슬픔을 지을 수만은 없다는 용기로 주유원으로 취직했다.

 

생경스런 일용직 주유원으로서의 삶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였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뜨고 지켜보는 설핏한 세상에 주눅이 들 때도 있고, 거푸 푸근함의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는 이들에게 잔정을 느끼기도 했다. 하루하루의 일들을 글로 엮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목사가 쓴 주유원 이야기'라는 이 글이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다른 이들의 더한 고통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희희낙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각기 제 인생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했던가. 스토리가 그럴 듯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어서 드라마틱하거나, 소설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목회의 일에서 밀려난 나는 목사로 밖에는 살아오지 않은 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병이 들었고 우울증 증세로 아내와 같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병원 치료를 받다 보니 살길이 막막한 것이 아닌가. 어쩌겠는가. 정신을 차리고 살길을 찾는 수밖에. 그래서 생활정보지들을 매일 들고 들어와 뒤졌다. 그러나 마땅한 일이 없었다. 주유하러 들른 주유소에서 주유원을 뽑는다기에 써주기를 간청했더니 얼마 후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의 주유원으로서의 짧으나 골 깊은 인생이 주유소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일기 형식으로 썼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첫 번째 부분은 주유원으로 취직하여 주유소의 일을 배워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두 번째 부분은 주유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주유를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 부분은 당당한(?) 주유원으로 경험한 내용들을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다룬 조금은 내 생각이 많이 가미된 이야기들이다.

 

차지 말아야 할 꿀통을 차고 꿀벌에 잔뜩 쏘이고는 후회하며 주유소의 마당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신음보다 아픈 가슴과 그 깊이만큼의 상흔을 보듬으며 무거리들을 한 뭉텅이씩 주유소에 쏟아 놓았다. 말을 들어줄 이조차 잃은, 그럴 시간을 만들지도 못하는, 고독한 내게 글이란 치유자요, 위로자였다. 아픈 마음을 글을 통해 쏟아내고 그럼으로 치유라는 과정을 향해 달렸다.

 

옷은 주유원인데, 사람은 목사?

 

취직을 알리는 휴대전화 소리는 나의 또 다른 나를 향한 몸짓이었다. 전화를 받고 주유소로 달려가 면접을 하고, 이내 취직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즐거움과 비탄이란, 설명이 안 된다. 햇살이 재잘거리는 아침에 이뤄졌던 역사적 일탈, 첫 출근길을 잊을 수 없다. 낯설기만 한 주유소 마당 한가운데 서서 외로움과 처량함을 버무려 눈물 몇 방울과 바꾸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주유원의 옷을 입고도 주유원이 아닌 사람, 주유기를 들고도 주유원이 아닌 사람, 이런 수상한 이방인이 또 어디 있으랴. 나의 일용직 주유원으로서의 시작은 이렇게 첫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세차하기와 결제하기를 첫 날에 익히기도 했다. 수상함과 명석함은 딴 길로 행군하는 군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유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주유소에 출근한 지 며칠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숭고한 주유의 첫 경험이 이뤄졌으니까. 엉긴 노즐의 호스를 풀려다가 기름을 흘리는 바람에 첫 주유는 실패했다. 첫 주유 5만 원어치를 성공시킨 후 나가는 차 뒤꽁무니에 대고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가십시오' 외쳤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노즐 총을 쏘는 사나이! 또 다른 나의 별명이다. 총은 위험하다. 주유소의 노즐도 위험하다. 세상에서 말이라고 하는 총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악인들에 의해 죽이는 총으로 사용될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많이 만드는가? 그러나 노즐은 자동차를 살리는 일을 주로 한다. 설교가 영혼을 살린다면 노즐은 자동차를 살린다고 악다구니 치며 나는 행복해 했다.

 

목사였던 나의 주유원 등극이 매스컴을 다 탔다. <한국경제>가 나의 주유원 생활을 인용하여 목회자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인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로 CBS <크리스천 저널> 프로그램과도 전화 인터뷰를 했다. 김포시청 주최 안전 글짓기 대회에서도 입상하여 도지사의 상장을 받기도 했다.

 

사노라면, 그럴 수도 있지

 

김장훈은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라고 목청껏 노래했는데, 주유원이 된 후 하루하루 지나면서 익숙함은 살을 불렸고 점점 타성만 쌓이고 있었다. 조금은 주유원이 몸에 배었다 싶었을 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주유를 하려고 노즐의 꼬인 줄을 펴다가 기름이 조금 튀었는데 마침 내리던 운전자의 옷에 한 방울 튀긴 것이다.

 

"에이, ×발, 5백 원 어치도 넘겠네."

 

굽실대며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고 결국 500원은 내가 물어내고야 말았다. 험상궂은 얼굴의 젊은 사내는 이런 말을 씨부렁대며 사라졌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 ×발!"

 

아들 또래의 젊은이에게 실컷 욕을 얻어먹고도 기꺼워해야 하는 직업인, 그렇게 나는 주유원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내 실수에는 그리도 마음 무거웠었는데 어느 날 동료가 저지른 더 큰 실수에는 허탈하지만 안도의 웃음을 속으로 흘리기도 했다. 동료가 주유소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혼유 사고를 내고 말았다. 경유 차량에 휘발유를 주유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내 사고 때 그렇게 욕을 잘하는 사람을 만났던 것과는 달리 후더분한 운전자를 만났다는 게 그 동료의 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운전자가 남기고 간 말은 이랬다.

 

"그럴 수도 있죠. 뭐.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낮아지는 김에 철저히 낮아질 수 있었던 기회가 화장실 청소였다. 주유소 화장실 청소는 나의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넘어져 있지 않다면 일어섬도 없는 것임을, 철저히 배우면서 취직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월급봉투를 받았다. 80만 원이 든 월급봉투. 그걸 받아들고 얼마나 회한에 잠겼었던지. 그 봉투를 내밀었을 때 아내가 울었던 그 울음바다는 얼마나 넓었던지.

 

주유원으로의 득음

 

음악에서만 득음(得音)이 있는 게 아니다. 주유원에게도 득음(得音)이 있다. 거기 더하여 나는 득촉(得觸)까지 했다. 득음은 기름 들어가던 소리가 '스륵스륵' 하다가 '소륵소륵' 하는 걸 듣고 깨닫는 것이다. 차기 전에는 '스' 소리를 내다가 차면 '소' 소리로 변하는데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득촉은 노즐에 손을 대고 있다가 손의 감각으로 기름이 탱크에 찾는지 알아맞히는 것이다. 주유원이 된 지 달포쯤 되었을 때 난 득음과 득촉을 했다.

 

아내는 내가 주유원으로 살기를 익혀가고 있을 즈음에도 아직이었다. 목사의 아내, 다시 말해 사모의 태를 벗어놓지 못하고, 할 일 없는 목사의 아내로서 하루의 반은 눈물로, 또 남은 반은 한숨으로 보냈다. 그러던 아내도 결국은 이를 사리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는 전사가 되었다. 그녀는 텔레마케터로 시작하여 외판원으로 일했다. 보듬어주어야만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는 나약한 사람이 이를 사리물고 일어났으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나는 그저 박수를 보낼 수밖에.

 

주유소에 입사할 때 '위험물 안전 관리자' 자격증을 따기로 약속했던 터라 3일 동안 서울 당산동에 있는 한국소방안전협회에 가서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땄다. 일은 익숙해져 가는데 몸은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냈다. 발바닥은 가뭄에 논바닥 일어나듯 살갗들이 들고일어나 난동을 부렸다. 종아리는 항상 아리아리했다. 눈은 항상 벌겋게 충혈 되어 있고, 코는 항상 헐어있다.

 

주유소에는 꼴불견들이 퍼레이드를 벌인다. 먼지 한 올 안 묻은 차를 세차하러 오는 사람, 훌륭한 세단을 몰고 와 세차하고 세차비 천 원을 안 주고 휑하니 가는 사람, 기어이 후진하여 기름 값을 확인하고야 가는 사람, 담배를 꼬나물고 끄지 않은 채 주유를 기다리는 사람…. 그런 이들을 만날 때면 버겁기는 하지만 내 인생의 훈련이려니 생각했다.

 

천태만상의 사람들

 

그러나 고마운 이들도 많이 만났다. 나의 이런 전락을 알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위로하고 도운 이들이 많다. 그들은 나로 하여금 교회는 아직 살아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했다. 주유소에도 천사들은 많다. 세차를 해주자 수고했다며 담뱃값 하라며 돈을 쥐어주고 간 중년 여인, 농사를 지었다며 감자 한 상자를 내려놓고 간 오토바이 운전자, 시장 보고 오다 아이스크림이나, 바나나 타래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가는 운전자, 이들을 보며 주유소에 천사가 산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차에 몇 권씩 싣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사람이 아닌 인간인 이들이 있어, '교회 다니는 것들이' 소리가 목젖까지 오르게 하기도 했다. 주유소에서는 따로 식사 시간이 없어 게눈 감추기 대회를 하듯 식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짧은 점심시간에 그간 안 들어오던 차가 밀려들어오는 게 주유소를 지배하는 불문율이다.

 

주유소에 취직하면서 토시를 사 팔뚝에 찼고, 중국제 작업복도 사서 입었다. 발가락 양말은 무좀 양말이라는 선입견을 타파하기도 했다. 주유원으로 익숙한 때에도 나는 내 마음이 졸장부의 그것이어서 몹시 부쳤다. 껄끄러운 사람을 대하는 게 이리 어려운 것인지 주유소에서 많이 배웠다.

 

어둠과 어려움이 지배하는 나와 내 가족의 삶에도 항상 비만 내린 것은 아니다. 쌀을 가져다주는 목사님도 있었고 일하는 곳까지 방문한 지인들도 있었다. 주유소 풍경이 살벌한 것만은 아니어서 물을 찾아 날아드는 벌이나 나비도 만날 수 있다. 한가위에 휘영청 뜬 달을 보며 '총으로 빵 쏴서 떨어뜨리고 싶다'는 동료의 말이 새삼 내 가슴에 밟힌다.

 

날들이 날들을 물리치고 지나가고, 어느 새 봄에 시작한 주유원 생활이 찬 겨울 눈보라를 만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실수는 그때도 계속 되었다. 무엇보다 사장도 실수하는 것을 보며, 사람은 실수함으로 살아있음을 나타내지 않나 생각했다.(계속)

 

논픽션 '목사가 쓴 주유원 이야기'를 연재하며

 

미국경제를 비롯하여 세계경제가 바닥에서 언제 기를 펼지 모릅니다. '불경기'라는 상황이 이 어려운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트레이드가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때에 젊은이들은 취직을 못하고 있고, 이미 직장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실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한 실직자의 이야기가 고무적인 활기를 주었으면 하는 맘입니다. 그래서 이미 지난 경험이고 저에게는 부끄러운 과거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올립니다.

 

목사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걸 '실직'이라고 단순히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여튼 교회를 떠나 일용직(비정규직) 근로자인 주유원으로 일하면서 얻은 '고난 속의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모든 분들께 힘을 잃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슴을 저미고 달려드는 고난도 지나고 보면 인생에 좋은 추억을 선사하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힘내세요! 파이팅!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가 3년 전 겪은 실화입니다. 지금은 다 삭제되었지만 많은 내용을 당당뉴스와 뉴스앤조이에도 '김 목사의 주유원 일기'라는 제목으로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제되지 않은 한을 그대로 글에 담았습니다. 하긴 그랬기 때문에 그때의 힘들었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 발짝 물러난 지금(시골의 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음), 조금은 글이 되도록 다듬고 많은 부분을 첨부하여 이곳에 연재하려고 합니다.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태그:#주유원 이야기, #주유원 일기, #김학현, #주유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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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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