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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심난하다. 마음도 심난하다. 그런데 내 앞에 한 그림이 떠올랐다. KBS 진품명품 700회 기념방송에 나온 추사 김정희의 '불기심란'(不欺心蘭)이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온 듯한 이 문인화가 내 마음을 흔든다.

 

어릴 적에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왜 그렇게 훌륭한 그림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작은 집 옆에 있는 소나무들이 무에 그리 그리기 어려울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홍준의 '완당평전'이나 한승원의 소설로 추사 김정희에 대한 내 지식이 늘어갔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추사의 정신들과 서서히 접속한 것이리라. 또 예술을 읽어가는 내 심미안도 커가면서 추사라는 존재는 더 커졌다. 특히 불혹의 나이를 넘어가면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철학을 지키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더욱 깨달아갔다. 그런 점에서 추사 김정희는 문화를 배우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 거대한 사표였다.

 

또 복잡한 세상사에서 나는 추사처럼 마음을 가다듬으며 진정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방송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불기심란'(不欺心蘭)을 감상했다. 그림을 설명하는 화제(畵題)는 "난초를 칠 때에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안으로 마음을 살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쳐다보고 모든 사람이 지적하니 두렵지 아니한가. 이 작은 그림도 반드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비로소 손을 델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김영복 위원 역)이다. 추사는 글 후에 '아들 상우에게 써서 보인다'가 붙어 있다.

 

이 작품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간 시기를 전후로 나온 작품이다. 추사는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다. 김영복 위원은 서체 등으로 세한도가 만들어진 시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불기심란'의 기운은 심상치 않다. 막힘이 없이 유장하게 뻗어있는 난의 자태도 자태지만, 농묵으로 짙게 그린 난의 줄기와 꽃은 드넓게 성장한 추사의 품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도 세류에 흘러 다니다가 나름대로 초탈한 세계에 근접했기에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추사는 권문세족 집안이었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서 유배와 복직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필체 연구를 거듭해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금석학을 바탕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치를 완성한다. 그의 글씨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알려졌다.

 

추사는 젊은 적부터 기고만장한 인물이었다. 이광사 등 당대 명필 들을 비웃지만 결국 그 자만이 많은 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유배자의 신분이 된다.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인생의 진정한 지인들을 만난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이나 초의선사, 소치 허유 같은 이들과 교유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그는 견고한 자신을 만들고, 추사체도 완성하는 것이다.

 

추사를 정치적 혼돈으로 물어넣었던 것은 순종에 이어,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심난한 시기였다. 세계적인 경제 혼란 속에 정치적 격난이 지나는 이때는 그때보다는 덜하겠지만 그래도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기 힘든 때임에 틀림없다.

 

이럴 때 만난 추사의 '심기불란'은 다시 나에게 묻는다.

"너는 세상 일에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는 않느냐"

"네가 내놓은 것들에 대해 한 점 부끄럼도 없는가"

"너는 매사에 정성스럽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가"라고.

 

아마도 이는 누구보다도 이 시대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소중한 화두가 될 것이다. 사실 프로그램에서 감정단은 아쉬운 마음으로 '10억원'의 감정가를 내놓았다. 당대 유명화가의 작품이 50억원을 호가하는 상황에서 한국 최고의 명필가의 혼이 담긴 예술품치고는 너무 박하다가 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세상의 절개를 초개처럼 생각하는 낙하산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불기심란'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들은 차라리 이 '불기심란'을 보는 것 만으로 심난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태그:#김정희, #불기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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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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