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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과 함께
 백운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과 함께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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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졸 개울물 소리와 포근한 바람결이 완연한 봄이구먼, 봄이야."
"정말 그러네, 봄의 숨결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 같은 걸."

아직 깜깜한 새벽 산길을 걸어 올라가며 누군가 소곤소곤 봄 이야기를 꺼낸다. 모두들 손에 작은 손전등을 켜들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이마에서 밝은 불빛이 쏟아져 나온다. 깊이 잠든 산새나 산짐승들을 깨울세라 모두들 조심스러운 몸짓이다.

서울 천호동에서 3월 10일 밤 11시에 버스를 타고 달려 순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산행을 시작한 곳은 광양시 옥룡면 동동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오른편 산자락에 기대어 있는 마을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산악회 산행 길잡이가 앞장을 섰지만 마을 안길에서부터 길이 헷갈리는가 보았다. 어렵사리 마을을 벗어났지만 뚜렷하지 않은 산길은 길잡이를 자꾸만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두운 밤길, 그것도 산길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노랭이 봉에서 잡은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억불봉
 노랭이 봉에서 잡은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억불봉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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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무니를 따르던 후미 길잡이는 갑작스레 병이 난 여성등산객 한 사람 때문에 더욱 뒤쳐진 상태였다. 결국 병이 난 여성은 동행 네 명과 함께 버스로 뒤돌아 내려가고 그들을 내려 보낸 후 헐레벌떡 뒤쫓아 온 후미 길잡이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어둠을 뚫고 오르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몇 번인가 길을 잘 못 들어 30여 분 이상 우왕좌왕 하는 동안, 산행 길잡이는 성질 급한 등산객으로부터 심한 지청구를 듣고서야 올바른 길을 찾았다. 길을 찾아 한참 올라가노라니 희부옇게 동쪽 하늘이 밝아온다.

"깊은 산길에서 새벽을 맞는 기분이 매우 상쾌하구먼."

일행들이 산길을 오르다가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날이 밝아오자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느낌이었다.

"삐리리~ 삣삣."

길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산새 몇 마리가 새벽을 깨운다.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길이어서인지 바람도 불지 않고 포근하여 금방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날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세며 풍경들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난다.

산자락은 온통 잡목 숲이다. 소나무 잣나무 같은 푸른 침엽수는 극히 드물었다. 크고 작은 돌과 바윗덩이가 깔려있는 산길을 허위허위 한 시간 정도 오르자 노랭이 봉이다. 앞쪽으로 솟아 있는 우람한 봉우리는 억불봉이었다.

저 마래로 내려다보이는 광양만
 저 마래로 내려다보이는 광양만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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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쪽으로 솟아 있는 봉우리가 매봉, 멀리 바라보이는 백운산에 올랐다가 매봉을 거쳐 섬진강변으로 내려가려면 거리가 만만찮아 보인다. 그러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기왕 시작한 산행이니 끝까지 걸어보는 거다.

노랭이봉에서 능선을 따라 내리막길을 잠깐 걸어 다시 오르막 능선길, 억불봉으로 가는 길 삼거리엔 헬기장이 있고, 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 쉼터였다. 쉼터에서 잠깐 쉬며 과일 두 개씩을 나눠먹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잠깐 쉬는 사이 온몸이 서늘해진다. 역시 산이 높아 아래 골짜기와는 바람결이 사뭇 달랐다. 길바닥도 바짝 얼어있었다. 벗었던 보온조끼를 다시 꺼내 입었다. 억불봉에서 백운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이었지만 높고 낮은 작은 봉우리 몇 개를 거쳐 가는 길이었다.

능선길은 서늘한 바람결만큼이나 전망도 시원했다. 광양만을 비롯한 남해바다가 수많은 호수처럼 점점이 바라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걷다가 뒤돌아보니 연전에 다녀온 남해 섬의 금산이 다시 한 번 더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포근한 봄의 숨결에 젖은 등산길

오른편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지리산일 것이다. 왼편 골짜기는 그 길이가 10킬로미터가 넘는다는 광양읍 동천을 거쳐 광양만으로 흘러가는 동곡계곡이다. 기나긴 계곡 곳곳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 풍경이 옅은 봄빛을 받아 그림처럼 아름답다.

웅장한 백운산 능선과 저 멀리 바라보이는 백운산 정상인 상봉
 웅장한 백운산 능선과 저 멀리 바라보이는 백운산 정상인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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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과 뒤, 멀리 가까이 이어진 능선길은 공룡처럼 우람하다. 이 백운산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호남정맥 끝자락에 불쑥 솟은 마침표 같은 산이라고 했던가. 1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이어진 모습이 태백산맥에 손색없는 장엄한 위용이다.

잡목만 우거진 산자락과는 달리 능선길과 길가엔 가끔씩 소나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소나무들의 모양이 다른 산 소나무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줄기 1~2미터 쯤 위에서 몇 개씩의 가지들이 자라나 비스듬하게 위로 자란 모습들이 그랬다.

그렇게 가금씩 나타나던 소나무가 이번에는 능선길 한 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것이 나타났다. 그런데 소나무에 걸린 명패를 보니 놀랍다. 선유송(仙遊松)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선유송이면 신선이 놀던 소나무라는 뜻이 아닌가.

신선이 놀던 소나무도 만나고, 멋진 산 박사 산사나이도 만나고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를 걸어 백운산 정상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봉우리에서 만난 사람이 '산에 미처 산사진만 찍는 산사나이' 장지환(36)씨였다. 멀리 바라보이는 멋진 배경을 바라보며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어르신들, 같이 나란히  서시죠?" 하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능선길에서 만난  선유송
 능선길에서 만난 선유송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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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 삼각대를 설치하는 것을 보니 너무 무거워보였다. 그는 멀고 가까운 산들을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의 카메라 장비와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 앞에 보이는 저 우람한 산이 혹시 지리산 맞습니까?"
"예, 어르신 맞습니다. 북쪽에서부터 긴 능선으로 이어지다가 불쑥 솟아 오른 저 봉우리 보이시죠? 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입니다."

그는 짐작했던 것처럼 산행경험이 우리 일행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 저쪽에 보이는 산들은 무슨 산입니까?"
"아, 예, 저 앞쪽에 보이는 저 산이 순천 조계산이구요. 저 멀리 바라보이는 높은 산이 광주 무등산입니다. 저 아래 쪽으로 까마득하게 바라보이는 저 산이 고흥 팔영산일 겁니다."

이 정도면 가히 산 박사다. 산위에 오르면 대개의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때문에 멀리 보이는 산은 고사하고 가까운 산도 알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멀고 가까운 산을 줄줄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조계산과 무등산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조계산과 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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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실 이쪽은 조금 낯선 편입니다. 중부지방이나 강원도 지방의 산들은 산위에 오르면 대충 알아보는 편인데요."

그도 남쪽 지방의 산들은 자주 오를 기회가 없어서 조금 알아맞히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일행들에게 그는 정말 산과 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이 백운산을 지리산의 전망대라고도 합니다. 섬진강 건너편에 있는 지리산을 가장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산이기 때문입니다. 강원도에서는 치악산이 강원도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역에 있는 산들까지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산이지요."

우리들도 전남 지역의 산은 자주 가는 편이 아니어서 전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는데, 그의 설명을 들으며 바라본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와 멀리 가까이 바라보이는 산들이 새삼스럽게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 여기도 무덤이 있네, 이 능선은 해발 1천 미터가 넘을 텐데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무덤을 만들었을까?"

"그러게 말이야, 도참사상에서 비롯된 풍수지리 때문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소위 명당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참 대단한 것 같아?"

장지환씨와 헤어져 걷다가 정상이 그리 멀지 않은 높은 능선길에서 만난 무덤 한 기는 정말 놀라운 모습이었다.

1천미터 높이의 능선길에 있는 무덤과 비석
 1천미터 높이의 능선길에 있는 무덤과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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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행을 계속하여 백운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이래야 능선길에서 그리 많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설치해놓은 밧줄을 붙잡고 오른 그리 크지 않고 높지 않은 바위봉우리가 백운산의 정상이었다.

정상에는 '백운산 상봉 1218미터'라고 새겨진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래도 정상에 올라서니 섬진강 건너편의 지리산이 한결 뚜렷한 모습이다. 섬진강 하구도 선명하게 바라보인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와 근처 아늑한 곳에서 다시 간식을 들고 하산길로 나섰다.

걷고 걸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20킬로미터 능선길에 녹초가 되다

내리막길은 급경사였다. 급경사길을 내려서자 다시 능선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능선길 곳곳에 버티고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도 많았다. 정상에서 저 만큼 아래쪽에 내려다보이던 봉우리는 매봉이 아니었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내려와서야 매봉에 당도했다. 해발 865,3미터인 매봉엔 특별한 표지가 없었다. 나뭇가지에 수없이 많이 걸려 있는 리본들 사이에 누군가 종이에 글씨를 써서 비닐포장을 하여 걸어놓은 초라한 표지가 전부였다.

"매봉에 올랐으니 이제 산행도 거의 끝나가는 셈인가?"

일행 한 사람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기대어린 표정을 짓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어느덧 여섯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모두들 지쳐 힘들어 하고 있었다.

매봉의 산악회 리본들
 매봉의 산악회 리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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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매봉을 거쳐 내려간다고 했으니까."

산행 시작 전에 산악회장이 했던 말이 생각나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능선길 왼편 아래로 가끔씩 바라보이는 섬진강과 강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이제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져보았지만 허사였다.

능선길과 앞을 막아선 봉우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지친 일행들 앞에 나타나는 봉우리들은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 높은 봉우리들은 아니었지만 지쳐 녹초가 된 사람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저 나무들 좀 봐? 매끄러운 줄기에 아름다운 무늬까지, 멋진 나문데."

모두들 지쳐 있으면서도 볼 것은 다 본다. 매봉을 지나면서부터 유난히 많이 눈에 띤 나무들이었다. 나무껍질이 아주 매끄러워 보이는 나무는 위로 곧게 쭉쭉 뻗어 올라갔는데 그 매끄러운 줄기에 아주 멋진 무늬가 선명한 나무였다.

줄기 무늬가 아름다운 노각나무와 섬진강을 조망하지 못하는 아쉬움

무늬의 색깔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나무는 갈색과 흰색, 또 어떤 나무는 연초록색과 흰색, 그리고 또 다른 것은 분홍색과 흰색, 그리고 연초록색이 섞여 있는 무늬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매끄러운 모습이 사슴뿔처럼 생겼대서 녹각나무라고도 불리는 노각나무였다. 추위와 가뭄에도 강하여 골짜기에서는 볼 수 없고, 해발 200미터 이상 중턱과 능선길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닌데 이 능선길에 유난히 많이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기무늬가 아름다운 노각나무
 줄기무늬가 아름다운 노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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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이 강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고급목재로 사용되고 관상수로도 사랑받는 나무였다. 힘들고 지루한 산행으로 지친 일행들이 노각나무를 만날 때마다 그 아름답고 멋진 모습과 무늬를 바라보며 힘을 얻고 있었다.

"이 능선길에서 섬진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구먼."
"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먼. 숲에 가려 저 아름다운 섬진강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단 말이야."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정말 그랬다. 수없이 오르내리는 높고 낮은 봉우리와 끝없이 이어진 능선길 어느 곳에서도 섬진강을 시원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 숲 사이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섬진강은 너무 아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또 몇 개의 봉우리를 넘고서야 내려가는 길이 나타났다. 봉우리를 내려서 다시 앞에 나타난 제법 높직한 봉우리에 놀라고 있을 때였다. 등산객 한 사람이 가리고 서있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관동, 쫓비산> 관동은 왼편 아래쪽으로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환한 기쁨의 미소가 피어난다. '이제 살았다'하는 표정들이다. 길은 급경사였지만 거리는 가까웠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하얀꽃을 화사하게 피운 매화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을 기다리는 버스는 광양시 다압면 '관동마을' 표지석과 빨간 우체통이 나란히 서있는 길가에 서있었다.

하산지점인 광양시 다압면 관동마을 표지석과 빨간 우체통
 하산지점인 광양시 다압면 관동마을 표지석과 빨간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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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옥룡면 동동에서 시작하여 다압면 관동에서 마친 산행이구먼, 동동에서 관동까지라,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이름이네, 우리들 산행 코스가 몇 킬로미터나 될 것 같습니까?"

산악회원 한 사람이 뜬금없는 질문을 툭 던진다. 그도 오늘 산행이 몹시 힘들었던가 보았다.

"내가 계산해 보니까 약 20킬로미터 쯤 되던 걸요. 봉우리도 20여개 넘었고요."

산행 할 때마다 거리를 꼼꼼하게 계산하는 일행이 대답을 한다. 그는 봉우리 수도 헤아렸던가 보았다. 관동마을 도착 시간은 낮 12시 30분이었다.

산길 20여 킬로미터에 20여 개의 봉우리를 7시간 30분 동안 산행한 셈이었다. 근처 길가에서 활짝 꽃피운 매화나무 한 그루가 은은한 향으로 일행들의 피로를 씻어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백운산, #호남정맥, #이승철, #동동마을, #관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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