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는 구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직업을 말해야 하나. 이름을 말해야 하나. 우리는 누구나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당위 앞에 놓인다. 하지만 설사 무엇이라 말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을 말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묻는 사람이 듣고자 하는 말일 수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아카데미 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미키 루크는 <더 레슬러>에서 당당하게 '레슬러'라고 말한다. 물론 이 영화를 통하여 실재의 미키 루크는 자신은 '배우'라고 말한다. 그들이 무엇인가 진술했다는 말이 아니다. 웬만한 관객이라면 그가 충분히 레슬러요 배우라고 말했다고 믿을 수 있다.

 

미키 루크는 원래 핸섬 가이였다. 하지만 심각한 성형 부작용으로 삶이 무너졌다. 늦은 나이에 프로 복서로 활동하다 좌절하기도 한다. 그가 주연을 맡게 되면서 일약 옛날의 명성을 되찾는다. 연기가 곧 그의 삶임을 보여준 영화가 <더 레슬러>다. 영화 내용과 배우의 삶이 일치하니 더 실감이 난다.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

 

 링에서 모든 걸 얻고, 또 링에서 모든 걸 잃은 프로 레슬러의 고독.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하나 있는 혈육인 딸마저 자신을 팽개치고 링에 올인 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링에서 모든 걸 얻고, 또 링에서 모든 걸 잃은 프로 레슬러의 고독.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하나 있는 혈육인 딸마저 자신을 팽개치고 링에 올인 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 n.e.w.

영화에서 랜디는 레슬링에 복귀하는 모습을 통하여 레슬러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미키 루크는 이 영화를 통하여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나는 나를 누구로 알고 살고 있을까? 이 좀은 난해한 질문이 <더 레슬러>에서는 극히 자연스럽게 레슬러 랜디의 삶을 통하여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영화의 랜디는 현란한 테크닉과 무대 매너로 8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스타 레슬러다. 심장이상 때문에 평생의 꿈과 열정을 쏟아냈던 링을 떠나 식품점에서 일을 하지만 그곳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의 삶은 '레슬러'라는 타이틀과 함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링에서 모든 걸 얻고, 또 링에서 모든 걸 잃은 프로 레슬러의 고독.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하나 있는 혈육인 딸마저 자신을 팽개치고 링에 올인 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고독이 짙으면 짙을수록, 딸의 방황도 깊어만 간다.

 

아버지의 애틋함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 아버지와 딸 사이에 놓인 것은 시간의 단절 뿐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불신과 애증이었다. 어떤 면에선 아버지의 부정에 못지않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가진 딸이지만 이제는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이를 낸 것은 다름 아닌 링이다. 링 위에 서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링 위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한 레슬러의 결단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그인 것은 레슬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슬러에게서 레슬링은 그 자체가 삶이다. 링을 떠난 그의 삶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딸은 도저히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아버지. 그의 고독은 어찌 보면 모든 이의 삶에 낀 안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벗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스트리퍼 케시디(마리사 토메이). 둘은 벗어야 산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벗어야 사는 사람들

 

 둘 다 벗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로서의 공감일까. 나는 이 영화를 통하여 음란으로만 통하는 ‘벗어야 함’이 그렇게 질긴 인생의 마지막 보루라는 걸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벗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로서의 공감일까. 나는 이 영화를 통하여 음란으로만 통하는 ‘벗어야 함’이 그렇게 질긴 인생의 마지막 보루라는 걸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n.e.w.

벗어야 먹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스트립쇼를 하는 쇼걸과 프로 레슬러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수상하게도(?) 영화에서 이 둘이 엮인다. '나는 프로레슬러다'라고 대담하게 외칠 수 있는 랜디에 비하면, 그렇게 당당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지만, 케시디 역시 벗어야만 먹고 사는 사람이란 점에서 랜디와 다를 바가 없다.

 

그 점에 착안했을까.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랜디가 케시디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삶과의 지루한 싸움을 이겨나가도록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는 클럽의 스트리퍼 케시디는 유일하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랜디가 딸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도 그녀의 조언 때문이다. 그녀도 아픈 과거를 갖기는 랜디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히(?) 벗어 번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이었다. 서서히 마음을 열며 다가서는 둘의 모습에서 삶의 그늘에도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음을 본다.

 

외로움을 술 한 잔으로 달래는 고독한 프로 레슬러, 삶의 진한 아픔이 걸친 옷마저 훌훌 벗어던져야 해결되는 스트리퍼, 그들의 삶은 그림자 드리운 곳에서 만난다. 그렇기에 서로를 감쌀 수 있는 것. 그러나 도무지 문을 열지 못하는 케시디에게는 랜디가 또 하나의 아픔으로만 여겨져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결심한 듯 마지막 링에 서는 랜디에게 케시디는 달려가고 만다. 최대 라이벌인 아야돌라라와의 경기는 인생의 정점을 향해가는 그 어떤 사람의 삶에서도 느끼지 못할 비장함이 배어 있다. 심장이 멎어 죽는다 해도 해야만 하는 경기가 있다.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결국은 끌리는 이에게 달려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다.

 

둘 다 벗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로서의 공감일까. 나는 이 영화를 통하여 음란으로만 통하는 '벗어야 함'이 그렇게 질긴 인생의 마지막 보루라는 걸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윤리라는 잣대로만 재기에는 너무 깊은 삶에의 희열도 있는 법.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각본이 있는 것이니 의미 없다고? 생의 진한 싸움이 그대로 링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레슬링은 인생의 적나라한 축소판이다.

각본이 있는 것이니 의미 없다고? 생의 진한 싸움이 그대로 링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레슬링은 인생의 적나라한 축소판이다. ⓒ n.e.w.

 

그랬다. 분명히 프로 레슬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이는 내 생각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이미 그런 것으로 알고 있기에 그리 즐기는 스포츠는 아니다. 그러나 각본 있는 경기라고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는 마치 각본에 의해 움직인다고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가 의미 없지 않다는 것과 같다.

 

칼을 숨기고 링 위로 올라가 자신의 이마를 긋는 장면, 스테이플러로 온 몸을 찍는 모습, 철조망 위로 나뒹구는 모습…. 이를 두고 각본이 있는 것이니 의미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의 진한 싸움이 그대로 링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레슬링은 인생의 적나라한 축소판이다.

 

피를 흘려야 만족하는 관객을 향하여 피를 쏟아주는 배우, 남의 고통스런 얼굴을 보며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말하는 군중, 이들이 맺은 공생관계가 다만 링 위에서 작렬할 뿐이다. 그게 프로 레슬링이란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삶이 다 이런 프로 레슬링은 아닐까. 다만 미리 각본을 만들지 못한다는 점만 다를 뿐.

 

혹 어쩌다, 정말 어쩌다, 레슬링 경기가 TV화면을 통해 방영되면 가차 없이 채널을 돌리는 인간, 바로 나다. 영화 <더 레슬러>는 나를 참회하게 만든다. 아마 다음부터는 레슬링 장면이 TV에서 나와도 그리 급하게 채널을 바꾸진 않을 것 같다. 거기도 진한 생의 관찰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이 수두룩하니까.

덧붙이는 글 | <더 레슬러>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 미키 루크, 마리사 토메이 출연/ N.E.W. 배급/ 상영시간 109분/ 2009년 3월 5일 개봉

2009.03.13 13:40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더 레슬러>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 미키 루크, 마리사 토메이 출연/ N.E.W. 배급/ 상영시간 109분/ 2009년 3월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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