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9일(1월 7일)

히말라야 발자국
07 : 30    고쿄(Gokyo, 4750m)
10 : 00    고쿄리(GOKYO-RI, 5357m)
15 : 40    루자(Luza, 4338m)
17 : 00    도레이(DOLE, 4110m)
             * 히말라야 롯지(Hymalaya lodge) 

산은 내려가라, 버리라 하건만 인간은 '오를 뿐, 가질 뿐' 아무 대답이 없다. 나란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배경으로...
▲ 고쿄리(5357m)에는 정상이 있지만 인간(?m)에게는 정상이 없다 산은 내려가라, 버리라 하건만 인간은 '오를 뿐, 가질 뿐' 아무 대답이 없다. 나란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배경으로...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새벽에 깨어 화장실에 다녀왔다. 너무 기뻐 입이 싱글벙글이다. 드디어 대변 소식이다. 히말라야에 들어온 지 며칠만인가? 군에 입대했을 때에도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그땐 2주 동안 기다려야 했다. 배변 느낌에 두통도 잊어버린 채 후다닥 화장실로 내달렸다.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로 잡는다. 웃는다.

아, 행복해라!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힘을 주자, 응가는 나오지 않고 머리로 힘이 몰린다. 머리로 터질 듯한 두통이 밀려온다. 왜 X꼬에다 힘을 주건만, 머리에만 힘이 들어가는 것일까? 뇌가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다. 결국 어떤 상쾌함도, 자유도 얻지 못한 채 실망과 허탈감을 담아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서글픔과 억울함이 복받쳐 오른다. 이럴 때는 거리 천지에 자유분방하게 널려 있는 야크똥이 부럽다. 얼마나 시원할까? 수치심이 없는 자연의 배설 쾌감!

아침 7시에 일어나 고쿄리를 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고쿄리와 칼라파타르는 쿰부지역 히말라야 산군을 조망하는 최고의 뷰포인트(view point)이다.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인 고쿄리를 오른다. 황지우 시인의 시를 다시 생각한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자연은 내려가라 하건만, 인간은 오를 뿐, 가질 뿐 대답이 없다

7시 30분! 초오유로부터 흘러내리는 얕은 천을 가볍게 넘고 토산(土山)인 고쿄리(5,357m)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허나, 그대의 첫 발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더없이 미약하더라. 고도가 높아갈수록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더니, 고통의 넝쿨이 얼퀴설퀴 몸과 정신에 엉켜왔다.

한발씩 오르는 발걸음마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켜 본다. 무엇을 보기 위해 이런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간단 말인가?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고통을 생각한다. 아니지! 이런 큰 일 날 소리를.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으나, 나는 나만의 죄를 지고 오르는 것을. 내가 만든 나만의 죄조차도 힘겹게 지고 있는 나인 것을.

그렇지만 나는 내가 짊어질 죄를 스스로에게 용서받기 전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리라. 날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뿐이고, 내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자 또한 나 자신뿐이리라. 신의 넓은 품에 안기는 것도 나 자신이니, 나 자신의 주체성이 없는 이상 그 무엇이 나에게 의미를 지을 수 있겠는가? 신은, 자연은 항상 내 마음 속에서 또 다른 내 모습을 하고 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을 만나는 인간의 지름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고쿄리를 오르며 내려다본 빙하, 롯지, 호수. 고도가 높아지자 고통의 넝쿨이 얼퀴설퀴 몸과 정신에 엉겨붙었다.
 고쿄리를 오르며 내려다본 빙하, 롯지, 호수. 고도가 높아지자 고통의 넝쿨이 얼퀴설퀴 몸과 정신에 엉겨붙었다.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먼발치로나마 에베레스트와 마칼루가 보인다. 다음 코스인 칼라파타르에서는 에베레스트가 코 앞에 있다고 한다.
▲ 에베레스트 먼발치로나마 에베레스트와 마칼루가 보인다. 다음 코스인 칼라파타르에서는 에베레스트가 코 앞에 있다고 한다.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왼편으로 보이는 초오유와 빙하
 왼편으로 보이는 초오유와 빙하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오른편으로 보이는 히말라야 산군들. 촐라체, 타보체, 탐셰르쿠. 지금까지 걸어온 산과 길을 뒤돌아본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히말라야 산군들. 촐라체, 타보체, 탐셰르쿠. 지금까지 걸어온 산과 길을 뒤돌아본다.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숨 쉬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서자 오르는 내내 고통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머리, 폐, 장, 위 등 내 몸의 온 장기들이 풀려나오며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이제 위로는 텅 빈 하늘뿐! 두 발에 힘을 주어 대지를 밟고 내딛는다. 저 높은 곳으로의 비약을 꿈꾼다. 자유이다. 고쿄리 정상에서는 왼편으로부터 초오유, 고숨강, 푸모리, 에베레스트, 눕체, 로체, 마칼루, 촐라체, 타보체 등 히말라야 산군을 넓게 조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빙하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고쿄 정상! 그러나 그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곳은 고쿄리의 정상이었지, 나의 정상은 아니었다. 고쿄리에는 정상이 있는데, 나에게는 아니 인간에게는 정상이 없다. 산에는 정상이 있어 그곳을 밟고 다시 내려오지만, 인간에게는 정상이 없기에 계속 오를 뿐이다. 없는 정상을 만들어서라도 그는 결코 내려오기를 거부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정상인데… 산은 내려가라, 버리라 하건만 인간은 오를 뿐, 가질 뿐 아무 대답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정상은 어디에 있는가? 고쿄리의 정상에 네 마음 속 탐욕의 십자가를 꽂고 내려가거라. 올라감이 내려감이요, 내려감이 곧 올라감이니라.

히말라야 산군을 감상하고 정상이라는 포만감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서둘러 고쿄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몸으로 고쿄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지독하게 쫓아다니는 고소 두통을 없애기 위해 곧바로 낮은 고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에는 칼라파타르 지역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는 촐라패스를 넘으려 했으나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고소가 심하고 육체적으로도 지쳐 있어 결국 촐라패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망설였지만, 욕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등산 자체가 히말라야를 찾은 목적도 아니고, 여행의 마무리에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위해서 안전한 코스를 택했다. 단순히 등산만을 위한 여행도 아니지 않은가?

짐을 챙겨 이동하기를 10여 분, 예감이 안 좋았다. '아차! 나의 히말라야 기록, 나의 다이어리!' 곧 나란이 리조트로 달리기 시작했다. 20여 분이 지나자 나란히 멀리서 두 손에 다이어리와 수통 뚜껑을 들고 환한 미소를 던졌다. '미안하다'고 연신 마음을 쓰자, '찾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나의 말을 끊어 버린다. 참, 따뜻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다.

팡에 도착해 삶은 감자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네팔 밀크티(milk tea)를 먹었다. 이국땅에서 먹는 감자의 향과 맛에서 고향의 향이 묻어났다. 감자 맛은 이곳의 맛이 훨씬 좋았으나, 그 향은 고향의 것이더라!

마체르모에 도착하자 계곡에서부터 갑자기 구름이 일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촐라체부터 탐셰르쿠까지, 그리고 산간 마을 전체를 가려 버렸다. 자연이 문명을 품에 넣어 버렸다. 백지장이다. 3시 40분! 루자에 도착하자, 모든 롯지가 문을 닫았다. 결국 선택은 도레이까지 가는 것밖에 없었다. 마체르모에서 도레이까지는 편안한 산허리길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10시간! 오늘 너무 많이 걸었다. 피곤하다.

도레이에 도착하자마자 침낭을 펼치고 지친 몸을 누인다. 눈꺼풀이 닫히며 만든 단절의 무대 위에 갑자기 고쿄리 정상에서 만난 일본인이 나타났다. 그를 생각하자, 입가에 키득키득 미소가 흘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말만 쓰고 자야지.

거의 매일 오후가 되면 구름이 히말라야를 덮는다. 명한다. 그만 쉬어라!
 거의 매일 오후가 되면 구름이 히말라야를 덮는다. 명한다. 그만 쉬어라!
ⓒ 윤인철

관련사진보기


오늘 오전 고쿄리 정상에 이르렀을 때, 한 일본 청년이 진작 도착해 마음껏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가 2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그는 1시간만에 올랐다. 참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재미난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란에게 자신의 체력과 추진력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가이드도 포터도 없는 혼자의 몸으로 물병과 사진기를 하얀 비닐봉지에 담아 허리에 차고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참 재미난 인물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포비' 같기도 하고, 로보트 태권브이에 나오는 '깡통로봇'과 같은 캐릭터!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포비와 깡통로봇 같은 캐릭터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코난처럼,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가 아닌 현실은 어떨까? 불행하게도 모든 이가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관중들이 바라보는 좁은 삶의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주연이 되고픈 그대여! 그대를 주연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관중인가, 타인인가? 연극무대가 아닌 삶의 무대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타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주연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내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닐까?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나 자신에게 치열하지 않은 삶이리라. 우린 영화가 아니라 삶을 살고 있다. 내 삶보다 더 감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영화는 결코 없을 것이다.

共生! 내가 삶의 주인이듯, 너도 삶의 주인이다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에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나타나 있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이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을 넘어가게 된다. 동산을 넘는 도중 진통이 시작되고, 결국 숲 속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일곱 걸음을 걸어가 오른손과 왼손으로 하늘, 땅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즉 우주 가운데 가장 존엄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에 대한 일대 선언이다. 내 삶도 내 것이고, 내 고통도 나의 것이고, 나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줄 존재도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마라. 네가 삶의 주인이다.' 너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고 수행하면 진리를 깨달은 존재인 '부처'가 될 수 있다.

진리?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또한 내가 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곧, 이 살아있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타인을 도구화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출생 직후 석가모니의 선언에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듯, '너'도 너의 삶의 주인이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너와 나는 동등한 가치와 권리를 지닌 존재이다. 내가 귀하듯이 당신이 귀하고, 당신이 귀하듯이 나도 귀하다. '공생(共生)'이다. 더불어 사는 삶이다. '나의 말과 믿음은 진리이고, 당신의 말과 믿음은 이단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주체적 인간은 존중하고 찬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하리라. 진리가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과 삶을 괴리시켜서는 안 된다.

자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중국 선불교에 임제 선사라는 분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이르는 곳마다 내가 주인이 되고, 내 선 자리가 모두 참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일상 생활에 모든 진리와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하며, 기존의 낡은 방법을 타파하고 아주 독창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깨닫는 수행을 한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해 대긍정의 진리를 깨닫는 법이었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인생의 주체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다.

임제 선사의 가르침이 담긴 <임제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대들은 무엇을 구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다. 확실히 분명히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부족한 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서 있는 이 현실에 진리가 있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자이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마라. 네가 주인이다. 너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구속하는 모든 것을 깨부수어라. 파괴하라. 그리고 그곳에서 자유와 진리를 찾아라. 넌 자유로운 삶의 주체자이다.

그리고 말합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이 참된 견해를 얻고자 하거든 오직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미혹함을 받지 않아야 한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나한(癩漢)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친척 권속을 죽이면 친척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모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임제록」)

임제선사는 '活潑潑地(활발발지)!'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는 물고기가 뛰듯이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기 있고 힘찬 모습을 뜻한다. 불교에서 물고기의 모양을 본 떠 목탁을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항상 눈뜨고 깨어 있는 물고기처럼 쉼 없이 깨어 수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라! 넓은 물을 자유자재로 헤엄쳐가는 물고기와 같이 온갖 집착과 아집에서 벗어나 대자유의 지평을 열어라.

우리의 삶은 어떤가? 물고기와 같이 '활발발지'하고 있나? 물고기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있나? 목탁을 두드리고 있나? 깨어라! 잠들지 마라! 쉼 없이 내 정신을 두드려라.

일본 젊은이는 아직도 고쿄리 정상에서 나무 지팡이를 배트삼아 넓은 대자연의 그라운드에 배팅을 하고 있다. 홈런! 저 멀리 보이는 에베레스트와 마칼루를 향해 크게 한 방 때리십시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 이여!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철학, #에베레스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