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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얼마나 힘들까? 그 애는 지금 죽을 힘을 다 해 살고 있을 텐데... 내가 애한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껏 해야 맘씨 좋은 옆집 아주머니 정도밖에 안되니 말입니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사회복지사 김종숙(47)씨는 이 말을 하는 동안 집을 나간 대성이(가명·중3)를 생각하면서 연신 안경 넘어 눈물을 닦아 낸다.  그녀는 인천 산곡동에서 가출소년 5명(초5·6학년생 4명, 중 1명)과 함께 집에서 사는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아이들은 죽을 힘을 다 해 살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 김종숙씨 '지금 아이들은 죽을 힘을 다 해 살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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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운영하는 그룹홈은 보육원에서도 받아주지 않거나 보육원에서도 견디지 못해 가출한 소년들이 와서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이들 식구들은 방과 후에 함께 공부하면서 생활한다.

- 보육원이나 사회복지 시설에서 이들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알기로는 인천의 경우 수용능력에 비해 실제 수용인원은 60%밖에 안됩니다.  그런 곳에서 다 받아주면 좋은데 그런 곳에서는 비교적 문제없는 아이들만 받아줍니다. 아이들 중에 정작 놀이치료를 비롯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은 시설에서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받아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곳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노숙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도벽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애들이 도둑질 하다가 걸리면 파출소나 이런 곳에서 '나쁜 놈'이라고 몰아붙이니 아이들은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김종숙씨는 이렇게 보육원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아이들을 모아 2007년도부터 그룹홈을 하고 있다.  그룹홈도 귀가시간 등 생활에 필요한 규율을 만들어서 그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내보내는 등  벌칙을 만들어서 운영하면 쉽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규격에 맞춰 운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 각각의 사정이 있고 환경이 있는데 그 각각에 맞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을 대상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을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

인터뷰 하는 동안 집을 나간지 이틀이 된 대성이가 들어왔다. 대성이가 나간 후 우울해 있던 김종숙씨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아이는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러운지 어색한 표정과 동작으로 인사를 한다. 이럴 때 그녀는 아이한테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면서 아이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돌아온 아이
 돌아온 아이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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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희들처럼 어린 시절을 어렵게 살았다.  어렵게 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점도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범한 가족의식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평범한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가족형태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 다양함을 보지 못하고 한 가지만 보려고 한다. 너희들은 어렵게 살고 있기 때문에 보통 상식이라고 믿는 사람보다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 때문에 커서 다른 사람보다도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것에 연연해 하지 말자.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도 좌절하지 말자."

아이들이 처해 있는 사정을 얘기할때 그녀는 눈물이 나온다
 아이들이 처해 있는 사정을 얘기할때 그녀는 눈물이 나온다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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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당장 이런 말에 공감하는지 모르는지 몰라도 그녀가 살아온 경험으로 진실되게 말하면 언젠가는 그 진실을 알게 될 것으로 믿는다.

김종숙씨는 1961년 서울에서 1남 4녀 중 2녀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자란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무렵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중퇴하고 16살 때 청계천 평화시장에 취직을 하게되었다. 돈을 많이 벌어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봉제기술도 열심히 배웠다.

그런데 공장을 다니면서 집안일 때문에 동사무소에 가서 일을 볼 때면 행정서류가 대개는 한자여서 한자를 배우지 못한 그녀는 앞이 막막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 1980년 그녀 나이 스무살 때 약수동에 있는 형제교회에서 야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무료에다 작업시간이 끝나는 시간대에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즉시 형제교회 야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녀는 우선 급한 대로 한자부터 배우고 더 나아가 검정고시 공부를 해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싶었다.

그런데 야학에서는 처음 그녀가 희망했던 공부보다는 80년대 시대상황에 대한 정치 사회적인 인식,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운동 그리고 전태일에 대한 것들을 주로 가르쳤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비록 처음 희망했던 공부내용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매우 뜻 깊은 공부라고 생각했고, 그동안 정작 자신은 모르고 지냈던 주변에 대해 새로운 의식이 싹 텄다.  뿐만 아니라 야학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상호간의 돈독한 우의는 물론, 청계피복노조 선배들 간의 교류와 그들과의 공동체가 너무 좋았고 행복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노동운동에 눈을 뜨면서,1984년 4월 8일 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에도 참여해 노조 복지대책부장도 맡게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선배의 뜻을 받들어 만들어진 대표적인 민주노조인데, 이 노조를 전두환군부독재가 1981년에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청계 노동자들이 1984년 전두환정권의 강제해산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노조를 복구시킨 것이다.

1984년 4월 복구된 청계피복노조  현판식
▲ 청계피복노조 1984년 4월 복구된 청계피복노조 현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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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된 청계노조를 전두환군부독재정권은 '불법노조' 라는 이유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청계피복노조는 1984년 9월부터 노·학연대를 통한 가두시위를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연속적으로 벌이며 '청계노조합법성쟁취'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갔다.  

청계노조 복지대책부장인 그녀도 이 투쟁에 앞장섰다.  제1차 합법성쟁취 가두시위 때 그녀가 맡은 역할은 청계천 6가 고가차도에서 시위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통일상가 공장 복도에 있는 비상벨을 울려 공장안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날 그녀는 정해진 시간에 통일상가로 갔다. 그런데 상가는 이미 백골단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백골단 4명이 순시를 돌고 있는 상가에 들어가 비상벨을 누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기회를 보면서 빈틈에 벨을 누르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빈틈은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정해진 시간은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비상벨을 포기하고 한창 시위가 벌어지는 청계 6가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노·학연대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도 시위대에 합류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이날의 시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1985년 4월 12일 신당동 로터리에서 노.학연대 가두시위 장면
▲ 청계노조 합법성쟁취투쟁 1985년 4월 12일 신당동 로터리에서 노.학연대 가두시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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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한테 이날의 투쟁은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날의 투쟁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녀가 맡은 소임에 대해 확인하거나 거론한 적이 없었지만, 그것은 그녀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이 이후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는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그녀는 청계피복노조 투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84년에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청계 식구들한테 마음 속에 큰 빚으로 남았다.  

인천에 온 남편은 현장 노동운동으로 늘 바빴다. 게다가 수배와 연행 때문에 한 달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해야 했다. 첫 아이 하나와 단둘이 집에 남은 그녀에게는 절해고도에 서있는 듯 고독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의 운동까지 잘못되게 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그러던 중 1997년 I.M.F를 맞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결식아동들이 방학이 되면 대책이 없어 밥을 굶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결식아동들을 위해 방학 중에 밥을 해다 주겠다고 기꺼이 나섰다.  자신이 80년대에 노동운동을 잘 못했다는 그 자책감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게 한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한 것이다. 

그렇게 결식아동들한테 밥을 해 주는 일을 하다 보니 방학이 끝나도 계속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변의 그런 아이들 15명 가량을 모아서 공부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을 몇 년 하다 보니 주변에서 그녀를 보는 눈이 학교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자신을 뭐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2000년도부터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도에 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을 함께 공부한 그녀는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대학원에도 진학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대학원 진학을 접었다. 단지 공부하는 즐거움 때문에 대학원을 가는 것은 어쩌면 무위도식하는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아이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처음 대학교에 가기로 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당신은 충분히 똑똑하고 세상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뭐 하러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 면서 말렸다. 그녀 역시 공부 많이 한 남편(김환기 연대 졸)도 있고, 지금으로서는 대학 나오지 못해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또 학력 때문에 자존심 상할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대학을 가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80년도에 잘 못한 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자격을 위해서라도 대학을 가야 한다. 그렇다. 그녀는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다.

- 이 일을 하면서 아쉽거나 힘든 점은?
"아쉬운 점은 아이들과 내가 세대차가 많이 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과 놀아줄 남자 대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요즘 그런 학생들 보기가 쉽지 않아요. 힘든 점은 아이들 사이의 시기, 질투 뭐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아이들이 또 다른 상처를 받는 것이 힘든 일이지요. 그래도 아이들이 이런 문제로 서로 부대끼는 것을 보면서 내가 크는 것 같아요. " 

- 재정적인 문제는?  
"아이 1인당 월 30만원이 나오는데 30만원 가지고 초등학생은 겨우 맞춰지는데 중학생은 모자랍니다. 용돈, 차비,교복, 거기에다 학원 보내달라고 하면 학원 보내줘야지요. 그래도 주위에서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렵게나마 지탱해 나갑니다. " 

- 보람된 일은?
"아이들이 가출하거나 밖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면 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이예요. 유년의 정서가 평생을 좌우하는데, 이곳이 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편안하게 쉬었다 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집을 '시정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시정의 집'은 그녀가 80년대 다니던 야학이름 아닌가? 그렇구나 그녀는 저 어두운 80년대에 그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 노동자와 학생, 선배와 후배가 한테 어울려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 그 빛나는 '시정의 집' 정신으로 여지껏 살아가고 있구나!    
   
시정모임 카페에서 옮김
▲ 시정모임 시정모임 카페에서 옮김
ⓒ 시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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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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