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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순쯤 재즈 기타리스트 '하이럼 블락(1955년생)'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내한을 꽤나 자주하던 뮤지션이었고, 젊은 나이였기에 꽤 당황스러워하며 하루를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어제(2일) EBS <스페이스 공감> 500회 특집 영상에 반가운 그의 얼굴이 잠깐 비쳤다. 그는 여전히 화면 안에서 살집 좋은 풍채를 자랑하며 관객들 사이를 비집으며 뛰어다녔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난 괜스레 가슴이 울컥했다.

 
'아. 그래. 저분 <스페이스 공감>에 역시나 출연하셨구나….'

 

물론, 나는 여기서 <스페이스 공감>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한 뮤지션을 주목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를 찬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팬인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그마치 500회 동안이나 <스페이스 공감>이 이런 식으로 수용했을, 그 놀랍도록 넓고 깊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음악이나 음악프로그램의 수준을 '대중성'의 그것과 결부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 실제로 최근 아이돌 음악의 경우, 이미 수준을 논할 단계를 넘어선 음악들도 상당히 많다. 마찬가지로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 순위 프로그램과 여타의 음악 프로그램 역시 저마다 가치는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해, 비대중적이라고 해서 예술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차등을 매기는 것은 꽤나 무지한 발상이 될 소지가 크다.

 

그럼에도 굳이 순위를 매겨가며 EBS <스페이스 공감>이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음악프로그램 가운데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최고의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그러한 파시즘 같은 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다양성'과 '창조성' 때문이다. 그리고 <스페이스 공감>의 이러한 지난 500회의 발자취는 산울림 김창완씨가 말한 것처럼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소리의 '다양성'

 

 

<스페이스 공감>은 사실 음악적 '다양성'을 넘어서서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통일'한다는 느낌이다. 말 나온 김에 출연자 명단을 한 번 살펴보자. 국악의 이생강, 장사익, 이광수 선생을 비롯하여 은둔의 아트락 김두수, 재즈 1세대 이동기, 최세진, 홍덕표, 류복성 선생은 물론이거니와 프리재즈 연주자 강태환 선생과 살아있는 록의 전설 한대수, 신중현 선생까지.

 

외국 아티스트로 눈을 돌려보면 더하다. '아니, 이 사람들까지 나왔단 말인가?'란 말로는 표현이 좀 부족할 정도다. 앞서 말한 하이럼 블락은 물론이고 마이크 스턴, 데이브 그루신, 요나스 헬보그, 밥 제임스, 누노베텐코트. 사토코 후지이 등등 거짓말 좀 보태면 정말 내한을 한 '웬만한' 아티스트 분은 다 나오셨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출연자 선정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제는 내가 물어볼 차례다. 과연 한국 음악 프로그램 가운데 이처럼 다양한 음악과 출연자들을 소개해준 프로그램이 있었던가? 우리가 간과했던, 혹은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아티스트들과 음악에 대해 이렇게 따뜻한 관심으로 다가와 준 프로그램이 있었던가?

 

더 심각하게 재미있는 것은 앞서 말한 위대한 출연자들은 무대에서 꼭 한 장르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재즈와 클래식, 국악과 뉴에이지, 록과 민중음악. 감당 못할 정도로 다양한 출연 아티스트들의 숫자도 벅찬데, 이렇게 장르조차도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으로 합체, 혹은 분리돼 버리면서 <스페이스 공감>이 이제껏 보여줬던 음악적 다양성의 파생범위는 무한으로 치닫는다.

 

'수용'의 범위를 넘어 '창조'의 길로!

 

알다시피 음악의 완성은 그것을 만드는 창조자와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 단순한 음악 수용자 역할에서 벗어나, 창조의 영역도 개척하고 있다는 점도 EBS <스페이스 공감>의 주요한 특징이다.

 

얼마 전 <스페이스 공감>은 '헬로루키'라는 신인뮤지션 발굴프로젝트를 통해 '국카스텐'이란 걸출한 밴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또 저평가 우량주였던 '장기하와 얼굴들'을 발굴해 낸 것도, 국내에서 붐을 일으키기 전에 '제이슨 므라즈'를 맨 먼저 알아보고 무대에 세운 것도 다름 아닌 <스페이스 공감>이었다.

 

또 그들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성실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스페이스 공감>은 '음악의 비밀'이란 기획을 통해 창조자 층과 수용자 층간 감정적인 교류뿐 아니라, 이성적인 교류의 충족을 시도한다. 즉, 음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장르의 음악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 및 음악에 대한 뮤지션들의 개인적인 의견까지 수용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수용자가 제대로 알지 못해 빈 공간으로 남겨뒀던 부분을 친절하게 메워준다.

 

좋은 음악은 결국 좋은 수용자가 완성시킨다는 것을 인지하면, <스페이스 공감>이 기획한 일련의 이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음악계 발전을 위한 전반적인 틀을 완성한다. 이것은 굉장히 주목해야 할 사실로, 대한민국의 한 TV 음악프로그램이 음악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수준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나는 생각한다.

 

'헬로루키'가 창조자들의 창조라면, '음악의 비밀'은 수용자들의 창조다. <스페이스 공감> 이 그야말로 대한민국 음악의 문화운동이라 할 만한 핵심적인 이유다.

 

<스페이스 공감>, 질식 직전에 만난 마지막 숨구멍

 

500회를 맞은 <스페이스 공감>은 '오감으로 만나는 EBS <스페이스 공감>'이란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새로운 음악의 소개, 다양한 시도, 기존 음악장르의 변신과 거장에 대한 존경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이기도 한 '소통'. 이름하여 예감, 영감, 과감, 귀감, 그리고 공감이다.

 

이 모든 것이 지난 EBS <스페이스 공감>이 시도했고 완성했던 위대한 업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기에 나는 이토록 '오버'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굳이 하고 싶지 않다. 사실 말할 필요가 없다.

 

인디레이블 육성지원사업이 2008년부터 중단되었다. 로컬방송국들에 대한 지원은 2009년부터 중단된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다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러한 일을 500회 동안이나 반복해서 해온 <스페이스 공감>측에 '독하다'는 멋쩍은 한마디와  숨 쉬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진심 어린 한마디만 해주고 싶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kells.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페이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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