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포스터.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포스터. ⓒ UPI코리아

한땐 잘나가는 방송 MC였으나 지금은 한물가 호주, 영국 등지에서 허접한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영국인 방송 MC 프로스트(마이클 쉰)는 어느 날 TV를 보고 퍼뜩 영감을 받는다. 바로 저거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닉슨 대통령(프랭크 란젤라)이 자진 사임하는 생방송을 본 뒤였다.

 

닉슨 사임 방송 시청률을 확인한 프로스트는 확신한다. 그를 인터뷰하기만 하면 그런 대박이 따로 없고, 다시 자신이 뉴욕 방송국으로 화려하게 복귀할 기회라 생각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이지만 막상 '워터게이트'에 대해 닉슨은 어떤 사과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사상 최악의 죄를 지어놓고 재판도 면했다. 국민은 닉슨의 사죄를 원했다. 기소를 원했다. 프로스트는 이 인터뷰가 닉슨의 재판장이 될 거라 생각했다.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정치적 야망을 뒤로한 채 눈물을 머금고 정계 은퇴한 닉슨도 프로스트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난다 긴다 하는 저널리스트들의 인터뷰는 모조리 거절한 그이지만, 이건 기회라 생각한다. 비지스 같은 연예인이나 인터뷰, 아니 토크쇼를 하던 예능 MC 아닌가? 이건 신이 주신 기회였다. 그는 자신의 적수가 못 됐다. 그를 잘 조리하면 이 인터뷰가 자신이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는 발판이 되리라 짐작한다.

 

짐작뿐인가? 확신했다. 그 정도야 껌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프로스트가 제안한 인터뷰 금액도 쏠쏠했다. 무려 50만 달러다. 물론 더 높이 부르긴 했지만. 돈도 벌고 정계 복귀를 위한 한 편의 감동 드라마도 찍고, 이게 웬 일석이조?

 

결국 닉슨은 예능 MC 프로스트의 인터뷰 제안을 수락한다. 나흘간 인터뷰다. 프로스트는 벼락치기로 팀을 꾸린다. 닉슨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쓴 닉슨 전문가와 PD로 이뤄진 팀은 닉슨을 연구하고 공략할 작전을 짠다. 어떻게 하면 닉슨에게 워터게이트에 대한 사과와 진실 고백을 받아낼까? 연예인 토크쇼나 하던 프로스트가 주제를 모르고 정치9단 능구렁이 닉슨을 요리하려다 닉슨에게 제대로 요리 당하겠다는 놀림과 기대 속에, 손에 땀을 쥔 인터뷰는 시작된다. 닉슨의 정치 생명 연장의 꿈과 프로스트의 방송 생명 연장의 꿈이 맞붙는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 UPI코리아

 

대통령직 사임 뒤 닉슨 입 연, 전설의 인터뷰

 

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실제 닉슨이 몰래 야당을 도청하다 걸린 '워터게이트' 사건 뒤 1974년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만 실화가 아니다. 인터뷰 자체가 실화다. 1977년 4월, 미국 TV 뉴스 프로그램 역사상 기록적인 인터뷰가 방송된다. 바로 닉슨 인터뷰다. 대통령직을 사임한 지 3년 만에 닉슨이 입을 열었다. 입을 연 상대는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연예 토크쇼 MC였던 영국인 프로스트였다. 프로스트가 닉슨을 4일간 인터뷰했다. 이 방송을 무려 4500만 명이 지켜봤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칼만 안 들었지, 상대방의 속내를 파고드는 무서운 대결을 펼친다. 비록 울며 겨자 먹기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긴 했지만, 여전히 능수능란하고 노회한 정치꾼 닉슨은 프로스트의 질문을 교묘하게 요리조리 피해간다. 되레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었으며 국민이 어떻게 자신을 오해했는지 교묘하게 설득한다.

 

프로스트는 속이 바짝바짝 탄다. 뉴욕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긴커녕 방송계에서 화려하게 매장당하게 생긴 데다, 탈탈 털어 쏟아부은 돈마저 다 날릴 판이다. 인터뷰 하나로 그의 인생도 끝장나게 생겼다. 급기야 독기 오른 프로스트는 묻는다.

 

"대통령은 불법을 저지를 수도 있다?"

 

노련하게 펀치를 피해가던 닉슨도 급기야 발끈한다.

 

"내 말은,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란 거요."

 

<다빈치 코드>, <뷰티풀 마인드> 등을 연출한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은 원래 연극이었다. <더 퀸>으로 골든 글로브 각본상을 수상한 피터 모건은 이 전설적인 인터뷰를 2006년 연극으로 제작했다.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연기파 배우 프랭크 란젤라가 닉슨을, <더 퀸>에서 토니 블레어를 연기했던 마이클 쉰이 프로스트를 연기했다.

 

두 배우가 그대로 영화로 옮겨왔다. 두 배우만큼 이들을 연기할 배우가 없다는 제작진의 판단 때문이다. 판단은 옳았다. 두 배우는 기가 막힌 연기로 프로스트와 닉슨을 연기했다. 프랭크 란젤라는 닉슨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여기에 케빈 베이컨과 <오만과 편견>의 매튜 맥파든이 합류했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 UPI코리아

 

베트남전에 참패하고, '워터게이트'로 대통령직을 물러나며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부시에 견줄 폭탄으로 종종 거론되는 닉슨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롭지만, 이번 닉슨 이야기는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닉슨보다 '닉슨과의 인터뷰'다. 정치인을 인터뷰하는 게 어떤 것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인 생명 연장의 꿈과 정치 뇌사 판정의 열쇠를 방송이 지녔기 때문이다.

 

닉슨, 정치 생명 연장의 꿈

 

만약 닉슨이 인터뷰에서 프로스트를 제대로 요리했다면? 인터뷰가 닉슨의 애국심을 찬양하는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로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면? 아마 그는 정계 복귀에 성공하고 다시 대선에 나서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역시 개봉을 앞둔 영화 <왓치맨>에선 닉슨이 베트남전에서 승리하고 재선에 성공해 3선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 아래 파탄 난 미국을 보여주니 뒷일을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영화는 방송이 지닌 마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정곡을 찌르는 말도 중요하지만, 사뿐히 흐르는 땀과 착잡함을 싣고 흐르는 침묵은 얼마나 위력적인가? 닉슨은 케네디와 맞붙었던 대선 때, 방송 토론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패했다.

 

미국 방송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건네주는 신기한 재미도 놓칠 수 없다. 정치인을 데려다 놓고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나 하며 낄낄대는 토크쇼를 인터뷰라고 버젓이 하던 우리 방송들이 마구 떠오른다.

 

이래저래 영화가 그저 영화 같지 않다. 의미심장함이 보는 이의 심장을 반 박자 더 빨리 뛰게 한다. 대통령이 저지르는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는 닉슨의 확고한 믿음 어린 절규는 황당함을 넘어 무섭다. 3월 5일 개봉.

2009.03.03 12:20 ⓒ 2009 OhmyNews
프로스트VS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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