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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고도 또 유명한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드디어 읽었다. 내 돈 내고 사서 볼 마음은 없었는데, 다행히 친구가 선물해 줘서 내 돈 내고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을 비롯하여 국방부 불온서적으로까지 뽑히면서, 더 높은 인기를 누린 이 책. 그 명성 값이 사실은 궁금했다. 책을 '의무감'으로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책 정도는 사회과학 서적을 적당히 좋아하는 나로선 한 번은 읽어봐야 할 것만 같기도 했고.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재밌지도 않고, 무엇을 얻은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시큰둥했던 건 적어도 내가 나쁜 사마리아인은 아니라는 반증이었나 보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재밌지도 않고, 무엇을 얻은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시큰둥했던 건 적어도 내가 나쁜 사마리아인은 아니라는 반증이었나 보다.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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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글쓴이 장하준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이 책은 원래 영어로 쓴 거고, 그걸 우리나라에서 번역해 낸, 이른바 번역서라는 것.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을 번역서라는 틀로 읽는다는 게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다. 왠지 장하준이란 사람이 우리랑, 나랑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지니까.

하긴 외국 대학에서 교수로 살고 있는 사람이니, 영어로 책 쓰는 게 문제 될 거는 없겠지. 책 날개에 나온 이 사람 소개를 보니 그 동안 쓴 책이 다 외국 책이다. 우리 말로 쓴 책은 아마 없는 듯. 우리나라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라지만 그와 나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느낄 수가 없다. 그냥 그는 외국 사람이다. 그걸 확인하는 기분이 별로였다. 그러니까 장하준은 '우리나라'를 '우리나라 사람'을 가까운 마음으로,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먼 나라 사람이 그렇듯, 아주 건조하고 객관 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책 군데군데에 장하준이 겪은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적당히 잘 살았단다. 스스로 솔직담백하게, 아니 거리낌 없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 하지만 나는 좀 걸렸다. 잘 살아 온 사람이 없는 사람을, 없는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선입견은 역시 선입견인가 보다. 가져 본 사람도 볼 건 볼 수 있나 보다. 장하준이 바로 그렇다.

어차피 이 책은 전 세계 경제 환경을 다룬 책. 우리나라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을 필요는 없었다. 글이 어렵지 않아서, 흐름 따라 편안하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몰랐던 내용이 많았지만, 그 몰랐던 내용이 진짜 모르는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라서 굳이 모른다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니까 장하준은 이 책에서 정말 아주 당연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상식 수준의 이야기들. 물론 그 상식들을 풀어낸 정보 양은 많지만. 그렇기에 딱히 '아하!'하고 깨달음을 얻거나, '재밌다!'하고 감탄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냥 건조하게 '이렇군!'하면서 따라가면 그만인 책이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인, 부자 나라들이 왜 가난한 나라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사실 이렇게 책 한 권으로 풀어 쓰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자기들 가진 거 내놓지 않으려는 것, 자기들만 이익을 챙기려는 것. 뭐 이런 거 아니겠는가. 다만 이 책은, 내가 쉽게 풀어 쓴 저 말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하나하나 사실로 확인시켜 줄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풀어 쓴 이 책 한 권이 그렇게 높이 평가를 받고, 하물며 석학 촘스키가 "이 무시무시한 책은 '현실로서의 경제학'으로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고까지 평가할 만한 것인지 난 정말 모르겠다. 밑줄 긋고 싶단 생각 한 번을 안 들게 했던 이 책이 말이다.

그런데! 책 끝에 가서야 이런 내 마음이 생겨난 까닭을 알아냈다. 그래서 얼른, 처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 내가 희망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마리아인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좀 더 균형 잡힌 그림이 제시되면 기꺼이 언행을 바꿀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바로 그런 그림을 제시하고 싶었다.'

내 표현대로면 '상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책 내용이, 나쁜 사마리아인들한테는 '균형 잡힌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새로운 지식'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들'한테나 '책다운 몫'을 할 수 있는 거였다. 재밌거나, 무엇을 얻거나, 하여튼 책이 줄 수 있는 그 무엇 말이지.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재밌지도 않고, 무엇을 얻은 것 같지도 않고 그저 시큰둥했던 건 적어도 내가 나쁜 사마리아인은 아니라는 반증이었나 보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런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래도 이 책 읽은 보람은 있다. 그리고 바람마저 생겼다.

'부디 이 책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이많이 보게 하소서. 더 절절하게 '아픈' 이야기들을 하는 책들은 적어도 그들이 보지 않을 테니 이 정도 책이라도 읽어서 '가장 기초에 가까운 상식'을 그들이 갖게 하소서.'

그나저나, 국방부 정말 눈썰미 지독하게도 없다. 어떻게 이런 평범한 책을 불온 서적이라고 딱지 붙일 생각을 다 했을까? 또 모르겠다. 그들 가운데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아서 이 책이 '특별'해 보였을지도.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부키(2007)


태그:#장하준, #경제, #나쁜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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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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