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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리 평지마을에서 명덕리 5개 마을이 함께 달집 태우기 행사를 가졌다. 아침 일찍부터 이장님의 동네 방송이 여러차례 나왔다. 속 사정은 아주 분명했다. 군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군수님이 유독 우리마을에 오시는 것은 그 역시 속 사정이 훤하다. 며칠 전에 농촌종합개발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50억 원을 지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장에 어머니랑 갔다. 트럭으로 모시고 가면서 어머니는 자꾸 내게 "군수영감 진짜 온다냐?"고 하셨다. 누워 계시는 어머니에게 가장 효과적인 설득을 시도했는데 그 말이 "군수님이 오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군수님'이 이 세상 최고의 권위이자 위엄이고 배경이다. 뭣이든 무게를 싣고자 할 때는 군수님이 줬다든가, 군수님이 말했다고 하신다. 평생을 농사짓고 사시면서 군수는 대면 가능한 최고의 행정가이자 현실적 권력자여서 인듯 하다.

 

"어무이. 군수님 오신대요. 어서 일나요. 달집 태우는데 어무이 오시래요. 어서요."

 

어머니는 어?어? 하시더니 군수? 군수? 하면서 벌떡 일어나셨고 나는 겨를을 주지 않고 옷 입히고 기저귀 채우고 모자랑 장갑 씌워 드리고 모시고 나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돼지고기 바비큐를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작년까지 내가 논 부치던 우리 동네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는 국과 밥을 한 그릇씩 갖다 주셨고 찬 바람에 호호 손을 불어가며 저녁을 때우는데 명덕리 보건소 소장님이 보시고 오셨다.

 

우리집에 여러 차례 오셨던 분이다. 명덕교회 피아노 반주도 하신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를 알아 보셨다. 케이비에스2 <인간극장>에 나온 걸 보신 분들이다. 예순을 가볍게 넘어 보이는 건장한 할아버지 한 분은 내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며 거듭 막걸리를 따라 주셨다.

 

어머니가 아흔 넷에 작년 이맘 때 돌아가셨다면서 꼬박 4년 동안 치매를 앓았는데 짜증이 보통 나는 게 아니라서 만날 동네를 뒤지면서 찾아 다녀야 했고 말다툼을 벌였다면서 <인간극장>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하셨다. "안 모셔 본 사람은 그 속을 모르재. 정말 안 모신 사람은 몰러"라고 위로를 해주셨다.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자 덩달아 즐거우셨다.

 

장수 군수가 오셔서 어머니랑 인사도 나눴다. 작년 5월, <똥꽃> 출판기념회 때 군수님이 오셔서 어머니와 나랑 인사를 나눴었다. 곧이어 한 해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원제를 올리고 달집에 불을 붙였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가 터졌다. 어머니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는 치매라는 증상에 대해 의심을 키우게 된다.

 

단 한번도 햇볕을 보지 못했던 수 십년 전 기억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작은 계기를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저토록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걸까 하고.

 

"저 봐라. 저 봐라. 달집 태운다."

"예?"

"깽매기 뚜드리면 밥 먹다가도 다 쪼차 안 나갔나."

"와요?"

 

나는 어머니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라치면 만날 '와요?'라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 이야기에 멕이는 우리만의 추임새다.

 

"그래야 불기경 할꺼 아이가."

"와요?"

"불 노믄 긋따가 콩도 복까 묵고 추자도 그때 깨 묵고 앙 그라나."

"와요?"

"몰라 나도. 그래야 부시럼도 없다 카드마는 몰라 와 그라는지."

 

밥 먹다가도 숟가락을 내던지고 달집 태우기 놀이터로 내 달리던 꼬마 계집 아이를 떠 올려 본다. 만날 산으로 들로 쫓아 다니느라고 짚신을 한 달이 머다하고 떨아(닳아) 먹던 계집아이.

 

오빠( 내 외삼촌)가 "정임이 너는 또 신발 다 떨았나? 니 신발 대주기도 힘들것다"고 놀리면 아버지(내 외할아버지)가 "정임이는 나 따라서 약쑥 캐러 가지, 산에 나무하러 가지, 물동이 이어 나르지. 그래서 신발 떨어지는 걸 어쩌것냐. 내 또 짚새기로 삼아주마"고 하셨다던 그 꼬마 계집.

 

"어무이 저거 봐요. 불 속에 누가 막 뭘 집어 넣네요?"

"저거는 소지 태우는기라."

"소지가 먼데요?"

"소원 비는 기라. 소원 써 각꼬 저리 불에 태우는기라."

"어무이 우리도 소원 빌어요."

"소원은 무슨...."

 

어머니 소원은 내가 잘 안다. 밥상에 앉아 식고(밥 먹기 전 동학 농민군들이 했던 기도)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이 밥 묵고 벌떡 일어서서 남들처럼 쫓아 댕기게 해 줍소사"라고 하시는 걸 안다. 나랑 같이 사는 2년 동안 오직 기도는 이것 하나다.

 

"어무이 소원 없어요?"

"농사나 많이 지믄 풍년들고 송아지 새끼 잘 놓게 해 달라지만 뭘."
"걸어 댕기게 해 달라고 빌면 되잖아요."

"찌랄. 그렁걸 오찌 비노? 넘들 숭 보는구마."

"와요?"

"다들 동네 잘 되라고 비는데 저만 좋으라고 빌믄 숭 보지."

 

달집 불길이 무섭게 타 오르면서 술판도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따쿵 궁따궁 더더더 궁따궁'

 

풍물패의 휘몰이 장단 또한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논바닥에 넘어지는 할아버지도 있고 넘어진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려다 함께 나둥굴면서 껄껄 웃는 모습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 봐라. 우쭐 우쭐 춤 추능거 좀 봐라."

"술 취해서 그래요."

"춤을 술 먹고 추지 그럼 맨 정신에 추나?"
"옛날에 어머니도 춤 췄어요?"

"쪼껴 날라꼬? 계집년이 춤추믄 화냥년이라고 우라버지가 가만 놔두나 어디."

"그때 할아버지들은 무슨 노래 불렀어요?"

"동네 굿 판 벌어지믄 영감탱이들이 술이 취해 각꼬는. 아이고오. 비기시러(보기 싫어)."

 

이 대목에서 어머니는 놀랍게도 사설시조처럼 한 대목을 하셨다. 놀라운 사설이었다.

"뒷 마을 처녀 젖꼭지는 탱글탱글 하고요오. 우리 할마이 젖꼭지는 쭈굴쭈굴 하네요오.."

술판이 농 익었을 때 남정네들끼리 취흥에 부르는 사설 같았다.

 

"문전옥답 다 신작로 나믄 우리 멀 먹고 살까나. 봉황당 귀신아 저 일꾼들 다 잡아가소. 인자 우리는 봇짐 싸 각꼬 산으로 갈까나 만주로 갈까나..."
이 노래는 일제시대 논밭 갈아엎고 신작로가 날 때 논 밭 지키려고 저항하다 절망하면서 불렀던 노랜가 싶다.

 

이날 밤 집에 와서도 어머니는 80여년 전 달집 태우기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주제를 달리한 이야기 보따리를 계속 풀어 놓으셨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카페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월대보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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