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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릴 예정인 서울 청계광장 주변을 경찰병력이 겹겹이 에워싸서 원천봉쇄하고 있다.
 7일 오후 '용산철거민참사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릴 예정인 서울 청계광장 주변을 경찰병력이 겹겹이 에워싸서 원천봉쇄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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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일) 끈적끈적한 수마의 유혹에서 겨우 벗어나서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정말 꿈 같은 며칠이 지나갔다. 대학생사람연대 총회, 용산참사 촛불집회, 청계천, 연행, 유치장, 면회… 띄엄띄엄 단어들만이 생각났다. 그리고 각각의 사건들을 연결시켜 나갔다.

그렇다. 그날 밤 인도 위에서의 말도 안 되는 연행과 경찰에 의한 폭력이 벌어졌다. 그건 마친 영화와 책에서만 보았던 1980년대의 장면이었지만, 나의 뇌리에 또렷히 새겨진 현실이었다.

나는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대학생사람연대'라는 정치단체 대표로 활동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그리고 용산참사 3차 범국민대회가 열렸던 2월 7일 오전에 대표로 선출되었고, '대학생사람연대가 떴다,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올해의 슬로건으로 채택하였다. 장소는 오랫동안 연대해왔던 '포이동 266번지'라는 판자촌이었다. 그곳을 총회장소로 정한 것은 당연히 빈민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이유였다. 총회를 마치고 시민들과 함께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오후 2시 살인정권 규탄 대학생대회에 참가한 뒤 청계천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원천봉쇄 상태였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쓸데없이 경찰이 길을 막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으로 슬픈 시대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계천에서 집회가 열렸고, 집회가 끝났을 때 또다시 경찰의 원천봉쇄가 시작되었다. 어디도 출구가 보이지 않아, 나 같은 서울 신출내기들은 한두 시간씩 헤맬 수밖에 없었다.

헤매는 동안 시민들이 어디로 가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서울 지리를 몰라서 동료들이 가는 대로 따라갔다. 사람이 정말 많은 곳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삼일문'이라고 적혀 있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도 탑골공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경들이 쫙 깔려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사복경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거기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시민들은 또 다시 어디론가 향하라고 이야기하였다. '명동성당으로 가자'였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정리하는가보다 하고, 우리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을지로○○역(서울지리를 몰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내렸다.

출구로 올라가 보니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서 함성소리가 들리더니 40여 명으로 보이는 학생들 일부가 우리가 나온 지하철역 출구의 건너편 도로를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전경 수백 명이 방패로 도로를 찍으며, 고함을 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대오에서 떨어진 시민들은 전경들한테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로 갑시다"라고 외치며 시민들의 뒤쪽에서 함께 뛰었다. 그리고 도로에서 인도로 함께 뛰었다.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린 7일 저녁 서울 종로 탑골공원 맞은편에서 경찰이 인도 위 어린아이, 노약자 등 시민들과 취재중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색소를 뿌리고 있다. 한 여성의 얼굴을 향해 색소를 발사하고 있다.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3차 추모범국민대회'가 열린 7일 저녁 서울 종로 탑골공원 맞은편에서 경찰이 인도 위 어린아이, 노약자 등 시민들과 취재중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색소를 뿌리고 있다. 한 여성의 얼굴을 향해 색소를 발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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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들이 고함을 치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열심히 뛰어갔고, 나 역시 앞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도에서 뛰었는데, '설마 때리거나 연행되지는 않았겠지?'라고 잠시 생각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방향을 틀어서 전경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경 수백 명이 우리 동료들을 둘러싸고 방패로 찍고, 때리고 있었고, 우리 현수막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현수막은 펼치지 않고 줄로 감아놓은 것이었다.

경찰은 도로에서 인도에 있는 동료들을 향해 색소를 분사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아무런 집단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은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국민의 재산을 지켜야 할 경찰이 현수막을 빼앗고, 국민을 때리고 있었다.

배성민, 김재의 회원이 경찰에 의해 인도에서 갇혀있다.
▲ 인도에서 연행되는 대학생사람연대 회원 배성민, 김재의 회원이 경찰에 의해 인도에서 갇혀있다.
ⓒ 양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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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태준(서강대 4학년) 대학생사람연대 회원이 방패로 입술을 맞아 입에 피가 고이고, 이마에도 맞았다고 한다. 경찰이 그렇게 때린 이유도 기가 막히다. 다른 회원이 연행되려고 하는 걸 말리려고 왔는데, 그렇게 때렸다는 것이다.

이창호(고려대) 김재의(서울대) 배성민(동아대) 회원 역시, 다른 동료들을 도와주려고 왔다가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목이 조이고 색소를 맞았다. 나 역시 "때리지 말라"고 외치다가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검거해" 한마디에 함께 잡혔다. 5명의 대학생사람연대 회원 외에 1명의 대학생 총 6명이 연행된 것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이 더욱 황당했다. 옆에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자 나에게 "너도 들었지?"라고 하는 것이다. 취재진이 나에게 다가와 경위를 물어, 내가 대답하자 손가락을 꺾으며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하였다. 계속 항의하자 방패 밑에서 군홧발로 찼다. 이런 폭력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우리들을 데리고 나가자, 우리를 경찰서로 넘기려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로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경찰이 국민들을 때리고 근거 없이 체포하는 것도 모자라 조작까지 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취재진들이 있었고, 지하철 CCTV와 퇴계로 4가의 CCTV를 분석해 보면 당시의 이 같은 상황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 송치되는 과정도 의문 투성이었다. 처음에 중부경찰서로 가는 것 같더니, 다시 이동하여, 전경버스가 아닌, 이상한 소형버스에 태워졌다. 거기에는 사복 차림의 여경들도 있었다. 사복경찰이었는가 보다. 국민들 감시하는 데에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서 국민들을 위해서는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이 송파경찰서였다.

인도에서 이태준(서강대) 회원이 연행되고 있다.
 인도에서 이태준(서강대) 회원이 연행되고 있다.
ⓒ 양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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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당한 연행에 항의하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들도 적지 않게 황당해 하는 것 같았다. 범죄사실이 뭐냐고 서로 수군거렸고, 중부경찰서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우린 어떻게 하냐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민변에서 변호사가 오셔서 상담을 한 후에 묵비권을 풀었고, 유치장에 이감된 후 다음 날 조사를 계속해서 받게 되었다.

다음날 조사 당시에도 경찰은 검거 당시의 채증 자료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모두 청계천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모두 인도에서 벌어진 불법연행이었으니 증거가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수사과장이 기자들한테는 모두 자백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가 인정하는 건 무단횡단 하나뿐이다.

대학생사람연대 대표인 필자가 연행되고 있다.
▲ 인도에서의 연행 대학생사람연대 대표인 필자가 연행되고 있다.
ⓒ 양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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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생사람연대 대표라고 밝혀진 이후, 엉뚱하게도 질문의 내용은 대학생사람연대에 대한 질문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재정, 강령, 회칙, 연락 등등 홈페이지에서 알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분이라 진술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경찰은 연행 당시의 사건보다는 배후에 더 관심이 있는가 보다.

조사가 끝나고 다시 유치장으로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2월 9일 저녁 7시)에나 되어서야 풀려나왔다. 우리가 얼마나 괘씸했는지, 48시간을 제대로 채우고 보내주었다.

유치장 안에서 검찰조사 발표를 보았다. 모두 철거민 탓이라고 한다. 가해자 측의 책임은 경찰이 데려온 용역업체였다. 철거용역이 경찰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새로운 사실 같이 나오고 있지만 예전부터 벌어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경찰과 검찰은 그렇게 꼬리자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 이것은 정권의 꼬리자르기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치장 안에서 '사회당', '애국촛불시민연대' 등의 사람들과 '대학생사람연대', 포이동주민들과 '빈철연' 등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유치장에 있었던 5명의 대학생사람연대 동료들과 1명의 학생들과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5명의 동료들은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용산참사추모집회로 향했다. 여전히 경찰이 있었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세상과 정권에 맞서 싸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http://www.daesaram.net 대학생사람연대 게시판에도 올렸습니다.



태그:#대학생사람연대, #연행,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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