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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앞서 인천시청 뒷문 쪽으로 사진을 찍으러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지지난달까지 인천시청 앞문 쪽에서 1인시위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인천시청에서 앞문에서는 ‘더는 1인시위를 못하게 막아’ 뒷문으로 옮겼습니다. 더 예전에는 인천시청 건물로 들어가는 문간에서 1인시위를 했지만, 인천시에서 벌이는 행정에 말썽이 많아 1인시위며 집회며 잦다 보니, 그 뒤로는 문간에서는 1인시위나 집회는 아예 못하게 청원경찰이 내쫓고, 어쩔 수 없이 주차장 바깥 검문소 비슷한 데 앞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1인시위를 하는 뜻을 헤아린다면, 경찰이든 인천시 공무원이든 이처럼 인천시민 목소리를 아예 틀어막아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만, 서울에서 ‘촛불집회 원천봉쇄’를 하기 앞서부터 인천에서는 ‘1인시위 원천봉쇄’가 몇 해 앞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너비 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가 뚫리게 되는 일을 막으려 하는 동네 아주머니는, 알림판을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한 주에 두세 차례씩 꼬박꼬박 인천시청 뒷문으로 찾아가 아침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지킵니다. 한동안 날마다 나오시기도 했는데, 추운 겨울날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더라도 나이 예순 아주머니로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꾸리는 예순 살 아주머니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인천시청에서 1인시위를 하면서, '인천과 마을을 살리는 길을 공무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꾸리는 예순 살 아주머니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인천시청에서 1인시위를 하면서, '인천과 마을을 살리는 길을 공무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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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알림판을 들고 지키는 아주머니를 알아보는 시청 직원 가운데에는 ‘힘내셔요. 잘될 겁니다’ 하고 북돋우는 분이 있는 한편, ‘뭐야? 너네 동네만 살려 달라고?’ 하면서 거친 말을 일삼는 분이 있습니다. ‘인천 전체를 보아야지 작은 마을 하나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분을 보면서, 작은 마을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큰 인천’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겨납니다. 나라를 통틀어 보자면, 인천을 못 지키면 한국을 못 지킵니다. 부산을 못 지켜도 한국을 못 지킵니다. 남원을 못 지키고 원주를 못 지키고 울진을 못 지켜도 우리 나라를 지킬 수 없어요. 독도만 지켜야 하지 않아요. 우리 나라 어디이든 그곳이 그곳대로 고유한 삶터를 아름다이 가꿀 수 있도록 마음을 쏟아 정책을 꾸려야 합니다.

1인시위 하는 아주머니를 사진으로 담은 다음, 자전거머리를 돌려 부평구 십정동으로 달립니다. 이곳 십정동은 예전에는 ‘인천시 북구’였습니다. 지난날 인천은 아주 조그마한 바닷가마을이면서 서울로 온갖 물자를 실어나르는 나들목이었습니다. 근대화라는 길을 걷던 개항기부터 인천이 조금씩 커졌는데, ‘동서남북중’ 이렇게 다섯 구가 있다가(더 예전에는 서구가 없었고) 아파트만 새로 짓는 새도시를 가꾸면서 북구가 ‘부평구’와 ‘계양구’로 쪼개지고, 남구가 ‘남동구’와 ‘연수구’로 나뉘고 새로 생기고 합니다. 퍽 예전부터 한 곳에서 오래오래 살았던 집 문패에는 아직도 ‘인천시 북구 십정동’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구 창영동 너머 중구 율목동에도 ‘경기도 인천시 율목동’이라는 무척 오래된 문패를 붙이고 있는 집이 있어요.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 집은 그 자리에서만 적어도 마흔 해는 넘겼을 테며, 기와집 짜임새로 보아 더 예전부터 그 집에 있다가 ‘경기도 인천시 율목동’이라는 문패를 마흔 해쯤 앞서 새로 붙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부평구 십정2동’이 아닌 ‘북구 십정2동’으로 새겨진 오래된 문패. 이 문패는 인천이라는 곳 ‘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좋은 문화유산입니다. 비록 재개발로 철거되면 모두 사라져서 영영 되찾을 길이 없을 테지만. 아마, 지금으로서도 이 모습을 고이 돌보는 문화재위원이나 역사학자나 문화학자는 없을 줄 압니다.
▲ 골목집 문패 ‘부평구 십정2동’이 아닌 ‘북구 십정2동’으로 새겨진 오래된 문패. 이 문패는 인천이라는 곳 ‘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좋은 문화유산입니다. 비록 재개발로 철거되면 모두 사라져서 영영 되찾을 길이 없을 테지만. 아마, 지금으로서도 이 모습을 고이 돌보는 문화재위원이나 역사학자나 문화학자는 없을 줄 압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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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달리는데, 오늘 가려던 곳으로 못 가고 자꾸 길을 헤맵니다. 그러나 길을 헤매는 동안 미처 모르던 골목길을 누빌 수 있어 흐뭇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나올 때에는 손발이 시렸는데 어느 만큼 골목을 헤매는 사이 등판에 땀이 흐르고 손에도 땀이 흘러 미끄럽습니다. 십정2동 언덕골목에서 ‘福’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낡은 문고리를 보면서 한동안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봅니다. 오랜 비바람과 햇볕으로 바랜 문고리는 어떻게 보면 ‘황금빛’이라 할 만합니다. 참 곱다고, 세월 때를 먹으며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집은 이 집에 깃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더없이 고운 살결을 간직하게 된다고 느낍니다. 마치 몽돌과 같은 골목집 문고리요 문패요 문턱이라 할까요.

저는 처음부터 골목길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생각이 없었지만, 고향동네를 인천시장이 막개발로 죄다 허물어뜨리려 하는 소식을 듣고 ‘이래서는 안 되지 않나. 왜 있는 그대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아름다움을 못 보나’ 하는 마음으로 고향동네에 조그맣게 도서관 하나를 열고 동네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천시장이 막개발 정책을 함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동네 모습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고스란히 이어질 터이라, 구태여 고향동네로 돌아와 ‘고향동네 사진찍기’는 안 하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반갑지 않은 나라 정책이요 지자체 정책이라 해도, 어떻게 보면 참.

골목을 구비구비 돌다가는 십정1동 ‘철거민촌’에 다다릅니다. 다른 ‘철거민촌’을 가 볼 때에도 비슷하지만, 이렇게 산등성이까지 촘촘하게 골목집이 붙어 있는 동네를 볼 때면, 우리 삶이란 대단하구나 싶습니다. 이곳은 동네이름이 아예 ‘철거민촌’입니다. 1960∼70년대, 서울과 인천 다른 데에서 살림터를 잃고 쫓겨나야 했던 사람이 모여들던 곳이라 ‘철거민촌’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곳 사람들은 또 한 번 ‘철거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옮겨서 살아야 할 또다른 ‘철거민촌’에서도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 아니면 서른 해쯤 뒤에 다시금 ‘철거민’이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한자 두 글자를 하나씩 새겨 넣은 문고리. 오랜 세월을 비바람과 햇볕에 바래면서 새로운 빛깔을 우리한테 선사합니다.
▲ 골목집 문고리 한자 두 글자를 하나씩 새겨 넣은 문고리. 오랜 세월을 비바람과 햇볕에 바래면서 새로운 빛깔을 우리한테 선사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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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아 골목집 벽에 등을 대고 앉은 할머님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면서 꿉벅 고개를 숙여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때마다 할머님들은 ‘네, 네,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받아 주시면서 웃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지나가며 생각하니, ‘골목길 사진을 찍는 분’들은 으레, 이분들 골목 할머님들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낯선 이라 해도 서글서글 인사를 걸어오면 반갑고 활짝 웃어 주시니,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 저 또한 이분들을 사진으로 담으면 꽤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굳이 할머님들을 찍지 않습니다. 할머님들이 저를 불러 ‘이보게, 나도 좀 찍고 가’ 하면 찍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찍고 있는 모습이기도 한 할머님들 모습인 한편, 자칫 골목길 삶터를 ‘늙은 사람 모습’으로만 아로새겨지게 할 근심이 있어요. 또한, ‘웃는 할머님’에 눈길을 너무 둔 나머지, 정작 골목 삶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골목 삶터가 왜 이 할머님들한테 밝은 웃음을 선사하게 되는지를 사진으로 못 담게 되어요.

사람 얼굴을 찍어도 사람 사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얼굴을 찍으나 사람 사진이 아닌 풍경 사진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진쟁이들 ‘사람 사진’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닌 풍경만 스쳐 지나가듯 옮겨 놓은 사진”이 아니랴 싶습니다. 사람 얼굴을 안 찍고 사람 모습이 담기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 사진’이 됩니다. 얼핏 보기에 ‘풍경 사진’이 아니냐고 말할는지 모르나, 김영갑 님이 찍은 제주 오름 사진은 하나도 ‘풍경 사진’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눈물겹고 가슴찡한 ‘사람 사진’이 김영갑 님 제주 오름 사진입니다. 우리들 이웃뿐 아니라 저부터 살고 있는 이곳 골목길은,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진’이냐와 ‘풍경 사진’이냐가 갈립니다. 바라보는 눈길, 헤아리는 마음길, 껴안으려는 몸길이 어찌 어우러지느냐에 따라서 사진 갈래가 나뉩니다.

동네이름도 ‘철거민촌’인 이곳 인천 부평구 십정1동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철거민’이 된 채, 푸진 고향도 살가운 동네도 없이 헤매어야 할는지요. 이곳 골목사람은 ‘인천시민’도 ‘한국사람’도 아닌지 궁금합니다.
▲ 십정동 철거민촌 동네이름도 ‘철거민촌’인 이곳 인천 부평구 십정1동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철거민’이 된 채, 푸진 고향도 살가운 동네도 없이 헤매어야 할는지요. 이곳 골목사람은 ‘인천시민’도 ‘한국사람’도 아닌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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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사진을 찍다가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다 되어 갑니다. 집에서 홀로 아기를 보는 옆지기는 밥도 못 먹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본 뒤, 부리나케 자전거를 몰아 간석동과 주안동을 거쳐 도화동으로 접어듭니다. 도화동 골목길에서 몇 장 담고 숭의동으로 건너고 금곡동으로 접어들어 비로소 집에 닿습니다.

집에 닿자마자 입은 옷을 모두 벗어 빨래통에 담그고 밥을 안칩니다. 그사이 쌓인 기저귀를 빱니다. 기저귀를 널고 나서 찌개를 끓입니다. 다 된 밥과 찌개를 밥상에 올려 늦은아침을 듭니다. 이러는 동안 오늘 찍은 디지털사진을 셈틀로 옮깁니다. raw 큰크기로 찍은 사진을 jpg 작은크기로 바꾸어 줍니다. 오늘 하루 186장을 찍었습니다. 필름으로 치면 다섯 통. 문득, 제가 필름사진기로 골목길을 찍었어도 다섯 통을 찍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글쎄, 어쩌면, 다섯 통이 아닌 열 통쯤 찍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꼭 이만큼 다섯 통만 찍었을는지 모릅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로 찍을 때라 하여 더 신나게 찍어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꼭 한 가지 모습에 한 장씩만 담습니다. 흔들리거나 빛이 안 맞으면 곧바로 지우고 새로 찍습니다.

그래서 186장을 찍었다면 186가지 다 다른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필름과 함께 디지털을 쓰는데, 지난 세 해 사이 골목길 모습을 여러 만 장 찍는 동안 디지털로만 찍으면서, 이만큼을 필름으로 찍었다면 아주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으리라 봅니다. 디지털사진기는 주머니가 가난한 사진쟁이가 자기 주제를 오래도록 꾸준히 많이 찍어야 할 때 참으로 좋은 장비가 아니랴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필름사진 질감을 따르기 어렵고, 여느 필름사진기 화각만큼 담을 디지털사진기는 대단히 비싸기는 하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슬기롭게 머리를 짜내고 손놀림을 익히면, 값싼 디지털사진기로도 얼마든지 자기 눈썰미대로 사진으로 자기 생각을 담아낼 수 있어요. 가장 뛰어난 장비가 있어야 가장 뛰어난 사진을 담아낼 수 있지는 않으니까요. 가장 비싸고 값진 장비를 써야만 훌륭한 사진쟁이가 될 수 있지는 않으니까요.

문득, 그제 서울 나들이를 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책마을에서 일하는 분들이 모인 자리에 부랴부랴 찾아갔는데, 마침 이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하다 보니 사진기 있는 분이 없다 하여 저보고 사진 몇 장 찍어 달라고 여쭈십니다. 모두들 모르는 분들이라 낯설어 저으기 쭈뼛쭈뼛 있을밖에 없었는데, 제 사진기를 가리키며 ‘크고 좋은’ 사진기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빙긋 웃으면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크고 좋은’ 사진기라고 부추겨 주었지만, 사진일을 하는 분들은 제 기계를 보고는 ‘작고 싸구려’ 사진기라고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사진을 좀 ‘안다’는 분들은 ‘입문용’이나 ‘초보자용’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진을 좀 ‘모른다’는 분들한테는 입문용이든 초보자용이든 꽤 비싸고 좋은 녀석 아니냐고 생각을 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다 다른 제 사진기인데, 저는 제 사진기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녀석’으로 여깁니다. 그저 제 몸과 하나라고 느낍니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예 제 손처럼 움직이고 제 몸뚱이처럼 늘 붙어 다닐 뿐입니다. 빨래를 하고 밥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책을 만지고 사진기를 쥐느라 손그림이 닳듯, 제 사진기도 닳아 갑니다. 열 번째 사진기를 잃어버리고 새로 장만한 지 이제 고작 반 해쯤 되었는데 사진기는 반들반들합니다. 찍건 안 찍건 언제나 어깨나 목에 걸려 있고, 찍을 때에는 손이 후들후들 떨리도록 붙잡고 있거든요.

‘외주출판인모임’ 자리에서 만난 분들. 모임을 꾸린 지 100일이 되는 날이라, 이를 기리며 케익도 하나 올려놓고 즐거움을 나누었고, 저 또한 사진찍기를 하면서 한껏 더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 기념사진 ‘외주출판인모임’ 자리에서 만난 분들. 모임을 꾸린 지 100일이 되는 날이라, 이를 기리며 케익도 하나 올려놓고 즐거움을 나누었고, 저 또한 사진찍기를 하면서 한껏 더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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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돈이 넉넉하게 있다면, 예전부터 꿈으로 품고 있는 파노라마 사진기를 장만할 생각입니다. 이 꿈은 네 해 동안 품으면서 아직 이루지 못하는데다가, 조금 목돈을 모았다 싶으면 다른 데에 쏟아부어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앞으로도 꿈을 이루기는 퍽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파노라마 사진기로 담았으면 한결 가슴 찡했을 만한 모습을 놓치면서 속으로 울고, 파노라마 사진기는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꿈이기만 할는지 모르니,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사진기로 내 생각을 담자고, 내 마음을 싣자고, 내 뜻을 펼치자고, 내 넋을 보여주자고, 내 얼을 나타내자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동네 삶터를 무너뜨리는 ‘배다리 산업도로(동네 골목집 한복판에 너비 70미터에 이르도록 뚫으려는 산업도로)’ 같은 막개발 공사를 우리들 낮은자리 가난뱅이들이 막아내기란 꿈 같은 일이라 못 이룰는지 몰라도 날마다 애쓰고 어깨동무하면서 땀을 흘리며 할 수 있는 만큼 하듯(나라를 통틀어 보면 ‘서울-부산 물길’ 같은), 언제나 좀더 나은 길을 꿈꾸는 가운데 지금 걷는 길을 소담스레 여기면서 뚜벅뚜벅 걸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1회용사진기로 못 담는 사진이라면 똑딱이로도 못 담는 사진이고, 똑딱이로도 못 담는 사진이라면 좋은 디지털사진기로도 못 담는 사진이며, 좋은 디지털사진기로도 못 담는 사진이라면, 중형이나 대형을 써도 못 담는 사진이라고 봅니다. 뜻이 있고 몸품을 제대로 팔 줄 아는 사람은 돈 만 원으로도 헌책방 나들이를 바지런히 하면서 좋은 책 몇 권을 건지지만, 뜻을 못 세우고 몸품을 하나도 안 파는 사람은 돈 백만 원으로도 새책방에서 좋은 책 한두 권 사들이지도 못하고, 읽지도 않습니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는 곁에 있는 좋은 모델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아기 모습을 찍는 사진이고, 앞으로는 아이가 자기 어린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요 삶자락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뻥과자 뜯는 아기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는 곁에 있는 좋은 모델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아기 모습을 찍는 사진이고, 앞으로는 아이가 자기 어린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요 삶자락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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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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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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