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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깊고 푸른 밤>의 주인공 제인(장미희)의 헤어스타일에 '필'이 꽂혀 해보고 싶었던 헤어스타일. 하지만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영화 <깊고 푸른 밤>의 주인공 제인(장미희)의 헤어스타일에 '필'이 꽂혀 해보고 싶었던 헤어스타일. 하지만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 동아수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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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치가 있다고 어려서부터 엄마가 염색을 해줬다. 언니 오빠 새치 염색하고 남으면 해주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지금 같은 결과가 올 줄을. 그때야 염색약이 좋기나 한가. 양OO라 하여 아주 까만색의 염색약이 있었다. 신문이나 비닐을 어깨 위에 둘러치고는, 종지에 비벼 헌 칫솔에 묻혀서 이리저리 머리카락을 넘겨가며 했었다.

조금 낫다고 하는 것은 비OOO 등이 고작이었다. 이마나 귀 부분 등에 약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지워도 며칠씩 흔적이 남아 있기 일쑤였다. 요즘엔 '오징어먹물'이니 '헤나'니 뭐니 하면서 많이 좋아졌다. 색상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해졌다. 전에는 먹물처럼 검은색뿐이었는데.

장미희의 단발머리, 정말 하고 싶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염색을 한 탓인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탈모가 조금씩 진행되더니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지금은 심각할 정도로 심해졌다. 피부과도 가보고 한약도 먹어보고 양약도 쓰고 좋다는 방법을 허다하게 써봤지만 효과는 없고 돈은 깨지고 결과는 처참했다.

미장원에 가는 것도 신경써야 한다. 처음 가면 머리가 왜 그런지 설명해야 하고, 머리모양은 어떻게 해달라는 등 똑같은 얘기 되풀이하는 게 싫어 가던 집만 가고, 하고 싶었던 헤어스타일은 엄두도 못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머리모양을 해본다는 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머나먼 꿈이었다. 머릿속으론 영화 <깊고 푸른 밤>의 여자주인공 장미희의 언밸런스한 단발머리를 꿈꿨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결국 꿈으로만 남았다.

몇 년 전 몇몇 지인들이 가발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내게 권유하기까지 얼마를 망설였을까? 그들의 고민이 느껴지면서도 마다했다. 이제 와서 바꾼다고 내가 김태희가 될 것도 아니고 시집을 다시 갈 것도 아닌데, 뜻은 고맙지만 알았다며 실천까진 한 번도 옮기지 못했다. 왜 그리 망설였을까?

가발 하나 썼을 뿐인데...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 출연한 주준영(송혜교)의 헤어스타일. 깔끔하면서도 청초해 보인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 출연한 주준영(송혜교)의 헤어스타일. 깔끔하면서도 청초해 보인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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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흔아홉. 구질구질한 게 싫다. 머리숱이 적어 매번 모자 쓰고 나가는 것도 불편하고 초라하다. 휑한 머리숱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칠 때마다 시리고 마음이 아리다. 아무렇지 않게 의연한 것처럼 버티면서도 속으로 삭여온 그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새해에는 인생을 바꿔보자. 깔끔하게 산뜻하게 즐겁게' 우선 집안청소를 했다. 미련 떨며 너저분하게 처박아두었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여기저기서 꺼내서 다 버렸다. 베란다도 거실도. 갑자기 숨은 1인치를 찾은 것처럼 넓고 시원해 보였다. 얼마나 뿌듯한지. 며칠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남대문시장으로 선배랑 나섰다. 가발시장으로. 몇 군데를 찾아다닌 끝에 한 군데 들어갔다. 주인 말대로 여러 개를 써보고 그 중 맘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서 쓰고 집으로 들어왔다. 세 식구가 동시에 바라봤다. 아들 녀석은 배꼽 잡고 웃으며 벗으라고 성화였다.

딸은 요모조모 살펴보고 있었고, 남편은 "늬 엄마가 시집 한 번 더 가려나 보다" 했다. 식구들은 직장에 어떻게 나가려 하느냐며 걱정했다.

"괜찮아. 5일만 지나면 적응돼."

한참 있다가 남편한테 말했다.

"여보, 내가 원했던 정답은 '내가 다음에 더 좋은 것으로 해줄게'였는데…."

단골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짧게 치고 가발 머리도 다듬었다. 한결 나아 보였다. 며칠 후 주변 사람들의 말이 '진작 하지' 그랬느냐며 다들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열흘이 지났다. 처음엔 좀 어색하기도 했고 고민스러웠다. 나의 정체성이 뭘까? 오랜 기간 힘들게 견뎌온 의미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 후 살아온 날이 이십 수년, 앞으로 살아갈 날은? 보험비교에 의하면 여자의 평균수명은 81.5세라고 한다. 말 그대로 평균이니까 10년은 접고 20년 정도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이제 남은 20여 년은 나를 위해서 살아보자. 식구들로부터 벗어나자.

나에게 홀로서기의 첫 번째 선물이 가발인 건 어떨까? 머리숱 적은 것이 창피해서라기보다는 겨울 찬바람에 안쓰럽고 한여름 땡볕에 처절한 게 이젠 싫다.

남은 20년, 신나게 살아볼 테다

보는 사람마다 어디 아팠었느냐고 물어보는 것도 싫고 측은히 바라보는 눈빛도 싫다. 작은 변화로 삶이 즐거울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겨 실행에 옮긴 것이다.

다행히 성공인 듯싶다.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좋았다. 옷 입는 데도 자신이 있다. 자연스러워서 별로 표시가 안 난다고 했다.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얘기도 하고. 모두들 용기를 북돋워줬다. 얼굴에 생기도 돌았다. 이제 사람들 앞에 막 다가가고 싶다. 즐겁다.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전체적인 커트머리로 앞머리 살짝 내리고 뒷모습은 다소 파마기가 강하다. 그동안 봐왔던 내 모습 중에 제일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사랑스럽다, 스스로도. 다른 사람은 파마기가 강하다고 다음엔 생머리를 해보라지만 지금의 내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 같다.

이제 파마를 안해도 되고 염색도 필요 없고 아침마다 드라이하며 머리 손질할 필요도 없다. 간단하게 손가락을 이용해 살짝 빗어만 주면 된다. 1석3조다. 게다가 얼마 전 쓴 기사로 인해 여성잡지사에서 연락이 와서 인터뷰도 했다. 사진도 찍고.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2009년 초반부터 왠지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다.

변화를 시도하길 잘했다. 거울을 자꾸 보고 싶다. 다음엔 어떤 헤어스타일을 골라볼까?

'그런데 찜질방 갈 때는 어떻게 하지? 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태그:#가발, #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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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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