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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선 이런 계단식 논이 많이 보인다
▲ 계단식 논 곡성에선 이런 계단식 논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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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의 덤프트럭이 무서울 뿐이고, 트럭 지나간 뒤의 바람은 더욱 무섭다 

밤새도록 깊은 잠 들지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일찍 길위에 나섰다. 오늘 여정은 대략 사오십킬로미터는 됨직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가 평상시 나의 생활이긴 하지만 자세한 정보도 없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어미란 사람이 딸하고 길위에 선 것이다.

입맛이 없어 아침도 거르고 걷는다. 순천이란 도시가 한일(一)자로 길다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길다. 가도 가도 순천이 끝나질 않는다. 시내 벗어나는 데만도 1시간 이상 걸린 듯싶다. 2번 국도를 타고 순천시청에서 순천대를 거쳐 개운역까지 왔을 때 벌써 11시가 되어 있었다. 국도는 편도 2차선으로 대형 덤프 트럭들이 씽씽 달리는데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지나간 다음은 바람으로 인해 더 무섭다.

갓길은 경운기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차들이 지나가고 나면 내뿜어진 매연이 고개를 돌리게 한다. 어서 국도를 벗어나야 할 텐데. 망설였다. 17번 국도를 따라가면 지름길인데 황전 가기 전에 병풍터널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터널은 걸어서 지나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좀 돌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자. 개운역에서 좌회전하여 22번 도로를 타다가 857번 지방도로로 가기로 하고 일단 식당을 찾았다. 학구삼거리에 운전학원 옆 '푸른솔가든'으로 들어갔다. 배도 고프고 발바닥도 소식이 온다. 물집이 잡혔다고.

백반을 시켜놓고 양말을 벗었다. 오른발바닥은 아프긴 한데 물집은 보이지 않고 왼발 둘째 발가락에만 물집이 잡혔다. 더이상의 마찰을 줄이려 밴드를 돌려 감았다. 밥은 푸짐했다. 딸은 전라도지방의 여행은 음식이 맛있어서 더 행복하단다. 옆에서 식사하는 두 사람한테 지도를 보여주고 물었더니 거길 어찌 걸어가냐며 극구 말린다. 버스를 타고 황전이나 월등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태안사까지 걸으라 충고를 해준다.

밥 먹고 다시 걸었다. 지도는 정확했다. 승주읍 거의 가서 857번 갈림길이 나온다. 하늘은 맑고 차도 없다. 사람도 없고. 둘은 힘들긴 하지만 아침에 순천시내에서 산 귤을 까먹으며 열심히 걷는다. 땀이 날 정도로 더워서 이미 겉옷은 벗어서 배낭에 넣었다.

인적 드문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이 길이 월등으로 가는 길이 맞냐고 물었다. 아저씨 왈, "길은 맞는데 월등이 얼마나 험한 길인데 거길 왜 가냐"며 버스를 타란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손사래를 치며 말리신다.

"거긴 인적도 없고 흉한 곳인디 뭐하러 갈라 허요? 오늘 안에 갈 수도 없는디. 날 저물면 어쩔라고, 가게도 없고 잘데도 없는디." 한마디 더 하신다. "알아서 허요."

가끔씩 나온는 곳이 거의가 다 계단식 논
▲ 계단식 논 가끔씩 나온는 곳이 거의가 다 계단식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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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이상한 사람들 보겠네 하는 표정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저씨의 속깊은 뜻을 몰랐다. 알 리가 없지. 길은 걷기에 좋고 경치들도 좋다. 중간 중간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붙은, 하루에 여섯 번 정도의 배차시간표만이 이곳이 얼마나 오지인지를 보여준다. 아직까지는 좋다. 몸상태도 버틸 만하고 차도 없어 한적하고 햇빛 좋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아무리 걸어도 월등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조금씩 오르막길이 시작되면서 누가 다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무겁고 오른쪽 발바닥마저도 물집이 잡혔는지 아프다. 중단할 수야 없지, 둘다 점점 말이 없어진다.

옆으론 산줄기들이 뻗어 있다. 버스로 잠깐이면 갈 길을 이렇게 힘들여 가고 있는 이유가 뭘까? 왜?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다가 더 힘들어지니 아무 생각도 없다. 수행이 이런 것일까? 무념무상의 경지가 이런 것일까. 가끔 지나가는 버스가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다.

여기가 월등 삼거리 다왔는줄 알고 좋아했던 쉼터. 잠시나마 피로를 잊고 휴식을 취하고 활기를 되찾은 곳. 여기에서 1시간 후에 삼거리에 도착했다.
▲ 승주에서 월등방향에 있는 예쁜 쉼터 여기가 월등 삼거리 다왔는줄 알고 좋아했던 쉼터. 잠시나마 피로를 잊고 휴식을 취하고 활기를 되찾은 곳. 여기에서 1시간 후에 삼거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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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넘어 산, 왜 아저씨가 그렇게 말렸는가를 이제서야 알겠다. 오르락내리락하며 산마루 정점에서 내리막길 초입에 아담하고 예쁜 쉼터가 하나 있다. 월등이라는 이름이 드디어 보인다. 딸과 하이파이브!(한손씩 내서 손바닥 마주치는 것)

템플스테이는 물건너 가고

이제 힘든 고비는 넘겼다. 고지가 눈앞이다. 쉬었다 가자. 물도 마시고, 남은 귤도 까먹고 신발도 벗어서 열도 내려주고 땀찬 발을 주물러가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나와야 할 삼거리가 나오질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월등에서 840번 도로로 바꿔타야 되는데. U자로 한참을 돌아서야 기다리던 840번 갈림길 도로가 나온다. 쉼터에서 1시간 가까이 걸은 다음이다. 여기서 태안사 입구까지 또 한참을 가야 할 텐데....

드디어 기다리던 삼거리 태안사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월등 면사무소앞. 월등이라는 동네 이름이 나오고 나서도 1시간 후에. 월등은 정말 월등히 큰가 보다. 전화번호안내를 받아 태안사에 전화했더니 스님이 10분이면 올 수 있단다. 아싸!

옆에 붙어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초코파이 1통과 에이스 과자 1개를 샀다.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1시간은 족히 걸릴 거란다.

'뭐야? 스님 얘기는? 아뿔싸 , 스님은 우리가 승용차로 오는 줄 알고 10분이라고 하신 모양이다.'

월등 가는 길에 있는 산촌마을
▲ 산촌마을 월등 가는 길에 있는 산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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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보자. 그런데 아까보다 경사가 더 심한 산길이 기다린다. 길 옆으로는 산막촌들이 군데 군데 자리잡고 있다. 다리는 천근만근, 아이는 지쳤는지 말을 시켜도 대답도 안하고 과자봉지까지 내가 다 들었다. 앞장서서 씩씩한 척 걸었다. 역시 한국의 아줌마는 세다.

피안의 세계는 멀기만 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약간 겁이 났다. 아이는 뒤에 천천히 오라고 하고, 나는 앞서서 부지런히 걸으며 탐색을 했다. 차로 10분이면 걸어서는 거의 1시간 거리일 듯싶다. 날은 컴컴해지는데 딸에게 힘내라고 북돋워주면서 무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피안의 세계 태안사'라고 해서 어리석은 중생이 부처님좀 찾아뵐려 했더니 멀기만 하다. 아무나 부처님을 뵐 수 있는 게 아닌 듯.

6시 반쯤 되어 드디어 '태안사' 표지판이 보인다. 가져간 책 안내에는 태안사를 반대편에서 오는 걸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온 반대편은 아무 정보 없이 온 셈이다. 입구에서 절까지는 2.2Km. 지친 상태라서 30분 이상 걸어야 할 것 같다.

절에는 내일 들어가자. 석천산장에 묵기로 하고 피곤해서 밥 생각이 없다는 애를 설득해 다슬기수제비로 저녁을 먹었다. 방은 뜨끈뜨끈해서 좋았다. '내일 아침 삼겹살구이되어 있는거 아냐'

물집이 2개가 잡혔다. 바늘과 실을 통과시켜 물을 뺐다. 서로 발과 종아리를 밟아서 마사지를 해주었다. 이런 땐 둘이라서 좋구나. 이틀을 잘 걸어준 딸이 새롭게 보였다. 늘 어리고 기대기만 하는 아인줄 알았는데.....


태그:#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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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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