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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목요일 새벽에 새하얀 함박눈이 사뿐사뿐 가벼운 몸짓으로 우리 동네에 내렸었다. 그렇게 내린 눈이 오늘 아침까지도 곳곳에 녹지 않고 남아 겨울의 정취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하얀 눈은 햇빛이 많은 양지를 슬쩍 피해서 아파트 건물의 그늘에 비스듬히 숨어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던 모양이다.

토요일 아침까지도 우리 동네 하얀 눈은 전부 녹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게다가 자동차를 몰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동안에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에는 잔설이 충분히 남아 두 눈으로 새하얀 눈을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었다.

미술관에 도착해서 찍은 기념사진
▲ 꼬마 친구들과의 국립현대미술관 나들이 미술관에 도착해서 찍은 기념사진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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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대를 잡고서 가는 동안 내내 들뜬 마음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주변의 아름다운 눈과 나무와 산의 빛깔에 포근히 묻혀 있는, 한 점의 거대한 반추상형식의 조형물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의 주출입구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1층 정면 왼쪽 구석 한 곳에 아이들을 모이게 해서 오늘의 미술관 나들이에 대한 일정을 꼼꼼히 나눠 주었다. 그런 다음 오늘 아이들에게 들려줄 '밀짚의 미술이야기'의 허술한 보따리를 서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곳은 현대식 시설과 여건을 갖춘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미술과 해외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우수한 미술작품들이 여러 점 소장·있단다. 오늘 이 곳을 찬찬히 둘러보며 우리가 평소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현대미술도 감상해보고, 미술의 역사와 미술의 흐름, 미술의 조형요소 등 재미난 이야기도 함께 배워보자!"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의욕과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술관의 주출입구 정면에 있는 램프코어(Lamp Core) 통로가 임시 폐쇄된 관계로 그 왼쪽에 있는 원형전시실로 향했다. 꽤 넓어 보이는 원형의 전시 공간 곳곳에는 적절한 간격과 위치를 안배한 다양한 미술작품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쾌한 관점으로 상상해보라!
▲ 엉뚱한 서로의 시선 유쾌한 관점으로 상상해보라!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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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과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기에 앞서 인류에게 미술의 시작은 언제부터이고, 어떤 흐름과 형태로 변화해왔으며, 작품의 감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몇 발짝 느린 걸음을 걸어 특징이 두드러진 몇 개의 작품을 선택해서 그 작품에 대한 나름의 느낌과 해석, 그리고 내 정서와 감성을 자극하는 '매우 주관적인' 나만의 전율과 흥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술은 생활의 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단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벽화를 보면 그들이 그린 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냥감을 얻기 위한 하나의 주술적인 행위였던 것이지. 라스코 동굴 벽화 등을 살펴보면 많은 들소들을 볼 수 있는데,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주된 식량이었던 들소를 많이 잡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소원이었기에 들소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들소의 영혼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내게 긍정의 표시를 주었다. 그 참에 나는 미술의 대표적 조형요소인 점, 선, 면, 형, 색, 그리고 양감, 질감, 운동감 등에 대한 의미를 일방적으로 주절주절 쏟아 뱉었다. 얼마 후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저 양반이 뭐라고 하긴 한 것 같은데, 뭔 소리지?' 꼭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나는 그 이후로도 구상이며, 추상이며, 반추상은 또 뭐가 어떻고 어떠하다는 설명을 곁들였고, 준비해 간 자료집을 펼쳐 보이며 감히 미술사조의 흐름에 대해서까지도 언급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나니 아이들은 더욱 더 가관이란 표정을 지으며 10대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이~! 구경 안 할 거예요? 정말, 왕 짜증나~!"

한 녀석의 성질 한 방에 나는 순간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어! 구경하자, 구경하자고...깨갱~~"

나는 아이들의 순수하고 예리한 시선과 감정의 촉감에 대해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어른들의 경직된 관점과 보수성을 훨씬 뛰어넘는 그들만의 때 묻지 않은 느낌과 상상력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을 나는 힐끔거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작정 순서를 정해 작품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을 다른 친구들에게 마음대로, 자유롭게 설명해 보라고 멍석을 깔아 주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아이들 중 누군가 한 녀석의 용감한 작품해설을 시작으로 너나없이 서로 해보겠노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한 녀석이 제일 먼저 오늘의 작품해설사가 되어 자신의 느낌과 작품에 대한 이미지와 해석을 곁들여 설명해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제목이 '끝(The End)'이라는 작품인데요, 이 작품을 보면 우주가 연상되고요, 그리고 가운데 중심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아이들은 서로 대답하기 위해 손을 들고 옆 사람의 몸을 밀치기까지 하며 얼굴을 내밀었다.

"저는 토네이도 같은 이미지가 느껴져요, 무슨 허리케인 같은 느낌 그런 거 말이에요."
"저는 블랙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데요."
"저는 원심력이 느껴져요."

아이들은 작품 하나를 앞에 놓고서 자신만의 느낌과 이미지와 해석을 누구랄 것 없이 열심히 늘어놓고, 의견을 얘기하고,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인상을 자유롭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아이들끼리의 작품해설이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 나는 잠시 틈을 비집고서 중간 정리를 했다.

"점이나 선 하나로 그림의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단다. 거기에 색을 칠하고, 여러 가지 조형요소를 가미하면 더욱 실감나는 그림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만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 예쁜 그림만이 좋은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까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창조적 사고방식을 통한 새로운 시도, 그것은 매우 의미 있고, 발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단다. 즉 미술(예술)의 역사는 언제나 창조적인 생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했던 엉뚱하고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세요!"

"예를 들면, 입체파(큐비즘)의 대표화가이자 20세기의 위대한 화가이기도 한 ‘파블로 피카소’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사물들은 그 어떤 것이라도 위치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보여주었단다. 즉 사물을 고정된 위치와 방향에서만 그릴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본 것을 한 장의 그림에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미술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새로운 관점을 증명해 주었던 것이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기괴하게 생긴 사람의 얼굴이나 몸이 조각조각 이어져 그려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니?"

아이들은 처음보다는 더 쉽게 이해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벽면과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는 그림과 조형물들을 감상하고 분석(?)하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원형전시실의 한 쪽 공간에서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몇 몇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고물 같은 라디오와 스피커, 그리고 낡은 탤레비전 모니터를 용접하고 조합하여 구성한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의 모니터 화면에는 쉴 새 없이 영상이 움직이면서 변화무쌍하고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첨단의 기술을 이용한 예술작품(비디오 아트)이었다.

원형전시실을 나와 백남준 선생의 거작 ‘다다익선’이 설치되어 있는 램프코어(Lamp Core)원형 통로로 향했다. 그런데 램프코어의 원형통로에 이르니 중앙에 바벨탑처럼 우뚝 서 있어야 할 ‘다다익선’은 헝겊으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의아스럽기도 했고, 충격이기도 했다. 

미술관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에게 여쭈었더니 그 분께선 이렇게 답을 주셨다.

"글쎄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품을 교체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설치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대미술에서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의 작품
▲ 백남준의 '다다익선' 현대미술에서 첨단기술을 이용하여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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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실제 작품인 '다다익선'이 사진으로 붙어있는 벽면에 두 녀석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 '다다익선' 사진 옆에서 백남준의 실제 작품인 '다다익선'이 사진으로 붙어있는 벽면에 두 녀석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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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이유를 물었더니 자세한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며 난감해 하시는 눈치여서 그만 두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미술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살다간 백남준 선생의 대작을 나와 아이들이 두 둔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램프코어 원형통로 중간쯤을 오르다 기워진 헝겊사이를 벌려서 순간적으로 ‘다다익선’을 사진기와 눈에 소매치기처럼 잽싸게 훔쳐 담았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그곳을 지나쳐 2층에 있는 제3전시실과 제4전시실로 향했다. 얼마 후 제3전시실 앞 휴게용 의자에 서둘러 앉으니 그 제서야 참고 있던 긴 한 숨이 퓨~우~ 하고 김빠지듯 새어 나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제3, 제4전시실을 천천히 걸으며 현대 한국미술의 흐름과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제3전시실에는 1960년에서부터 1980년까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타난 사회적 사건과 현상 등을 토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새롭고 다양한 현대미술 운동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4ㆍ19와 5ㆍ16군사정변을 겪었고, 군사독재와 민주주의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던 그 시기는 우리나라 미술에 있어서 ‘근대’의 개념을 넘어서 ‘현대’의 개념이 정립되는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3전시실을 나와 제4전시실로 향했다. 그 곳에는 1980년 이후 ~ 2000년까지 한국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리통의 근육이 지쳐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씩씩하고 싱싱한 아이들의 발과 다리 역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바꿔보기로 했다. 제4전시실을 대충 눈요기 하고서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3층에 있는 어린이미술관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화려한 색상이 눈에 띄었고, 밝고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는 걸 보더니 아이들은 갑자기 명랑 쾌활한 모드로 돌변했다.

 아직 초등학교 4~5학년인 아이들의 표정과 색깔이 예쁘다.
▲ 미술관에 간 아이들 아직 초등학교 4~5학년인 아이들의 표정과 색깔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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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그림엽서도 그려보고, 모처럼 즐겁게 사진도 찍으며, 음악이 울려나오는 스피커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편하게 쉬기도 했다. 친구들끼리 둘 셋으로 어울려 어깨동무도 하고 작품에 대한 자기들만의 의견을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전용공간인 어린이미술관에 도착하자 한동안 시들했던 기운이 금방 싱싱하게 살아나는 모습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하루 만에 모조리 다 돌아보고 가리라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은 참으로 간사한지라 둘러보다보면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놓치고 싶지 않고 한꺼번에 다 챙겨가고 싶어지는 욕심이 나도 몰래 발동하니 스스로 속물임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 나는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함께 이곳 국립현대미술관에 와서 일상으로 혼탁해진 정신과 칙칙한 감정을 새롭게 스케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엉뚱한 상상력의 대가들이 만든 작품들을 즐겁게 감상하며 움츠리고 있던 내 안의 소극적 자아를 활기차게 일깨울 수 있는 신선한 감성의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미래를 보다 창의적으로 디자인 할 수 있는 모티브의 새싹을 얻었으니 여간 만족스럽지 않다.

10대 아이들의 발랄한 에너지를 '껑충 뛰기' 사진으로 잽싸게 찍었다.
▲ 유쾌한 사진찍기 10대 아이들의 발랄한 에너지를 '껑충 뛰기' 사진으로 잽싸게 찍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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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라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공부에 찌들고, 숙제에 지친 이 시대의 피곤한 아이들에게도 심신의 피로와 긴장을 풀 수 있는 오붓한 미술관 나들이는 낭만적이고도 유익하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어렵고 난해한 현대미술을 쉽게 이해하고, 친근하게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쌓게 한다면 그들의 감성과 정서와 상상력의 깊이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순수하고 예리한 아이들에게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가족끼리, 친구끼리 가끔씩 행복한 미술관 나들이를 시도해 본다면 좋을 듯싶다.

“조각품은 왜 꼭 고정된 것이어야 할까? 움직이는 것도 얼마든지 조각품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빌을 창안한 ‘콜더’의 기발한 생각을 유쾌하게 곱씹으며 나는 미술관에서 밖으로 나가는 눈 내린 오솔길을 굽이돌아 내리막길로 차를 몰았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17일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피카소, #근현대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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