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해발 600미터나 되는 덕유산 산자락은 더 춥습니다. 새벽 최저 기온은 영하 14도가 평균입니다. 관리소홀로 간이상수도까지 꽝꽝 얼어붙어버려서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계곡물을 길어다 먹는 우리 집은 이 겨울이 참 팍팍합니다.
마음까지 얼어 붙는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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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 속 물 늘 두드려 깨야 물을 만난다. 얼음 두께는 20센티 쯤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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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도 아궁이불로 데워 쓰니 어머니 빨래며 목욕이며 설거지며 기초생활마저 참 버겁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얼음산이 녹아내리네, 한반도에도 아열대성 기후가 나타나네 하면서도 날씨는 춥기만 하니 푸념이 자꾸 나옵니다.
더 큰 걱정은 어머닙니다.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이불을 두 겹으로 덮고도 "와 이리 춥노? 방에 불 좀 더 때라"고 하십니다.
옷에 실수를 하는 횟수도 부쩍 늘었고 입맛도 까다로워져서 어머니 좋아하시는 고구마를 썰어 넣은 호박잎국밥이나 들깨죽을 해 드려도 늘 짜증입니다.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하는가 하면 저를 쥐어뜯거나 때리는 공격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형님 한 분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래도 오래 못 사실 것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고난의 행군'을 마무리 할 방안을 골똘히 생각했고, 드디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바로 어머니 '생신 여행'이었습니다.
음력 섣달 초열흘이 어머니 생신입니다. 제가 늘 하던 방식대로 놀이 하듯이 에둘러 접근했습니다.
"어무이. 제 생일이 언제예요?""너 논지가 언젠데 내가 그걸 여태 안 까묵고 오찌 아노.""저 낳은 지 얼마나 되었는데요?""너 백 살 안 넘었나?""어머니 생일은요?""찌랄한다. 내 생일 차려 먹을새가 오딘노? 아 놓고도 미역국 한 번 몬 묵었다.""애 놓고 미역국 안 드시면 뭘 드셨어요?""쇠죽 끓이다가도 놓고, 콩밭 매다가도 놓고, 너그 탯줄도 내 이빨로 끊었는데 시어머니가 있나 친척이 있나 미역국 해 먹을 새가 어딘노."어머니 생신 여행을 떠나다한 시간 가까이 이런 놀이를 해서 어머니가 제 생일도 기억해 내고, 드디어 당신의 생일까지 알아냈습니다. 숫자가 애기 주먹만 한 농협달력, 어머니 생신날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쳐 놓고 매일 매일 어머니에게 되새겨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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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트럭에 앉아 차창 밖 풍경으로 보며 어머니 얘깃거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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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갖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어머니 젊은 시절의 생활용품과 문방사우 중심으로 샀습니다. 바늘세트, 쪽가위, 팬티고무줄, 참빗, 대 소쿠리, 옵삔세트 등등.
그리고는 생일날 식구들이 모여서 성대한 선물 전달식을 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며칠 전부터 사진을 보여 드리며 여행지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킨 다음이었습니다. 여행지는 지리산 정령치 기슭입니다. 바쁠 것 하나도 없는 저는 어머니랑 둘이 트럭을 타고 쉬엄쉬엄 장수읍을 지나 번암과 운봉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년에는 풍년이것다.""와요?""보리가 저리 시퍼런 위에 허연 눈이 있응게.""그라믄 풍년이라요?""밀이나 보리한테는 눈이 이불잉기라. 봐라. 내년에 풍년 안 드는가."사료용 호밀을 보리로 여긴 어머니는 옛 농사 격언과 속담들을 꺼내 가며 겨울의 빈 들판을 호령하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따뜻한 욕조에서 어머니랑 목욕을 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있던 우리는 꼭지만 누르면 펑펑 나오는 온수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방바닥도 땀이 날 정도로 따끈 거렸습니다. 끼니마다 주인이 손수 농사지어 만든 반찬들이 바뀌어 올라왔습니다.
저는 미리 밥 차림표를 챙겨 보고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점심은요. 어머니 위해서 할아버지가 씨레기 국을 끓여 주신대요.""아이고. 날 먹으락꼬? 하라부지한테 우리는 뭘 해 죽꼬?"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준비해 오신 잔 멸치와 곶감을 가방에서 꺼내 할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흥이 난 저는 여행지의 모든 상황들을 놓고 모두 다 우리 어머니를 섬기고 모시는 정성들인 것처럼 꾸며서 얘기를 했습니다.
"어무이 목욕물 할아버지가 데워놨대요. 목욕해요 어무이.""아이고. 목욕물을 또 데와났어? 이럴데가….""어무이. 옛날에 메주 콩 삶은 거 잡숴 보셨죠? 어무이 잡수시라고 가마솥에 콩 삶아요.""옷에 오줌이나 싸는 빙신한테 머 한닥꼬 콩까지 삶아 멕인디야. 우리도 불 때로 가 복까?"어머니 말씀에 저는 휠체어를 밀고 가서 마당 구석에 있는 콩 삶는 가마솥 불을 어머니랑 같이 땠습니다. 푹 삶긴 콩을 한 국자 퍼서 나눠 먹는 재미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감동과 감사의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무이 우리 여기서 살까요?""할아버지가 살라 카건나?""그래도 말 해 볼까요?""살라카믄야 좋지. 이 보다 더 존데가 오딕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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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숙소를 나와 제법 먼 길을 양지만 쫒아가며 산책을 했습니다. 소나무 숲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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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베품과 겸손과 기쁨과 순응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은 천국이었습니다.
저 역시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설거지는 물론 청소까지 면제되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세끼 밥 차리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세상 모든 주부들의 노고를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며칠 흠뻑 젖어 지내다 집에 오니 어머니는 천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뭣이든 잘 드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저에 대한 애틋함이 다시 되살아나셨습니다. 저요? 저는 천사의 아들이 되었지요. 장작 패고, 물 퍼 나르고, 요리 책 뒤적이고, 빨래하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행복한 노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