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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순씨는 입영을 하루 앞둔 둘째 아들 태훈에게 신신 당부한다. "…여차하면(정 힘들면) 탈영을 해라…"라고.

 

세상에 어느 부모가 군에 입대하는 아들에게 "힘들어도 참아 보라"가 아닌 "못 참겠다면 탈영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징역을 가도 좋으니 탈영을 해서라도 아들이 살아남길 바라는 김씨 부부(김용운 64, 김기순)는 1998년 8월, 장남 태균을 어이없이 잃고 말았다.

 

이유는 단하나. 대한민국 평범한 국민으로 '국방의 의무'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 김태균 중위의 사인은 '자살'.

 

"그놈의 대학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그렇다면 장교시험을 봐서 해군에 지원하지 않았을 거구. 그러면 태균이가 죽지도 않았을 텐데…."

 

흔히들 '인명은 재천'이라고 한다. 어떤 어이없는 죽음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이지만, 김씨 부부에게 아들의 죽음은 세상 어떤 말로도 위안이 될 수 없고 결코 덮어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한때는 보람이자 자랑이었던 대학 합격조차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듯하여 원망스럽기만 한 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픔이 오죽하면 무지렁이로, 혹은 감옥에 갇혀서라도 아들이 살아있기를 바랄까.

 

"아를 군에서 잃고 보니까 그런 부모가 한둘이 아니여. 그런 부모들끼리 모여서, 지들이 밝히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꼭 진실규명을 하자 그랬제. 돈모아서 미니버스 한 대 사서 밤이고 낮이고 비가 와도 우리 자식들이 죽은 군부대를 찾아 다니면서 농성하고 국방부 앞에서 단식하고 삭발하고…, 농성 한다고 끌어다가 저기 어디 외딴 곳에 패대기쳐 놓으면 또 달려가고, 참말로 안해 본것이 없제. 그란디 아무 소용이 없어. 즈그들은 꿈쩍도 안하니께. 근디 울화통이 터지고 답답혀도 안 나갈 수가 없어. 그냥 있으면 오매 환장허겄어서 살 수가 없는디…"-고 손철호 소위 아버지 손오복 씨

 

이렇게 말하는 손오복씨의 아들 고 손철호 소위(1998년 8월 26일 사망)의 사인도 자살이다. 부대측에 의하면 수류탄을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손씨는 2006년 4월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원회)에 아들의 죽음을 진정, 2008년 7월 진상 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아들이 죽은 지 꼭 10년 만이다.

 

"군 생활의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군의문사위원회의 결정문을 보는 순간 손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했던 아들이 두 달 동안 겪은 고통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씨 부부에게 아들이 남기고 간 것은 농협중앙회 입사 결정 임용장. 아들은 입대를 앞두고 이미 제대 후 근무할 곳까지 미리 정해져 임용장까지 받을 만큼 실력을 갖춘 인재였다.

 

때문에 '자살'로 진상 규명이 됐어도 손씨 부부는 차마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부부는 '차라리 내 아들을 군의문사로 남겨두라'고 말한다.

 

고 손철호 소위의 죽음은 가족들은 물론 사망 당시, 수많은 학교 선후배들까지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몰려들어 '자살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항의하고 울분을 쏟아낼 만큼 어떤 환경에서도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손씨는 생업을 접고 자신과 같은 처지 부모들의 기사 노릇을 자처, 아들들이 죽어간 부대나 관계부처로 차를 몰아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지원하고 있다.

 

'사회와 학교에서는 책임감 강하고 의지 강한, 믿음직스런 아들이었는데 군에 몸담은 몇 달. 그들은 왜 '사회(군) 부적응자'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되고 마는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자식을 보냈는데, 국가는 왜 그 죽음을 외면하고 감추려만 드는가?'

'멀쩡하던 내 자식이 왜 죽었는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삼인 출판사 펴냄)은 김씨나 손씨 부부처럼 의문의 죽음으로 아들을 잃은 유족들의 남겨진 이야기 18편 모음이다.

 

군의문사위원회 "손도 못 댄 의문사 많이 남았다. 조사는 계속돼야…"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한 장교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었다. 고 김훈 중위. 이 사건은 영화 <JSA>의 모티브가 됐고 그동안 장막에 기려졌던 비무장지대 병사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군에 입대한 아들을 '의문의 죽음'으로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유족들이, 국가와 국방부라는 강한 힘에 맞서 아들의 죽음을 세상을 향해 호소하는 계기가 됐다.

 

2005년 6월, 유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군의문사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1월 출범했다. 그리하여 1년 동안 진정을 받았는데 600여 건이 접수되었다고 한다.

 

"군의문사 사건 600건이 접수됐다. 1950년대부터 2005년까지 군(軍)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할 정도로 다양하고 애절한 사건들이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고아원에 보내진 아들,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시댁의 구박을 받으며 살아온 아내, 외아들을 잃고 질환에 시달린 어머니, 내 탓에 자식이 죽었다는 자책으로 술에 빠져 살아온 아버지…, 수십 년 만에 가슴속 얘기를 꺼내놓고 목 놓아 우는 유가족들에게 군의문사위원회는 존재 자체만으로 위안이었다." -책 속에서

 

출범 3년 동안 약 350건을 조사 종결, 그중 120여 건의 진상을 규명했다고 한다. 책 속 이야기들은 군의문사위원회가 3년 동안 밝혀낸 군의문사 중 유형이 조금씩 다른 실례들로 몇 명의 작가들이 유족들을 만나 인터뷰,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썼다.

 

군의문사위원회는 지난해(2008년) 12월 31일로 법정 시한인 3년이 끝났다. 법정시한이 끝났지만, 유족들은 아직 밝혀내야만 하는 죽음들이 더 많다고 하소연 한다.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시신이 20구, 조사해야할 사건이 240건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은 이처럼 아직 손도 되지 못한 의문사, 미해결된 '군의문사' 유족들의 이런 안타까운 바람을 안고 나온 책이다.  

 

책속에서 만난 유족들의 이야기는 특별한, 일부 사람들의 아픔과 억울함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거대한 조직의 힘에 눌려 묻어야만 했던 수많은 유족들의 사연이자, 내 아들을 혹은 내 형제를 군에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들일 것이다.

 

혹은 그들의 죽음을 보도로만 접하며 죽음, 그 이면의 실상을 전혀 알길 없었던, 혹은  "오죽 못났으면 자살을 했냐?" "누구는 군대에서 편하게 살았냐"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여다보아야 하는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까?

덧붙이는 글 |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삼인출판사/2008.12.5/\12,000)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삼인(2008)


태그:#다큐멘터리, #실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군의문사, #비무장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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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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