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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20살이 되는 창묵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자신의 입으로 내는 소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들을 수 없으니까 말도 잘 할 수 없다. 수화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수화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렇다.

창묵이는 평소 말수가 적었다. 입으로 내놓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남에게 하고 싶은 말도 별로 없어 보였다. '소통'의 어려움이 짓누르는 고통 때문일 것이다. 쑥스러움도 많이 타는 표정이었다. 창묵이의 웃음은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서울농학교에 다니는 창묵이는 겨울방학 이후 안동 고향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도 갈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출발 당일 아침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수줍음 많지만 '특별한 재능' 있는 창묵이

장애인을 '무엇인가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disabled'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그 말이 가진 부적절함을 놓고 'differently abled'라는 말이 옳다는 주장도 있는데, 창묵이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을 통해 후자가 옳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창묵이에게는 남과 다른 놀라운 재능이 있다. 창묵이는 소리가 필요하지 않는 모든 수단으로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글과 그림이다.

창묵이는 12월 29일부터 1박 2일로 친구들과 함께 남해의 거제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곳에 양식장과 공장을 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 제조업체 중앙씨푸드(주)가 이들에게 졸업여행을 겸한 견학을 제안해왔기 때문이다.

청각장애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늘 쾌활한 하은이(11)와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똑부러진 말솜씨의 하늘이(13), 왜소증의 지체장애인으로 '삼행시 달인'인 소연이(15) 등 초등학교, 중학교 동생들까지 모두 11명이 함께 했다.

이 친구들은 너무도 남다르다. 지난 9월부터 무려 14주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만나왔다. 동화책을 만들기 위해서다. 푸르메재단이 주최하고 아르코미술관이 후원한 '장애청소년 동화책 만들기 프로젝트'. 처음 8주는 지체장애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소설가 고정욱 선생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임정진 선생님, 시인 강만수 선생님에게서 글쓰기를 배웠다. 각자 원고가 마무리되고 나서는 동화책에 들어갈 그림을 손수 그렸다. 화가 이제 선생님 등 미술 교사들이 함께 했다.

동화책 만든 장애청소년들의 행복한 졸업여행

만만치 않았다. 매주 빠짐없이 출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창묵이는 물론 단 한 사람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멀리 전라도 광주에서 매번 버스를 타고 오는 시각장애인 형옥이(18)까지 모두들 14주 과정을 끝까지 함께 했다. 12월 22일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예비 작가' 친구들이 졸업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수줍은 창묵이도 들뜬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창묵이로서는 제 손으로 동화책을 만들고 정식으로 출판까지 하게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글과 그림을 배우며 책을 만들어가던 지난 석달여 기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책은 샘터사에서 내년 4월 장애인의 날 즈음해서 예쁘게 꾸며 서점에 내놓을 예정이다.

작가가 된다는 꿈만 같은 사실, 그리고 이제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으로 졸업여행에 나선 창묵이의 마음은 싱숭생숭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손님들. 동화책을 만들었던 친구들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했던 그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 역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바로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창묵이와 아이들이 쓴 글을 이미 꼼꼼하게 읽었던 박완서 선생님은 "그 수준이 놀랍고 내용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면서 흔쾌히 친구들의 벗이 되어주었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지선 씨도 어머니와 함께 거제도행 버스에 올랐다. 전신화상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그는 지금 재활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다. 가슴 가득히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창묵이와 친구들의 졸업여행에 동행한 것이다.

5시간을 달려 마침내 남해를 만났다. 하늘이 도왔을까. 남해의 바다는 잠잠하게 친구들을 맞았다. 굴이 커가는 과정이 신기했고, 완성된 제품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선사시대 인류의 양식이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굴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세상아 덤벼라!

창묵이는 이날 밤 남해의 잔잔한 물결 위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지난 해 아쉬움과 씁쓸함을 잊고 새해를 맞이하자, 그리고 도전하자, 세상을 겁낼 필요가 없다. 창묵이는 잠시 뒤 벌어진 '시 창작 대회'에서 새해를 맞아 청년으로 거듭난 자신의 미래를 향해 시를 지었다.

동행한 서울농학교 임옥규 선생님의 수화통역으로 읽혀진 그 시를 듣고 평소 창묵이를 알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 수 적고 부끄럼 타던 창묵이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10대의 문
- 시. 강창묵

오, 꽃다운 19살에 20살 되겠네
3일 남았네! 정말 슬프다, 슬퍼
지금까지 10대의 집에서 노느라 정말 즐거웠어

이제 즐거움이 사라지겠네
만약 20살이 되게 해 준 천사가 오면
하이킥으로 날릴거야
하지만 내가 인간이라서 천사를 안 보니까
때리고 싶어도 때릴 수 없어
천사는 좋겠네!

차라리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시간의 신을 우연히 만나면
시간을 멈추라고 뺨을 때릴거야
하지만 그리스랑 한국이 머니까
못 때려주겠네
신은 좋겠네!

그래도! 20대의 세상에 당당히 들어가자!
덤벼봐

창묵이의 시는 이날 창작대회에서 당당히 으뜸상을 거머쥐었다. 심사를 맡은 강만수 시인은 "시의 구성요소인 음악성, 회화성, 논리성을 두루 갖춘 빼어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기대도 않고 화장실에 갔던 창묵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 손에 끌려와 상장과 선물을 받았다.

실험실에 잡혀간 아기 병아리의 구출기를 그린 자신의 작품에 들어갈 그림이다.
▲ 창묵이가 그린 동화책 삽화 실험실에 잡혀간 아기 병아리의 구출기를 그린 자신의 작품에 들어갈 그림이다.
ⓒ 푸르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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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묵이는 봄에 서울농학교를 졸업한다. 사실 예비대학생이다. 대구의 한 대학 애니메이션과 수시에 합격한 것. 단 한 번도 체계적인 회화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창묵이의 그림은 누구나 놀라는 수준이다.

그런 창묵이가 한동안 진학을 망설였다고 한다. 임옥규 선생님은 "창묵이가 새로운 환경이 부담스러운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해서 한동안 주위 사람들 모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거친 바람 맞으며 더 높이 날아오르길

창묵이는 두려웠을 것이다.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안한 농학교를 벗어나 이제 비장애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야 한다. 1박2일 여행을 가는 것조차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창묵이, 합격해둔 대학조차 포기하려 했던 창묵이, 그런 창묵이가 이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세상을 향해 '덤벼봐' 하고 외칠 수 있는 힘을 그동안 조용히 쌓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어렵고도 소중한 결심, 바로 세상과 한 번 붙어보겠다는 도전의식으로 이번 여행에 참여한 것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새해 소원을 적은 연을 날렸다. 잘 날지 않았다. 아니, 자꾸 바닥으로 처박히기만 했다. 연을 묶은 실을 잡고 이리저리 달려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끝내 창묵이의 연은 그다지 멋지게 날아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진실을 알고 있었다. 창묵이의 연이 제대로 날지 못한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아서였다.

창묵아! 연이 높이 날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 없어. 네 잘못이 아니야. 바람이 세게 불면 연은 더 높이 날 수 있어. 이제 거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될 창묵아. 세상의 거친 바람이 '강창묵'이라는 연을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띄워줄 거야. 넌 이제 튼튼한 몸과 마음으로 불어 닥칠 바람 앞에 두 팔 활짝 펴고 날아오르면 돼. 그리고 네가 오르고 싶은 만큼 높이, 가고 싶은 만큼 멀리 떠나가면 돼. 행운을 빌어. 힘내라, 창묵아!

덧붙이는 글 | 글, 사진 : 정태영 푸르메재단 팀장



태그:#장애청소년 , #청각장애, #동화책, #박완서,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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