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혁명 광장에 짚을 뿌려놓고 풀어 놓은 소들은 농민의 문제가 비단 토르티야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 도심 속 소들 혁명 광장에 짚을 뿌려놓고 풀어 놓은 소들은 농민의 문제가 비단 토르티야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멕시코시티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레포르마 거리에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버스 두 대가 멈춰서더니 인디오 복장을 한 농민들이 무리지어 내렸다. 그들은 짐 창고에서 이것저것 꺼내더니 조그만 삶의 터전을 벗어나 대도시에 온 게 낯설었던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멕시코시티 도심 한복판에 단체 나들이 온 듯한 그들은 무질서하게 짐을 여기저기 펼쳐 놓고 자기네들끼리 왁자지껄 얘기하며 분주히 자리를 오고 갔다.

농민시위 대열에 휩쓸리다

나는 슬쩍 그들을 향해 사진 한 장 찍고는 광장 풍경을 담기 위해 도로를 건넜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전에 없이 웬 경찰들이 삼삼오오 모여 행사를 준비하는 듯한 자세로 열을 지어 서 있었다.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상관 않고 내 할 일만 하는 도중에 우연찮게 다시 농민들 쪽을 보니 그 새 버스가 몇 대 더 정차해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많은 농민들이 시골영감 처음 가는 버스놀이처럼 우왕좌왕 산만한 집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긴장이나 대립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다.
▲ 시위 전 긴장이나 대립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오늘 여기서 시위가 있을 예정입니다."

경찰은 농민들을 보고도 사태파악을 못해 어리둥절한 나에게 말을 해왔다. 다시 보니 경찰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시위길래 수백 명의 농민들의 이곳으로 모여든 걸까? 궁금증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수십 분 만에 농민의 수는 백 단위를 넘어 천 단위, 그리고 만 단위까지 세포 분열하듯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잠깐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사색을 즐기는 동안 도로변에 버스는 이제 수십 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소들을 실은 트럭에 트랙터까지 동원되었다.

"우리에게 옥수수(식량) 보호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해 멕시코시티 레포르마 거리로 속속히 운집한 모습은 수에 압도당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농민들의 표정은 마치 소풍을 나온 듯했다. 그러면서도 노래와 구호와 피켓과 애드벌룬과 비폭력 행진으로 생존과 직결된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해 나갔다.

이번 시위의 촉매제인 옥수수 문제를 꼬집은 시위대. 멕시코의 옥수수의 가치는 우리의 쌀과 동급이다.
▲ 시위 현장 이번 시위의 촉매제인 옥수수 문제를 꼬집은 시위대. 멕시코의 옥수수의 가치는 우리의 쌀과 동급이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솜브레로를 쓴 남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다.
▲ 시위 현장 솜브레로를 쓴 남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북미FTA 그리고 식량위기

토르티야 가격이 상승했단다. 멕시코 전역에서 흔히 먹는 타코 등 주식에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옥수수 피인 토르티야가 들어간다. 최근엔 밀로도 만든다곤 하지만 밥은 쌀밥이여야 하는 것처럼 여기도 토르티야는 옥수수여야 한다. 그들의 피이자 민족적 유산인 셈이다. 이 토르티야는 원래 시장경제와 상관없이 서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강제적으로 가격을 규정한 식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식량위기로 인한 멕시코 서민경제는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경제가 가장 발전한 멕시코라 해도 한 달에 200달러조차 벌지 못한 빈곤층이 수백만 가구다. 게다가 적지 않은 가정이 성인남자는 없고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여성이 꾸려나간다. 결국 들어오는 수입은 불을 보듯 뻔한데 이들이 겨우 입에 풀칠하는 토르티야 가격의 상승은 더욱 가난의 굴레에 속박되고, 영양 불충분으로 인한 질고의 늪으로 빠져드는 이중고를 안겨준다. 이 콘크리트 같은 가격이 아무런 예고없이 급격히 인상되어 버린 것이다.

가난한 계층은 제 목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급기야 토르티야로 촉발된 문제는 다른 사안으로까지 전이돼 그들의 잠재되었던 불만적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그들의 편에서 소리를 내주는 젊은 학생과 시민 단체들이 모두 어우러져 정부를 향해 서민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정책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농민들
▲ 시위 현장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농민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각 지방마다 고유 색깔의 깃발을 높이 들고 거리행진에 참가했다.
▲ 시위 현장 각 지방마다 고유 색깔의 깃발을 높이 들고 거리행진에 참가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과연 멕시코 정부가 이 거대한 함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일지는 의문이다. 바로 북미자유협정(NAFTA)이 체결되어 이제 그 타격이 바로 최하 계급층이라 할 수 있는 공급계층의 소작농민들과 그들을 의지하는 수요계층의 서민들에 가해질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농업 생산력은 국경선을 이루는 리오그란데 강 이남으로 밀고 들어올 대량의 미국 농작물에 비해 애초 가격경쟁이 되지 않는다.

가격 수지가 맞지 않고, 일자리를 잃고, 이는 각종 생계형 범죄부터 폭동으로까지 악화될 가능성이 많은데 이는 이미 소말리아, 방글라데시, 수단, 북한, 아이티 등 세계 곳곳의 식량위기로 인한 심각한 정치문제로 비화된 전례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식량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여전히 안전성 논란중인 유전자변형식품에까지 손을 대게 되니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질 좋은 천연자원의 혜택을 선택하는 상류층 부류와의 식품환경은 상당한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게 된다.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인디오들도 집을 떠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 시위 현장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인디오들도 집을 떠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그런데도 멕시코 정부는 국민 전체의 복지를 위해 부자와 빈자의 간극을 좁히기보다는 북미자유협정으로 이익을 보게 될 일부 산업들에 손을 쓰고 있는 부자 편에 서서 정책을 추진해 나가니 힘없고 가난한 일반 서민들로선 답답한 노릇이다.

국민으로서 생존과 직결된 당연한 보호권리를 내세우는 안타까운 멕시코 농민 시위를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이다.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생각해 본다면 상식적인 정책이 나올 법한데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질 거란 예감이 들어 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모든 게 뒤섞여 버려 고유한 전통과 민족혼이 사라지고 승자독식의 폐허만이 남아버린 세계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아직 세계화에 뛰어들 준비조차 안 되어 있는 나라를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내모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이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풍요의 심리를 안겨줄까?

집회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긴 거리를 이동하는 시위대에겐 힘이 된다.
▲ 시위대 음악 집회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긴 거리를 이동하는 시위대에겐 힘이 된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절대강자의 입김 속에 돌아가는 농업체계에 이제 식량은 무기화되고, 약자는 노예화되어 간다. 이전에는 내 쌀 백 가마와 당신의 자동차 한 대를 바꾸는 필요에 의한 거래가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인류에게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쌀 한 가마는 살인적인 공격수단으로 개도국 하층민과 빈민국들을 압박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 사회에 전쟁보다 티가 안 나는 영리한 방법으로 식량 식민지화가 가속될 것이다. 자유경쟁체제의 합리성은 지금으로선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 뒤에 야만적인 어두운 그림자가 지배하는 처절한 식량 무기화와 잠재적인 식민지화가 두려울 뿐이다. 21세기 최고의 자원은 에너지도, 지식도 아닌 식량이라 감히 단언한다.

마무리하는 청소부들. 이 날 시위는 작은 충돌 하나 없이 평화롭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 시위현장 마무리하는 청소부들. 이 날 시위는 작은 충돌 하나 없이 평화롭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축제 같은 시위 현장

시위지만 역시나 라틴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시위대는 행진 중간중간 농한기 축제마냥 웃고, 떠들고, 술 한 대접씩 돌리며 돈독한 유대관계를 과시했다.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서민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합석한 젊은 친구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각 지방에서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담은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행렬하는 수 백 개의 깃발을 따라간 지 두 시간쯤, 시위대는 저녁 집회를 위해 옮기던 발길을 멈추었다. 선발대가 소깔로 광장에 닿은 듯했다. 행진은 아주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정부와의 그리고 북미자유협정으로 반사이익을 누리는 다국적 기업과의 힘겨운 전쟁이 될지 모를 일이다.

레포르마 거리에서 소깔로 광장까지 수만 명의 시위 참가자가 열을 지어 이동했다. 언론에서는 이 날 참가자를 7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 시위 현장 레포르마 거리에서 소깔로 광장까지 수만 명의 시위 참가자가 열을 지어 이동했다. 언론에서는 이 날 참가자를 7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시장개방이 과연 앞서 나가는 개혁이자 세계화일까? 약자에게는 공평한 기회의 배분이 애초에 차단되어 있는 신자유주의가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줄까? 그런데 우리나라가 체결한 FTA 협정이 멕시코와 동일한 상황에 놓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걸까?'

나는 여전히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저녁 약속이 있어 인근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멕시코 여행을 하면서 허름한 식당에서 즐겨 먹던 타코 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던 기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먹는 커피 한 잔보다도 못한 가격인데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생명의 보루였는데 말이다. 더불어 잠시 동안 해남에서 농사를 짓는 고모들 생각에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후발대 시위대가 소깔로 광장 저 멀리 사라지고 그들의 함성이 남기고 간 자리에는 얼마 간 고요함이 대신 가득 메우고 있었다.

[최근 주요기사]
☞ [국회] 협상 결렬과 동시에 질서유지권 발동, 홍준표-김형오 짜고 친 고스톱?
☞ 강만수 "원 없이 돈 써본 한 해... 역대 최대"
☞ [해외리포트] 취업 빙하기 일본, 때 아닌 '게잡이 배' 붐
☞ [현장] KBS사원들 "늦어서 죄송... 함께 투쟁해요"
☞ [엄지뉴스] 나도 가끔 남자기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 [E노트] '어륀지'에서 '찍지 마'까지... 정치권 말·말·말"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세계일주, #멕시코, #자전거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한미FTA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