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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를 든 국회의원과 쿠데타를 경고하는 국회의원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앞두고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보좌진과 당직자들이 소화전 물을 뿌리며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자 회의장 안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당 보좌진과 경위들이 분말 소화기를 뿌리며 대치를 벌이고 있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앞두고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보좌진과 당직자들이 소화전 물을 뿌리며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자 회의장 안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당 보좌진과 경위들이 분말 소화기를 뿌리며 대치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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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의 비준동의안 날치기 상정을 막기 위해 나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은 오전 8시부터 회의장에 출입시켜 줄 것을 문 밖에서 호소하였지만 묵묵부답이었고 전화통화에서 문을 열어 주겠다던 여당 간사는 10분 후 출입을 못 시키겠다고 통지하였다. 따라서 급기야 회의 개의 시각인 오후 2시에 임박해서 위원장실 문고리를 부수고 진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우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할 따름이다."

이는 민주당 문학진 의원이 19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일부다. 그는 해머로 국회 외교통상위 회의실 문을 깨뜨린 당사자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해머를 든 이유'를 밝힌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고 나서 경위야 어떻든 국민에게 험한 꼴을 보이게 된 점을 사과했다.

"군인들 시각에서 보면 저런 비능률이 없고 한심한 작태가 어디 있느냐? 저렇게 악을 쓰면서 싸우니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장군이나 그런 군인이 총 들고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얻어터질 것인가?"

이것은 손범규 한나라당 의원이 민주당 측의 행위에 대해 소감을 피력한 말이다. 그는 국회에서 날치기에 항의하여 소란(또는 난동)을 피우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꼴을 당해도 싸다는 매우 특이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우선 같은 땅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여 같은 국회의원이 된 두 사람의 의식이 마치 구름과 진흙의 차이만큼 큰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흔히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운다. 국민이 다수 의석을 주어 여당이 되었으니 의안을 표결처리하여 다수결의 선택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회의에 의원의 참석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다수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위헌이다. 이것은 국회의원의 직무를 방해하는 불법이다. 또한 국회의장에게만 있는 질서유지권을 무단 발동하여 경위를 동원한 것은 명백히 국회법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 놓고 나서 야당 의원이 회의장에 들어가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고 해서 군사 쿠데타를 운운하는 의원의 머릿속에는 대관절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의원이라면 국회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받은 권리이자 의무다. 그것이 장애를 받을 경우 문을 부수고라도 회의장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모순과 기만의 한나라당식 날치기

"아직도 길바닥 본성을 못 버렸구먼."
"데모는 길거리에 가서 해."

이것은 지난 12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10분간 국회의장석을 점거하자 한나라당 의원들 입에서 나온 야유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불과 3년 전 무려 12일간이나 의장실을 점거한 전력이 있다. 2005년 12월 9일 사학법이 의장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자 그들은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본회의장 밤샘 농성에 돌입했다.

그들은 즉각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시청광장에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도 있었고 박근혜 당 대표도 있었다. 특히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연단에 올라 "사학법을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처리할 만큼 급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학법 말고도 서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무엇이 급해서 날치기 통과시켜야 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언성을 높였다.

또한 그들은 2006년 4월 부동산 관련 법안 처리 때에는 당시 박희태 부의장 등 한나라당 의원 30명이 의장공관을 기습 점거하기도 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1년 전 그들은 BBK사건 수사 검사 탄핵안을 막으려고 본회의장 정문에 쇠사슬을 감지 않았던가.

그들은 지난 18일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 회의 시각을 야당에 오후 2시로 통보하고는 아침 일찍 자기들끼리만 몰래 회의실로 들어가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페트병에 오줌을 받아가며 8시간을 견뎠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순과 기만으로 점철된 날치기극을 연출하고도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조차도 없다. 문을 부수고라도 회의장에 들어가려고 했던 문학진 의원은 사과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더 의기양양하다.

그들은 사과는커녕 민주당을 향해 "간판만 민주당이지 하는 일은 폭주당"이라고 매도하며 "사분오열된 민주당 내 싸움을 감추고, 야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적반하장식의 공격을 하고 있다.(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 18일 현안 브리핑)

권력의 곡마단원처럼 전락한 172명의 광대들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한나라당 단독으로 한미FTA 비준 동의안이 상임위에서 상정되고 난 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한나라당 단독으로 한미FTA 비준 동의안이 상임위에서 상정되고 난 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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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회사에는 수많은 날치기들이 있었다. 1969년 박정희는 3선개헌안을 일요일 새벽 2시를 택해 국회 제3별관에서 통과시켰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 점거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는 3년 후 유신체제를 구축하여 종신 대통령제를 만들었고 이후 박정희의 비명횡사를 낳는 시발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였던 1996년 12월 31일,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의원들은 새벽에 야당 몰래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로 가서 불과 몇 분 사이에 전격적으로 노동법과 방송법을 통과시켰다. 이 날치기 여파로 민주노총이 한 달간 파업에 돌입했고 대통령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레임덕이 가속화된다. 그리고 경제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 종국에는 IMF 환란을 부르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 때에는 사학법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개정안을 국회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 참석 의원 154명 가운데 찬성 140으로 가결시켰다. 이에 한나라당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폭압적인 날치기"로 규정하고, "국회가 비열한 정략으로 얼룩져버린 최악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한나라당은 장외투쟁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노무현 정부는 큰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의하고 나중에는 사학법 양보를 종용하기도 해서 그를 지지했던 다수의 지지층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이처럼 날치기 통과는 이를 주도한 정부·여당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게다가 지금은 정권 초기가 아닌가. 정작 큰 문제는 정부 여당 내에 이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할지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통과는 날치기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날치기 통과에서 통상 빚어지는 변칙과 탈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은 명백한 날치기로 규정하고 장외 투쟁까지 벌였다.

그런 한나라당이 야당에 회의 시간을 기만하고 회의장을 봉쇄하면서 경위권까지 무단 사용한 이번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수치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선 1주년에 맞춰 보여준 '명박 본색'

이번 사태는 한미FTA 법안 조기 상정의 타당성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다른 여러 면에서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이번 일이 전적으로 한나라당의 선택이라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19일자 사설은, 한달여 전 미 FTA 분위기 탐색 차 미국에 다녀온 한나라당 의원들은 미국 측의 무관심을 감지하고는 선 비준론에 소극적으로 돌아섰고, 박진 외통위원장도 "합의가 안 돼도 일방적 상정을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는데, 최근 이명박 대통령과 박희태 대표의 조찬 회동 이후 돌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와 한나라당에 정부가 주도하는 법안의 처리를 채근하는 듯한 발언을 많이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19일 대선 승리 1주년 자축 파티에서 "한나라당이 지난 1년을 생각하면 할 말도 있지만 지금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세계일보> 보도)

이런 일은 민의의 대변기관인 의회를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한나라당은 172석의 체구에 맞지 않게 급속도로 무력화, 기회주의화되고 있다. 그들은 심하게 말해 이제 거대여당이라고 하기보다는 마치 곡마단원들처럼 느껴진다. 한나라당이 주체적 콘텐츠는 없고 피동적인 기교에만 능한 집단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제 이 대통령을 지지하고 후원했던 보수인사들마저 이 대통령의 소통 부재를 지적하고 있다. 안병직 뉴라이트 시대정신 이사장은 "정부는 보수 진영의 집결 외에도 야당과 정책 공조도 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는 이 대통령에게,  "더 넓게 끌어안는 상생, 통합, 소통을 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심지어는 이 대통령에게 거의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온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도 고언을 했다. 그는, "정부가 우파 진영만 상대하려 하지 말고 진보 진영도 인정해 진보·보수의 공존상생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문한다.(경향 보도, <미디어오늘>에서 재인용)  

대통령이 야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여당은 여당대로 정부 정책의 하수인으로 부리게 될 때 날치기 통과가 자행되는 법이다. 이것은 의회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로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경 우리의 국회를 '생산하는 의회'가 아니라 '사산(死産)하는 의회'로 전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작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날치기,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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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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