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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더이상 주거목적이 아니다.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집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화려해진다.
 집은 더이상 주거목적이 아니다.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집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화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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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자 다음블로그뉴스 4위가 "너희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런 곳에 산다"이다. 뭔 내용인가 싶어 봤더니, 분당 어느 초호화 아파트에 사는 부모들이 인근 고급 아파트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라고 한다.

얼마 전 읽은 책 내용이 떠올랐다. 재무상담을 다룬 내용인데, 24평 아파트에 사는 주부가 40평대 아파트로 옮기고 싶어 하는 대목이었다. 이유는 40평대 사는 아이가 "너희 집은 왜 이리 좁아?"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해서다.

이미 비교가 대세가 된 대한민국이다. 24평이든 40평이든 어울리는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면 불행하다 생각하다. '집은 주거목적'이라는 말은 이제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는 말처럼 뜬금없이 느껴진다.

남 따라 가기 위해선 부지런히 집을 부수고 지어야 한다. <아파트의 문화사>를 쓴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박철수 교수가 분석한 주택 나이는 영국이 141년으로 가장 길고 미국이 103년, 프랑스가 86년, 독일이 79년이다. 일본은 30년, 우리나라는 14.8년이다.

그러니 '달동네'라는 제목으로 뉴스가 나오면 어김없이 '철거', '재개발'과 같은 말이 따른다. '마지막 달동네', '몇 안 남은 달동네'와 같은 말을 보면서 인디언을 몰아내고 서부개척 마무리를 눈앞에 둔 백인들,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는 소를 눈앞에 둔 투우사를 떠올린다면 비약일까.

허니 벽화 덕분에 달동네 철거계획을 철회했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곳은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예술인도시로 유명한 경남 통영의 어느 마을. 한 시간에 12km 가는 게 고작인 16인치 자전거 스트라이다를 타고 고성을 떠나 통영으로 들어갔다.

망향비와 매립 축하 플래카드... 지우고 그리워한다

도산일주로 입구.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가한 도로. 기분이 좋다.
 도산일주로 입구.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가한 도로. 기분이 좋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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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여행 중에는 푹 잠을 자자는 생각이지만 이날은 몸이 가뿐하다. 고성 시내 가야시대 토성도 구경하고, 조선시대 성터 자리도 구경한 뒤 통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2차선 지방도를 타고 간다. 길이 한산하다. 타작을 하는 논 풍경은 나른하다. 자전거는 느리고, 공기 흐름은 조용하다. 도시와 시골은 풍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시간 빠르기도 다르다.

공학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장씨 문중에서 단 플래카드가 보인다. 그 공학박사는 아마 어느 대도시에서 자리를 잡겠지. 오랫동안 대를 이어오며 전통을 이은 작은 마을은 이렇게 인재를 대도시에 공급하며 명맥을 잇는다.

농촌인구가 넘쳤던 1960~1970년대는 그런 인재가 넘쳤겠지만, 이제는 그럴 여력도 없을 터다. 대한민국 인구 90%가 도시에 살고 있다지 않은가. 이런 플래카드에서 마지막 존재감을 내보이고자 하는 시골마을의 몸부림을 읽는다.

고성 경계를 지나 통영에 들어서자 맞이하는 것은 망향비와 '인정·덕포산업단지 공유수면매립 기본계획 반영 확정'이라는 플래카드다. 플래카드는 개발로 얻게 되는 이익을, 망향탑은 개발로 사라지는 인정을 담았다. 길 한쪽에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망향비보다는 길 가운데 높이 걸린 플래카드가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벽방산 어머니 품속 포근함은 그대론데
양팔로 감싸안은 문전옥답 어디 갔노

오곡이 탐스럽던 가을풍경 언제 보며
구수한 생선맛에 탁주일배 나누던 정도
문명세상 덩치속에 추억속으로 묻었구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픈마음 어찌하며
그리운 옛 정치를 머릿속에 새겨둔채
보고픈 이웃사촌 옛모습 찾아질까

뒷동산 잔디밭의 반기던 꽃들 어디갔노
아릿아릿 가슴속에 그림으로 남겨두네

- 망향가. 향인 김홍득 작사

이것이 무엇일까. 가리비 묶음이다. 굴 양식에 쓰인단다.
 이것이 무엇일까. 가리비 묶음이다. 굴 양식에 쓰인단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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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상에 젖는 것도 잠깐, 표지판은 지방도를 떠나 국도로 가라고 가리킨다. 77번 국도다. 통영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14번 국도다.

갈림길을 빠져나오니 4차선 길이다. 제한속도가 시속 80km. 차들이 달리는 속도를 보니 시속 100km는 돼 보인다. 지금껏 설렁설렁 달려왔는데, 저 야수와 같은 것들이 우글대는 속으로 들어가기가 싫다. 샛길이 없을까. 주변을 한참 동안 어슬렁거려도, 도통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 작고 가냘픈 초식동물을 데리고 저 육식동물만 우글대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 눈이 번쩍였다. 국도를 따라 조금만 달리면 한적한 길이 나타난다. 그래 조금만 참자. 굴욕은 잠시다. 아니나 다를까 도산일주로가 나온다.

차선도 없는 작은 길이다. 이제 제 길에 들어온 것 같다.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니 어느새 2차선길로 바뀐다. 길 이름은 지방도 1021번. 바다를 끼고 달리는 운치 있는 길이다.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며 달리는데, 아주 희한한 게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서 살피니 가래비 묶음이다. 엽전 꾸러미 같다고 느꼈다. 굴을 양식하는 데 쓰인단다.

전세 낸 것처럼 한가한 길을 달리다 보니 이내 포구가 보인다. 통영이다. 도로에 도열한 열대 가로수가 남국 어디에 온 것처럼 색다르다. 아주 가파른 길. 이 길에서 달리면 시속 45~50km 정도는 그냥 나온다. 16인치 자전거로 느끼게 되는 시속 45~50km는 공포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톡톡히 겪었다. 조심조심 제동을 걸면서 내려갔다.

해안선 616km, 섬은 151개... 해저터널 지나 미륵도에 가다

해저터널. 자전거를 타고 통영 육지쪽에서 미륵도로 건너갈 수 있다.
 해저터널. 자전거를 타고 통영 육지쪽에서 미륵도로 건너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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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터널 근처 동네. 통영엔 일제강점기 때 지은 집들이 군데군데 있다.
 해저터널 근처 동네. 통영엔 일제강점기 때 지은 집들이 군데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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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경상남도에서 해안선이 가장 긴 도시다. 무려 616km나 된다. 섬이 151개나 되니 이리 긴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그 많은 섬 중 갈 만한 곳이 미륵도 해안도로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해저터널이 통영 육지쪽과 미륵도를 연결한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못 다녀도 사람과 자전거는 다닐 수 있는 곳이 해저터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저터널을 닦았을까 궁금했다. 그것도 100여 년 전에 말이다. 해저터널에 들어가면 그 비밀이 풀린다. 사진이 설명한다. 우선 둑을 쌓아 양쪽 물을 빼낸다. 맨바닥이 드러나면 구조물을 만든다. 콘크리트가 모두 마르면 양쪽 둑을 터 다시 물이 흐르게 한다.

미륵도 바닷가에서 회맛을 보다.
 미륵도 바닷가에서 회맛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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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도 주변에도 섬이 가득하다. 하긴 150여 개에 이르는 섬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래서 미륵도 주변 바다는 수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은 잔잔하다.

산과 바다가 잘 조화를 이뤘다. 아쉬운 점은 갓길이 거의 없다는 점. 한밤에 미륵도를 돌았는데, 자동차가 다가올 때마다 피할 곳이 없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함께 간 형은 언덕이 너무 많아 입에 거품을 물었다. 작은 섬이지만 섬 최고봉이 해발 461m나 된다. "자전거 여행"이 싫다며 원망이 가득하다.

미륵도 동쪽 일부분에는 자전거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가 바다 바로 옆에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보는 바다 경치가 꽤 괜찮다. 자전거를 빌려준다. 전용도로 길이가 대략 2.2km 정도다. 전용도로 옆 산은 종현산(마파산)이다.

미륵도 일주가 거의 끝나가는 가운데 회시장이 나타난다. 바다에 왔는데 회맛을 안 볼 수 없다. 시장에서 한 마리를 떠서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닷바람이 싸늘하다. 둘은 반팔 차림. 부들부들 떨던 형이 비닐로 팔을 감싼다.

구멍가게? 아니죠. 통영서 제일 전망 좋은 태인카페죠

통영에 가면 동피랑(동쪽+벼랑)에 꼭 가볼 일이다. 달동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엿볼 수 있다.

'달동네'란 말은 신조어다. 산동네, 빈민가 같은 말로 불렸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 TBC와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달동네>가 원조다. 서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본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달'이라는 이미지를 붙였다.

예로부터 달을 좋아하던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시성 이태백이 달을 따러 들어갔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술 잔 속에 달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달은 낭만을 상징한다. 그런 낭만을 가난하고 마음 따뜻한 그네들에게 바쳤다.

당시 드라마엔 세무서에서 과장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김과장(이낙훈)·강부자 부부와 함께 여러 인물들이 나왔다. 특히 세입자 마영달(추송웅)·서승현 부부네 딸 똑순이(김민희) 인기는 대단했다.

신혼부부로 노주현·이미숙이 나왔고, 장미희는 식모로 나왔다. 가전제품 수리공인 김인문은 20살이나 어린 양양순(장미희)를 사랑했다. 양순이가 식모살이하는 집 앞에서 밤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틀었다. 양순은 권투선수를 사랑했고, 권투선수는 사모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당시 '창밖의 여자'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80년 통폐합 이전까지 <동아일보>가 운영하던 라디오 방송국 DBS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가 '창밖의 여자'. 1980년 TBC 가요대상에서 드라마 주제가상 수상. 가요톱텐에서 7주가량 1위를 차지했다.

<달동네>에서 시작한 달동네 드라마는 <사랑과 야망>, <서울의 달>을 거치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는 옛일이 돼 버렸다. 동피랑 방문은 사라지고 철거돼야 할 달동네가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동피랑 마을. 달동네 마을은 벽화가 그려지면서 통영 명소가 됐다.
 동피랑 마을. 달동네 마을은 벽화가 그려지면서 통영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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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
 동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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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구비 산길을 따라 가다 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헉',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마을 가득한 그림은 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곳이 그곳임을 알게 해준다.

"커피 한 잔에 500원, 라면 1000원, 아이스케끼 700원."

누가 봐도 구멍가게인데, 벽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인 카페'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림 하나하나에 감탄하면서 산책을 시작했다. "벽화 관람 시 주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붕에 올라가거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일은 삼가하여 주셔요. 특히 사진을 촬영하실 때에는 가급적 주민들의 양해를 구한 뒤 촬영해 달라"고 돼 있다. 당연한 요구다.

헤엄치는 물고기, 기타 치는 아가씨, 꽃, 공룡…. 그림이 골고루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마을을 둘러보니, 어르신 한 분이 "저 밑에 자전거 누가 가져가면 어떡해요. 요즘 외지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요 앞에 집 마당에 넣어 놓아요"라면서 말한다. 인정이 듬뿍 묻어난다.

동피랑 마을은 누각인 '동포루'를 세우면서 모두 철거할 계획이었다. 낡은 마을이니 요즘 세태를 보면 철거해도 무리가 없는 상태였다. 지역 단체인 푸른통영21은 달랐다. 지난해 10월 '달동네도 가꾸면 아름다워질 수 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다.

전국 미대 재학생들과 개인 등 18개 팀이 참여해 골목 곳곳에 통영시를 상징하는 벽화를 그려넣었다. 마을 주민 동의를 일일이 받으면서 한 작업이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통영시청은 마을 철거계획 방침을 바꿨다. 기존 꼭대기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세 동만 없애고 나머지 마을은 놔두기로 결정했다. 집을 내놓은 사람이 생기면 화가나 기능인을 입주시켜 예술인 마을로 만든다는 복안도 세웠다.

시청 관계자는 "벽화가 계획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여론도 마을 보존 쪽이었다. 지역 예술인 서너 명 정도가 동피랑에서 살겠다는 뜻을 시청에 전달했다.

태인카페 주인인 백태기씨.
 태인카페 주인인 백태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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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 태인카페에 들어갔다. 컵라면을 시키니 멸치반찬이 나온다. 방 안에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들어섰다,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됐다. 주인어르신 성함은 백태기. 올해 일흔 셋이다.

고향이 경남 고성인 어르신은 군대를 제대하고 취직하면서 통영에 살기 시작했다. 지난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0대 때는 마을에 성이 있었다는 얘기도 하셨다. 물론 지금은 없다. 그때만 해도 동피랑 마을은 모두 초가였다고.

가게가 생긴 것은 10여 년 전. 가게가 나기 전까지 마을은 자동차도 못 다닐 정도로 길이 좁았다. 10여 년 전 길을 넓히면서 자동차가 다닐 길이 생겼다. 세월과 무관한 듯한 마을도 변화를 겪었다는 뜻이다.

문은 언제 열고 닫는지 물었다. 어르신이 '허허' 웃으시며, "대중없다"고 한다.

"커튼 치면 닫는 시간이고, 커튼 열면 여는 시간이지. 누가 문 두드리면 물건 파는 것이고."

모두 낡은 집들인데, 왜 새집을 짓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르신은 내가 궁금한 게 뭔지 다 안다. 이 동네 사람들 보기엔 이리 보여도 다 어느 정도는 산단다. 자식들 대학도 다 보냈다고. "대학 보낼 정도면 사는 것 아이가." 어르신 말씀이다. 집값이 안 오르니까 새집을 짓지 않는다고. 지금도 괜찮은데 굳이 집값 올리려고 새집 지을 필요가 없다는 어르신.

통영에선 꼭 섬을 둘러보란다. 시골 사랑방처럼 가게 안이 편안하다. 어르신 말씀도 구수하고, 말씀이 불러내는 추억도 훈훈하다. '구멍가게'가 아닌 '태인카페'에서 그렇게 밤이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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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7년, 2008년 10월, 11월 다녀왔습니다.



태그:#77번국도, #통영, #동피랑, #자전거,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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