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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폭력의 역사>에서 미국 중산층 가정에 내재된 폭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캐나다 출신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신작 <이스턴 프라미스(Eastern Promises)>가 올 12월 1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음산한 비가 내리고 있는 런던의 한 거리 허름한 이발소 안에서 벌어지는 살해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좀처럼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근래에 보기 드문 스릴러물이자, 미국 마피아에게만 익숙해진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러시안 마피아들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느와르물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관객의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크로넨버그의 연출력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나 마틴 스콜세스의 <택시 드라이버>에 등장하는 폭력씬을 넘어 기이하달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파괴력의 전율을 안겨준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놓치면 안 되는 장면은 동유럽에서 암약하는 실존 마피아 '보리 V 자콘' 조직의 운전수 역을 맡은 니콜라이(비고 모텐슨)가 대중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첸첸파의 조직원들과 사투를 벌이는 연속장면인데, 이는 가히 폭력 묘사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기에 죽인다는 비정함을 비정하게 묘사한 이 시퀀스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의 고압적 하드보일드보다 더 지독하다.

14세가 소녀가 죽으면서 남긴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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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한 병원에서 조산을 돕는 간호사로 일하는 안나(나오미 왓츠)는 어느 날 밤 14세의 소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얼마 전 애인의 아이를 유산한 적 있는 안나는 팔에 마약주사 자국 투성이인 채로 소녀가 죽기 전에 낳은 신생아에게 맹목적인 연민을 느낀다. 소녀가 가방 속에 남겨둔 일기장 안에 메모해둔 장소를 찾아간 안나는 거기서 니콜라이를 만난다.

리무진 운전수로 니콜라이를 고용한 사람은 호화 레스토랑의 주인인 세미온(아민 뮬러-스탈)이다. 온화하고 예의 바른 인상의 세미온은 안나와 우연히 만나 문제의 일기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이때 안나는 부지불식간에 동유럽 최대의 범죄 조직을 이끄는 보스의 엄청난 핵심 비밀에 관여하게 된다.

강렬한 시각 연출과 더불어 강렬한 윤리 의식 돋보이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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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이 영화는 모든 문제를 살인으로 풀어버리는 마피아들의 무자비한 범죄 행각과, 더 나은 삶이 가능하리라 믿고 유럽을 찾아왔지만 결국 마약에 강제적으로 중독된 성노리개로 짧은 삶을 견디다가 싸늘한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두는 러시아 소녀의 하나뿐인 피붙이를 돌보려는 안나의 위태로운 노력이 불길하게 대립한다. 이는 사실 불가능한 대결이기에 지켜보는 관객은 긴장 안 할 도리가 없다. 영화가 종국을 향해 느릿하게 진행될수록 안나의 관점으로 사태를 지켜보게 되는 관객은 내가 만일 안나의 자리에 있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윤리적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듯한 빈틈 없는 스토리, 군더더기 없는 카메라 워크, 배우들의 선 굵은 연기 등 여러 장점을 갖추고 있는 <이스턴 프라미스>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도 높은 범죄스릴러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명의 존엄성'이란 윤리적 화두를 강렬한 화법으로 제시하는 이 영화 속의 장치는 폭력적 남성들 안에 갇힌 안나란 주변부 여성이다.

그렇다고 안나가 휴머니즘를 표방하는 영화에 뻔질나게 등장하는 상투적인 성녀나 투사는 아니다. 그니는 다만 유산을 경험한 뒤의 상처를 통해 죽은 소녀와 우연히 연결되었을 뿐이다. 마침내 일기장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 그니가 마피아 수장의 거처를 찾아가서 진실을 소리칠 수 있는 저력은 그런 안나 내면의 아픔에서 나온 것이다. 암담한 절망의 대도시 런던 암흑가에서 지펴진 작은 희망은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의 상처를 자양분 삼아 싹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봉 : 2008.12.11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수입/배급 : 마스 엔터테인먼트
데이빗 크로넨버그 러시아 마피아 이스턴 프라미스 비고 모텐슨 나오미 왓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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