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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생들은 혜원의 그림을 통하여 그가 다만 화류항리(花柳巷裡)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로밖에 보지 않았을는지 모르나, 그렇게 속단하기에는 혜원의 작품의 예술적 향기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유탕(遊蕩)을 일삼는 배(輩)에게 예술이 창조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혜원의 예술의 심각한 묘사를 통하여 그를 범속한 탕자로 속단하는 오류를 넉넉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신윤복 <미인도>
 신윤복 <미인도>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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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학, 영화, TV 드라마에서 동시에 뜨고 있는 주제(테마)가 혜원 신윤복이다. 이전에도 토정 이지함, 정약용, 황진이, 이순신, 정조 대왕 같은 역사속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재조명되는 현상이 유행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에 혜원 신윤복의 느닷없는 등장이 그리 새삼스럽진 않다.

다만, 기존의 패턴과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정치 쟁점이나 문화 담론으로까지 확대될 만한 요소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컨대 정약용, 이순신, 정조 대왕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첨예한 정치 쟁점을 낳았지만 소위 '신윤복 코드'로 불리는 일련의 흐름 속엔 별다른 갈등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최근 지만원씨가 좌파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70년대 반공 초등학생의 글을 보는 듯하다"는 진중권씨의 논평으로 충분해 보인다. 단지 영화, 드라마 주인공이 좌파라서 (실제로 좌파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 신윤복 코드를 좌파 음모론으로 해석한다면 그 의식의 이면에 "좌파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극단적 배제론이 깔려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아무튼 최근 유행하는 신윤복 코드를 첨예한 정치 쟁점이나 거대 담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신윤복에 대한 사료(史料)의 희소성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해 또 하나의 상업적 성공을 낳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맞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배경을 좀더 뒤적이다 보면 "미스터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현실 사이의 함수관계" 같은 뻔한 도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용준이 바라보는 신윤복

한국수필의 고전으로 불리는 김용준의 <근원수필>에도 신윤복과 김홍도에 관한 글이 나온다. 그 자신이 중학생 신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을 만큼 재능 있는 화가이기 때문이었을까? 신윤복과 김홍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전문가다운 진지함과 예리함이 묻어난다.

파격적인 화풍에다 사료(史料)에 남아 있는 기록이라곤 "선풍속화(善風俗畵)" 네 글자가 전부였던 신윤복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갔다. 김용준처럼 신윤복의 진가를 꿰뚫어보고 높이 평가한 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화류항리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 취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용준이 술회했듯이 화류항리에 출입하는 일개 탕자 취급하기엔 신윤복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술적 향기가 지나치게 높다. 특히 이 대목은 김용준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김용준이 혜원의 작품세계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필 한 편이 그 자체로 신윤복론, 김홍도론을 대신할 정도의 전문적 식견을 담고 있어 일부만 발췌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아래 발췌한 내용만으로도 혜원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혜원은 풍속화 외에 산수에도 능한 듯하였으나 주로 풍속화에 전심하였고, 그 취재 내용은 극히 평민적이고 자유주의적이어서 시정항간(市井巷間)의 하층사회와 기방정취(妓房情趣)를 잘 묘사하였고, 그 필의(筆意)가 완미(婉媚)하여 다소 염정적(艶情的)인 일면과 해학조를 가미하면서 자유자재 당시의 사회상을 묘파하는 등 실로 조선 인물화계의 제일인자일 것이다. 혹 전문가의 간(間)에서는 혜원에게서 기운 높은 작품을 찾을 수 없다 하나, 과도히 엄격한 도학자적 견지에서 떠나 한층 더 낭만적인 예술적 견지에서 혜원을 볼 때, 당시와 같은 무서운 존유세력(尊儒勢力) 하에 있는 작가로서, 더구나 인물화라면 신선도란 방정식밖에 없고 모든 산수점경(山水點景)에까지 당의(唐衣)만을 입힐 줄 알던 당시의 작가로서, 단연 그들의 존유사상을 일축하고 현실에서 보는 의상과 현실에서 보는 풍속과 동작과 배경과 심지어는 일초일목(一草一木)에 이르기까지 조석(朝夕)으로 대하고 친(親)하는 눈앞의 현실을 그렸다는 것이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이요, 가장 혁명적 정신이 풍부한 작가라 추대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무서운 존유세력"이 지배하던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하층민(서민, 기생 등)의 다양한 삶, 표정, 몸짓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심지어 춘화도까지). 사료 속에서 신윤복을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이유를 대략 알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신윤복의 정체를 둘러싼 가설들, 그중에서도 남장여자설은 존유세력에 의한 소외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사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윤복이 존유세력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었다거나 그가 남장여자일 리 없다는 생각 역시 근거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기록이 새롭게 발굴되지 않는 이상 이런 의문들이 쉽게 풀리진 않을 것 같다.

김홍도 <벼타작>
 김홍도 <벼타작>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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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천재의 만남

이쯤에서 신윤복과 김홍도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 속 이들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극적 재미를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물론 김홍도(1745~?)와 신윤복(1758~?)의 화풍과 서체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료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와 (자의든 타의든)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신윤복은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데, 영화평론가 문학산씨는 조선 예술의 집대성이자 주류세력인 김홍도가 오른손잡이 화가를 대표한다면 주류에 편입되기보다 담 밖의 세계를 지향한 신윤복은 왼손잡이 화가를 대표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용준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혜원의 선(線)이 섬세하고 우미(優美)하고 유창하다면, 단원의 선은 간경(簡勁)하고 고졸하고 웅건한 맛이 있다. (....) 혜원이 시정과 촌락의 간아(간雅)한 장면을 묘사하는 동안에, 단원은 괭이를 든 농부와 밭 가는 소와 왁살스런 머슴들과 소를 타고 가는 농가 부녀와 경상도풍의 무지스런 농악의 장면과 씨름판, 엿장사, 대장간 등 자못 수선스런 장면을 사양함이 없이 닥치는 대로 묘파한다. - 김용준, 수필 '조선시대의 인물화' 중에서

공교롭게도 혜원이 섬세하고 우미하다면 단원은 고졸(古拙)하고 웅건한 맛이 있다는 대목은 드라마, 영화 속 인물 설정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더욱 남장여자설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의 만남을 사료(史料) 속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성이 뚜렷한 두 천재의 만남은 언제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고갱과 고흐, 괴테와 베토벤, 랭보와 베를렌느의 경우처럼.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이들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만약 신윤복과 김홍도가 친분을 나누었다면 그들의 운명도 불행한 천재들의 전철을 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우정을 지켜 행복한 전례를 남겼을까? 어쩌면 우리가 진짜 궁금히 여겨야 할 대목은 신윤복이 남자냐 여자냐 남장여자냐 같은 말초적인 문제가 아니라 김홍도와 신윤복의 만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재와 천재의 만남에 얽힌 비밀을 풀어줄 열쇠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래저래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물들이다.


김용준 수필선집

김용준 지음, 김진희 엮음,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2017)


태그:#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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