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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비앙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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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일명 ‘나쁜 남자’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거칠고 무뚝뚝하지만, 강한 육체와 더불어 열정적인 내면까지 지닌 그들의 모습에서 여자들은 수컷 본연으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의 장편소설〈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는 이런 나쁜 남자가 등장한다. 필립 말로(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와 같은 전형적인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그의 이름은 바로 ‘리 앤더슨’이다. 어떤 사람이냐고? 이를테면 그는 여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놓고선 이렇게 말해버리는 사람이다.

"미안해. 미처 에티켓을 배울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79쪽)

형 친구의 소개로 벅튼(미국 남부에 위치한 상상의 도시)에서 작은 서점을 관리하게 된 그는 특유의 거친 남성미를 발휘해 지역 토박이 십대 여성들(주디, 지키)과 은밀한 관계를 갖는다. 또한 십대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담배, 술을 제공하며 방탕한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비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하게 된다. 리 앤더슨, 그런 그가 본연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부유한 가문의 애스퀴스 자매(진, 루)를 만나면서부터다.

프랑스 문단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

프랑스 작가인 보리스 비앙이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쓴 이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의 누아르 소설은 출판사 사장인 장 달뤼앵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장은 보리스에게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을 선정해 번역해 달라는 제안을 했고, 이에 보리스 비앙은 버넌 설리반이라는 미국 작가의 소설을 번역해 문단에 공개했다. 하지만 버넌 설리반과 보리스 비앙은 동일인물이었다. 창작 욕구 때문에 결국 번역이 아니라 스스로 창작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죽음과 충동, 에로티즘, 폭력과 환상으로 가득한 그의 소설은 사르트르, 카뮈를 뛰어넘으며 50만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그 와중에 논란도 겪어야 했다. 내용이 불온하다고 여긴 우익단체가 그의 작품이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고소한 것이다.

또한 출간된 이듬해인 1947년에 벌어진 살인사건 또한 그를 괴롭혔다. 싸구려 호텔에서 애인을 목 졸라 살해한 남자의 소지품에서 그의 소설책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극중 주인공이 여자를 살해하는 장면에 밑줄을 그어놓은 상태였다. 당시 이 사건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물론 그 덕분에 보리스 비앙의 책은 높은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었다.

흑백 갈등, 분노에 찬 흑인 청년의 복수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역시 미국 내 흑인 공동체의 결단력과 힘은 놀라웠다는 것이다.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그들은 하나로 뭉쳐 오바마의 대선 활동을 지지하고 도왔다. 그렇기 때문에 당선이 결정되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킹 목사의 연설을 떠올리는 흑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이는 곧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받아온 차별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은근하게 존재하는 흑백 차별에 그들은 하나로 뭉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인이지만 혼혈 혈통으로 인해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갖고 태어난 리 앤더슨(얼핏 보면 백인처럼 보인다고 묘사되어 있다)의 내면은 복수심으로 가득하다. 백인 여자친구를 사랑했다가 부당하게 살해당한 동생 때문이다. 그는 복수하겠다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욕망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수컷이다.

그의 목표물은 지방 도시에서 유흥을 즐기는 가벼운 십대들이 아니다. 때문에 그가 아이들과 방탕하게 즐기는 초반부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리고 난 뒤, 진짜 목표물을 독자들 두 눈 앞으로 배치한다. 남부 부유한 가문의 애스퀴스 자매가 그들이다. 부유한 백인인데다 흑인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그들은 그야말로 리 앤더슨의 희생양으로 적합한 대상이었다.

물론 동생을 죽인 백인과 이들 사이에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부유한 백인이라는 사실뿐이다. 뜨겁게 타올라 복수의 희생양을 찾는 그에게 그런 논리적인 연관성 따위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인내해온 차별에 대한 억압과 공포는 그를 더 없이 불안하고 충동적인 수컷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외모(육체)의 힘을 이용해 자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성적으로 농락한 후에 잔인하게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인공 리 앤더슨은 시종일관 백인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일에 집중한다. 어떻게든 그녀들의 옷을 벗겨 자신의 물건을 집어넣는 게 절반인 내용 탓에 이 소설의 주제를 자칫 성적으로만 해석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관계 후에 몸에 밴 냄새를 없애려 하는 장면이나 절규하는 여자를 보며 사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여자 자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흑인인 주인공이 백인처럼 보인다는 설정 때문이다. 그는 내면으로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백인인 척 행세하며 스스로 파멸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그는 감정도 갖지 않은 채 여자와 관계를 갖고, 십대에게 술과 담배를 제공한다. 또한 고상한 가문의 자매를 성적으로 농락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 소설의 강렬하다 못해 눈까지 부시는 결말은 이런 주인공 리 앤더슨의 파괴적이면서 불안한 내면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보리스 비앙의 소설은 반항적이면서 거칠고, 불안정하면서도 불온하다. 유혈이 낭자한데다 죽음과 섹스, 폭력, 분노, 복수로 가득한 내용이니 확실히 따뜻하고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독자 또한 젊은 층에서 지지를 받기가 더 쉬웠던 모양이다. 출판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사후(그는 자신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8혁명 때에 그의 작품은 젊은 층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내에서도 종종 문제가 되는 사안이어서 남 일 같지 않았던 것일까. 작가는 미국의 인종 차별과 편견, 소외의 문제를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그 분노를 결코 감추지 않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이 그래서 더 빛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었는데도 교수형에 처했다. 검둥이였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그의 성기가 바지 밑에서 불룩 솟아 있었다. (226쪽)

그의 성기는 다름 아닌 차별의 높은 장벽을 향하고 있다. 그건 일종의 복수였고 분노였으며, 멈출 수 없는 젊음의 끊임없는 충동이었다. 인고의 세월에 대한, 안에서부터 뜨겁게 흘러나오는 검은 눈물이었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뿔(웅진)(2008)


태그:#누아르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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