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등산을 즐기면서부터 산서를 자연스럽게 많이 읽게 되었고, 또 지도를 보는 재미를 붙이게 된다. 어느 곳을 여행하기 전, 먼저 산행지도나 특정 지역 관광안내도를 먼저 보게 된다. 지도를 볼 때, 산행을 하기 전, 혹은 그 지역을 여행하기 전 낯선 지역과 산을 상상하며 마음이 앞서 설렌다. 실제 가서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며 산정과 골짜기 등 실낱같은 등고선을 따라 마음 설레며 지도를 바라보는 재미 또한 크다.

 

마음은 벌써 지도상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 이번에 찾기로 한 산은 경주 토함산이다. 경주 관광안내도를 펼쳐놓고 보니, 경주는 지역 전체가 살아 있는 문화유적지요 박물관이다. 경주 평야 곳곳마다 펼쳐진 문화유적지와 유물 등, 1천년에 가까운 신라왕국(정확히 992년)이 꽃핀 곳임을 실감한다. 지도상 경주 토함산을 봤다. 붉고 굵은 글씨로 석굴암과 불국사가 있다. 그 사이로 노란 실처럼 난 길 위에 작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경주 동쪽을 둘러싼 토함산(높이 745미터)은 경주지역에서 가장 큰 산이다. 신라시대에는 동악이라 했다. 호국 진산으로 신성시돼 온 산이지만, 불국사와 석굴암이 산에 있어 그런지 토함산 자체는 별로 빛을 못본다는 느낌이다. 이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문화가 꽃피었던 경주, 토함산으로 가는 길이다. 선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을 땐 더 간단하고 단순할수록 좋은 법, 언제가 그랬듯이 우린 산으로 간다.

 

토함산 가는 길

 

'밤 골짜기의 물소리

구름이 밝혀든 초롱을

아아 동해 너머로 둥둥 떠가는 진보라빛

환한 봉우리 하나'

-박목월 시, <토함산>-

 

11월 23일(토), 날씨는 아주 맑음이다. 씻은 듯 쾌청한 날씨가 먼 산들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늘은 뽀드득 씻은 듯 청순한 얼굴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양산 IC를 지나면서 영축산, 가지산 능선이 가까운 듯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경주 남산이 멀리 조망된다. 경주 IC는 여느 IC와 달리 기와를 이고 있어 과연 세계문화유산 도시임을 엿보게 한다.

 

경주 IC에서 직원에게  불국사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묻는다. '직진하시다가 두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세요'라고 외운 것처럼 앵무새처럼 일러준다. 경주 IC를 지나 500미터 앞 관광정보센터에 잠시 들러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경주에 처음인데 하루 일정으로 어디를 보면 좋을지 묻는다. 추천해 준 곳은 안압지와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등이었다. 11시 30분, 불국사 주차장에서 토함산 등산을 위해 출발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관광버스와 자동차들이 불국사 주차장을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메우고 있다. 불국사 주차장은 무료주차장이다. 주차장 바로 위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한 벚나무들에 둘러싸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있거나 나무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젊은 아가씨들도 보인다. 공원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여기저기 먹거리를 판매하는 노점들이 길게 줄을 잇고 있다.

 

불국사 정문 앞(11:35)에는 주차관리요원 두 사람이 차량을 관리하고 있고 불국사 정문 앞에도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버티고 서 있다. 혹시나 관람료 없이 무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지키는 사람들인 듯하다. 입장료는 4000원, 적은 금액이 아니다. 우리는 불국사 정문 옆,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넓고 쾌적한 만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넓고 좋은 길이다. 부모와 함께 걷는 어린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학교, 혹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걸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늦가을 정취가 물씬, 단풍나무 길

 

발밑에는 마른 단풍잎이 깔려 있고, 머리 위에는 형형색색으로 절정을 이룬 단풍잎들이 눈길을 끈다. 여긴 아직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넓은 산책로 같은 단풍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길도 넓고 호젓해서 마음이 절로 넓어지는 것 같다. 이 단풍나무 길은 가운데는 돌길이고 양 옆은 흙길이다. 오동약수터까지 약 1.5킬로미터 구간에 조성된 단풍나무 길은 30여 년 전 향토를 지키는 불국청년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직접 만든 길이라 한다.

 

 

온통 단풍나무다. 유치환 시비 옆을 지난다. 이상하다. 왜 유치환시비가 여기 있을까. 그의 고향은 통영(거제)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시비 옆에 가서 자세히 보니 유치환 시인이 쓴 '석굴암대불'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순전히 그의 시 때문이었다. '목놓아 터뜨리고/깊은 통곡을 견디고/내 여기 한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유치환, '석굴암대불' 일부)

 

아직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단풍이 생생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쾌적하다. 제법 올라갔을까. 쉼터에 앉아 잠시 휴식, 이젠 얼음물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다음부터는 따뜻한 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변해간다. 단풍나무 길을 지나 산을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이 더욱 차게 느껴진다. 점점 붉은 단풍은 보이지 않고 헐벗고 서 있는 나무들과 발밑에 깔린 마른 낙엽들이 지천이다.

 

 

바람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잠시 쉴 때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가 오싹하다. 석굴암주차장에 이르기까지 길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 석굴암주차장에 도착, 12시 40분이다. 바로 밑 주차장에는 많은 차량들, 사람들이 보인다. 토함산 가는 길옆엔 석굴암 정문이 있다. 정문 오른쪽 옆에는 석굴암 매표소가 있다. 멀리 동해바다가 보인다. 석굴암 정문 바로 맞은편에는 매년 초 새해 해맞이 행사를 열며 타종하는 통일대종이 있다.

 

석굴암 정문 옆, 매표소 뒤쪽으로 토함산 등산로가 나 있다. 토함산 표시판도 보이지 않는다. 등산로에 들어서니 바람 소리 크다. 완전 겨울 날씨다. 불국사 주차장에서부터 올라오던 단풍나무 길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두툼하게 옷을 입고 왔건만 혹시나 해서 배낭에 챙겨 넣어 온 두툼한 파카조끼를 꺼내 등산복 위에 겹쳐 입었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목 위까지 지퍼를 올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올라간다.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만 크게 들려온다.

 

겨울로 가고 있는 길, 낙엽을 밟으며 걷다

 

등산로는 흙길이다. 발밑에 깔린 마른 낙엽들과 작은 오솔길 양쪽 가에 선 앙상한 나무들, 그 사이로 바람소리 을씨년스럽다. 제법 높이 올라온 것일까. 귓가에 들리는 건 바람소리뿐이고 길은 한적하다. 이따금 마주 오는 산객들과 스쳐 지나간다. 모두들 두꺼운 파카점퍼에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가는 모습이다. 추령 갈림길(1:10)을 지나 헬기장에 도착한다. 여긴 바람이 드높다. 가을엔 제법 물결치며 출렁였을 억새가 무성한 곳이다.

 

여긴 겨울이다. 옷을 두툼하게 입고도 전혀 땀이 나질 않는다. 헬기장을 지나자 곧 토함산 정상표시석이 보인다. 토함산 정상(745미터)(1:15)에서 내려다보는 첩첩으로 에워 싼 주변 산들과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는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별이 잘 안된다. 경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 올라온 산객들이 눈에 띈다. 정상 주변 낙엽 깔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점심도시락을 먹는다. 식사 후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잔은 이렇게 추운 날엔 적격이다. 점심식사 후 하산한다. 1시 55분이다.

 

 

왔던 길을 버리고 그 반대편으로 난 코오롱호텔 뒷길 방향으로 간다. 여기 길에서 길로 발길 닿는 곳 모두 가 보지 않은 길이다. 이 길은 어떤 길일까 궁금하다. 올라왔던 길과는 달리 좁은 흙길에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낙엽길이 도처에 있다. 좁은 오솔길에 깔린 마른 낙엽들은 밟고 지나갈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낸다. 계속 이어지는 길 위에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뿐이다. 홀로 왔다면 그리운 이에게 낙엽 엽서라도 띄우고 싶은 그런 길이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시, '가을 엽서'-

 

이 길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인 듯하다. 아무 전망도 없는 계속 내리막 오솔길이라 지루할 수도 있겠으나 다행스럽게도 낙엽이 깔려 있어 걷는 길이 호젓하고 좋다. 머릿속은 맑아지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혹 내 마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있었다면 이 길 걷는 순간은 나무가 마른 낙엽을 떨구듯 그렇게 내려놓았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낙엽처럼 가벼웠다. 계속 낙엽 밟으며, 낙엽 밟히는 소리 들으며 내려간다.

 

우리도 언젠가 낙엽이 되리

 

앙상한 나무들 사이, 바람소리마저 낙엽 소리와 하나 된 듯 어우러져 한 호흡처럼 연주를 한다. 흙길 위에 수북이 깔린 낙엽 밟는 소리만이 인적 드문 하산 길 가득 번진다. 등산 초입엔 단풍이 화려하더니 하산 길은 헛헛한 바람 불고 떨어져 누운 메마른 낙엽들은 나를 가르치는 듯하다. 낙엽... 그것은 한때는 어린 새싹이었다. 그것은 또 한때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의 푸르름, 여름날의 싱그러움, 그 청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또 한때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생의 완숙함과 충만함,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찬란한 빛의 단풍이었다. 지금은 낙엽이 되어 흙과 가장 가까이 밀착해 있다. 우리 인간처럼 죽음을 부인하고 반항하고, 합의하고 체념하면서 시인하고 가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잎새 시들어 떨어져 누워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것 또한 우리 인생과 같음을 가르치는 시간...

 

하산 길엔 계속 우리만 걷고 있다. 낙엽 밟는 소리만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함께 크게 들릴 뿐이다. 푹푹 빠지는 낙엽 길에 눕고 싶다. 하지만 길은 갈수록 위태롭다. 이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것 같다. 석굴암 가는 길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방치되다시피 된 길은 함부로 나 있는 데다가 곳곳마다 '추락위험'이란 표시가 붙은 비탈이 도사리고 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곳도 보인다.

 

 
길은 좁고 가파른 데다 위험지역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느낌이 없어서 좋긴 하다. 무엇보다 낙엽이 깔린 길이라 좋다. 하산로를 거의 다 내려왔을 때에야 등산길에 오른 두 사람과 맞닥뜨린다. 마주 오는 산객이 반가워 인사하고, '얼마나 더 내려 가야합니까?'하고 물었더니 '한 10분 정도만 더 내려가면 된다'고 한다. '길이 험합니다. 조심해서 올라 가세요' 했더니, '우린 이 길을 자주 와서 괜찮아요' 하고 대답한다.

 

이곳 경주 사람인가 보다. 하산로를 거의 다 내려오자 그 끝에는 묘지가 보인다. 묘지 사이로 걷는다. 둥근 모양 묘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가만 보니 여긴 공동묘지길이다. 등산로에 묘지라, 왠지 친근하다. 어린시절엔 초등학교, 중학교를 면소재지까지 걸어 다니면서 공동묘지를 바로 옆에 두고 걸어가야 하는 고갯길이 있었는데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거나 혼자 걸어갈 땐 언제나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여기 있는 무덤들은 전혀 거부감이나 공포감이 없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인생살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 때문일까. 이 산을 내려오면서 떨어져 누운 낙엽을 밟으며 낙화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며 걸었기 때문일까. 모가 없이 둥근 모양의 봉분들, 우리 삶 가운데 죽음,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듯하다. 마을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간다. 짐승의 똥을 모아 거름으로 쌓아놓은 것이 곳곳에 보이고 그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곳 집들은 대부분 기와를 얹고 있다. 마을을 지나다가 바로 집 앞에 묘가 있는 집을 발견한다. 여기야말로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이 아닌가. 묘한 느낌이다. 낙엽 밟으며 걸었던 하산 길... 내 귓가엔 아직도 낙엽 소리 들려온다.

 

시몬...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밟으면 낙엽은 황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우리도 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오라..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 '낙엽')

 

ⓒ 이명화

 

산행수첩:

진행: 불국사 주차장(11:30)-불국사입구(11:35)-유치환시비(11:45)-쉼터(12:00)-화장실(12:10)-석굴암 주차장(12:40)-성화채화지(1:00)-토함산 정상(1:15)-점심식사후 하산(1:55)-공동묘지(2:50)-경주마동사지 삼층석탑(3:15)-코오롱호텔 정문(3:20)-불국사 주차장(3:30)

 

특징:토함산 정상 등산로에서 석굴암 가는 길 없음(무단 횡단시 벌금 2십만원)/유치환 시비-쉼터-오동약수터 갈림길:단풍길/ 시내-보문단지-불국사:벚꽃길


태그:#토함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