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알고 있으며 누군가는 모를 수도 있는

<이리>를 보고,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 대해서 아느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누군가는 안다고 했고 누군가는 모른다고 말했다. 사건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알고 있으며 누군가는 또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 그것은 그저 '사건'일 뿐이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객관적 사건의 나열이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단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객관적 진실, 그 이상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 모두 당시에는 떠들석하게 1면 기사를 장식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때의 일들을 잘 거론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잊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또다시 말하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이리>는 그렇게 보통 사람들에게는 잊혀가는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 대해서 '진서'라는 인물을 통해서 깊숙히 그리고 의연하게 다루고 있다.

상처를 돌보는 여자

주변 사람들은 진서를 돌보지 않는다. 진서가 반드시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만 그녀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바라보고, 이용하고 강간할 뿐이다. 하지만 진서의 겉모습은 너무나 멀쩡하다. 주변 사람들이 '바보, 미친년'이라 한다해도 그녀는 누구보다 태연하게 삶을 살아간다.

오히려 욕심없이 자신의 주변을 돌보는 성스러운 여인이다. 그녀가 돌보는 사람은 하나같이 '상처'가 있는 이들이다. 가족을 모국에 두고 낯선 땅에서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 가족에게 버려졌을 홀로된 노인들, 불치병에 걸린 소녀. 이들 모두에게 진서는 수호천사같은 존재다. 일부러 티를 내지 않아도 그녀는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귀한 인물처럼 상처받은 이들을 끌어 안는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진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진서 ⓒ 빈장원


난 그것이 장률 감독의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연약한 여인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처는 지울 수도 없고 그녀 또한 지우려고도 하지 않지만 계속되는 상처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타인을 바라보고 있다.

장률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맞이했지만 너무나 태연하고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육지에서 몇 십미터 쯤 올라서서 타락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연민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리를 닮은 여자

영화는 문득 이리역을 비춘다. 그렇다고 이리역의 구석구석을 비추지도 않으며 새로 지은 역사의 모습을 장시간 보여주지도 않는다. 단지 너무나도 누추한 이리역을 멀리서 응시할 뿐이다. 기나긴 철로 위에 작고 좁은 육교가 놓여있고 그것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비춘다.

그곳은 진서가 지나가고 진서가 바라보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녀의 집도 그곳 근처일 것이다. 역은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지만 역 주변은 아직 낡아 보인다는 것이 특별했다. 마치 폐허라고 해도 좋을 공간 주변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다는 사실 또한 그랬다.

그리고 '폭발 사고'의 후유증을 그대로 안고 있을 듯한 '이리역'의 모습을 조용히 비추는 동안 과연 폭발 사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공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리를 닮은 여자 진서

이리를 닮은 여자 진서 ⓒ 빈장원


무엇보다 잔인한 것은 '폭발'속에서 태어난 진서가 30년 동안이나 그 공간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을 매일같이 바라본다는 그 자체다. 끔찍하리만치 잔인해 보이지만 진서는 그 곳에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리'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흘렀지만 변치 않아 보이는 이리역(물론 익산역으로 지금은 변했지만)과 그 주변처럼 진서 또한 그대로다. 30년 전 사고로 인해서 정신이 혼미해져 버린 진서가 엄마뱃속에서 지켜본 이리의 폭발 모습은 고스란히 그녀 몸 속에서 덩치 큰 바위로 남아서 상처가 되었다.

그녀는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생생하게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그때 그곳에 있었던 하춘화의 노래도 잘 부른다. 구슬프게 잘 부른다. 소리 없는 기차가 왕래하는 역을 닮은 진서는 아파도 사랑해도 소리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서는 그저 '이리' 그 자체처럼 보인다.

오빠 태웅이 자신이 애지 중지 만들어낸 이리역 미니어처를 폭죽으로 폭발해 버리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그가 이리역을 폭발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것과 너무나도 닮은 진서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행위일 뿐이다.

폭발이 되어도 없어지는 것은 건물들 뿐이지 사람의 상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태웅이 없애려고 했던 것은 외형이 아니라 겹겹이 샇인 상처인데 그것은 단 한번의 폭발로 지울 수가 없다. 이리를 닮은 진서 역시 그렇기에 다시 처음 그곳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에….

그리고 이리에 이제 발을 내딛은 진서를 닮은 여인과 인사를 한다. 두 인물은 국적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금세 서로 알아본다. 상처의 공간위에 서 있으며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야 함으로.

 진서를 연기한 윤진서

진서를 연기한 윤진서 ⓒ 빈장원


쪽빛처럼 등장하는 공간, 이리

장률은 철저히 완결된 이야기도, 수렴되어 가는 이미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러티브는 서로 닿지도 않게 뻗어 있으며 어떤 인물이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페이크다. 더불어 모순이다.

하지만 그럼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성취하려는 바를 당당히 이루어 내고 있다. 이해할 필요 없는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을 무렵 놓쳤던 부분들이 쪽빛처럼 등장해 '나 좀 봐'하고 소리친다. 천사같은 진서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보다 <이리>에서는 이리가 중심을 채우며 쪽빛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았다면 그의 영화가 매우 흥미로웠을 것이다,  '이리'라는 공간을 봐야만 진서 또한 보이는 <이리>의 특별함은 현 세대의 어떠한 영화보다도 빛난다.  하지만 연관성 없어보이는 내러티브에 두 눈을 잠식시켜 버린다면 점점 더 그의 영화세계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오이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률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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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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