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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것질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들어갑니다. 퍼뜩 머리를 때리는 생각. 아차, 가방의 훤히 보이는 작은 주머니에 음료페트병을 끼워뒀는데. 집에서 갖고 나온 음료수인데, 설마 음료수 도둑으로 오인 받진 않겠지?

모처럼 책 한권을 손에 쥐고 외출을 합니다. 마침 큰 서점이 보여 총총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 그런데 이를 어떡하죠. 손 안의 책이 이제 영 불편해집니다. 이건 집에서 갖고 온 내 책인데, 괜스레 의심 받을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요? 물론 모든 것이 전산화된 세상에서 이 가게 물품인지 아닌지 바코드 찍어봐라, 재고 수량이랑 맞춰봐라 등등 ‘나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은 확실하게 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위와 같은 상황에선 마음이 내심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필요에 의해 가게 내에서 내 가방을 열었다가는 아차, 실수한 게 아닐까, 의심 살 행동을 했다는 불안감이 배가되죠.

가게의 모서리에선 감시용 볼록거울과 CCTV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고, 계산대의 점원은 흘깃흘깃 우리를 훔쳐보고 있습니다. 출입문 양쪽에 거만하게 서있는 도난방지용 삑삑이는 마음대로 우리 몸을 훑지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참외 밭에선 신발 끈도 고쳐 매지말라는 옛 조상들의 말처럼 의심 받을 행동은 아예 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래요, 그게 맞겠죠, 그렇지요. 그렇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깔끔해지고 전문화되고 친절해진 가게 안에서 의외로 수많은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스칩니다.

볼록거울, CCTV, 점원, 도난경보기 등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듯한. 의심받지 않기 위한 조심스런 행동, 그것이 오늘날의 합리이자 예절인지 몰라도 무언가 ‘인위적인 착함’ 같다는 생각에 결코 마음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저는 온몸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갑갑한 도시의 시멘트 더미에서 벗어나 한적한 풍경 속에서 만난, 충남 홍성 홍동면에 위치한 '풀무생협'. 주말에 잠시 들리게 된 풀무생협에서, 전 답답한 도시 풍경으로부터의 일탈뿐만이 아니라 합리란 포장을 한 도시의 상호불신 풍조로부터의 신선한 일탈도 맛보게 되었답니다. 푸른 나무들과 깨끗한 공기도 물론 좋았지만, 너무도 익숙했던 도시의 풍조와는 사뭇 달랐던 그곳의 분위기는 제 마음의 때를 씻어준 것 같네요.

 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에서는 통밀빵과 재활용비누를 만드는 일과 더불어,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에서는 통밀빵과 재활용비누를 만드는 일과 더불어,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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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 의 손때묻은, 사람 냄새나는 나무간판이 보이시죠? 풀무생협은 크게 갓골 작은가게, 느티나무 헌책방, 재활용비누 제작소의 세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너무도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풀무생협의 가게들에서 상주하는 판매원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 그럼 첨단 무인판매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냐고요? 천만의 말씀. 이 곳에선 판매원은 물론이거니와 볼록거울, CCTV, 도난경보기 등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갓골 작은가게에는 판매원이 따로 없습니다. 구매자가 구매한 상품을 직접 판매목록에 기록하고, 정직하게 스스로 계산을 하지요. 구매자의 계산편의를 위해 계산기도 마련되어 있네요.
 갓골 작은가게에는 판매원이 따로 없습니다. 구매자가 구매한 상품을 직접 판매목록에 기록하고, 정직하게 스스로 계산을 하지요. 구매자의 계산편의를 위해 계산기도 마련되어 있네요.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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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물건을 사고 파느냐고요? 답은 바로 판매자와 구매자간의 '신뢰'에 있었습니다. '갓골 작은가게'의 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가면, 그저 저 혼자 뿐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점원은 보이질 않습니다. 가게의 진열대에는 손수 만든 각종 유기농 빵과 쿠키, 재활용비누와 샴푸, 유기농산물을 가공한 라면, 요구르트, 식혜 등의 가공 시식품과 쌀, 조, 팥, 고구마 등의 여러 농산물 등 다양한 물품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계산은 구매자가 구매한 상품을 직접 판매목록에 기록하고, 정직하게 스스로 돈을 지불하게 되어있습니다. 구매자의 계산편의를 위해 친절하게 계산기도 마련되어 있네요. 구매자가 돈바구니에 직접 돈을 집어넣고, 직접 거스름돈을 챙겨야 합니다.

 풀무생협의 갓골 작은가게 전경입니다. 텃밭에서는 허브를 키워 허브쿠키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요.
 풀무생협의 갓골 작은가게 전경입니다. 텃밭에서는 허브를 키워 허브쿠키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요.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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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침 출출하였기에 우리 유기농 통밀로 만든 빵 종류에 굉장히 끌렸습니다. 이름부터 먹음직스러운 고구마 덩어리빵부터 시작해서 통밀파이, 각종 허브 쿠키, 두부과자까지 집어듭니다. 오리농법 쌀로 만들었다는 식혜도 호기심이 가는군요. 아, 그리고 집에는 검은콩이라도 한 봉지 사가야겠군요.

이렇게 마음껏 가슴 가득 한아름 먹을거리를 안아듭니다. 마치 동화 속 과자의 집에 들어온 듯한 느낌 같았어요. 맛난 먹을거리는 가득하고, 나 혼자 뿐이고,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마치 이 곳의 먹을거리는 다 선물인 듯한.

 갓골가게에는 손수만든 유기농 빵과 쿠키, 재활용비누와 샴푸, 여러 농산물과 유기농 라면, 요구르트, 식혜 등 다양한 물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갓골가게에는 손수만든 유기농 빵과 쿠키, 재활용비누와 샴푸, 여러 농산물과 유기농 라면, 요구르트, 식혜 등 다양한 물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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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막상 계산기를 두드리며 가득 고른 먹을거리들의 가격을 하나하나 더해보니 총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서 고민과 갈등의 한줄기가 피어오릅니다. 익숙한 도시의 가게에서였다면 상품의 가격에 딱 맞게 정당한 값을 치렀거나 고른 물품 중 몇 가지를 포기했겠지요. 하지만 날 지켜보는, 날 의심할 무언가가 전혀 없는 풀무생협의 가게에서는 치졸한 망설임이 생겼습니다.

골라둔 물건들에 욕심은 나고, 막상 돈은 좀 아깝고. 그냥 빵 하나를 보너스로 챙겨가면 안될까. 거스름돈을 꺼낼 때 살짝 반올림해서 챙겨 가면 안될까. 물론 심각하게 빠져든 고민은 아니었지만, 그런 류의 생각이 제 머리를 스쳐감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를 꽤 착한 시민으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가게에서 껌 하나라도 훔치면 엄청난 죄인 줄로만 알았죠. 아니,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풀무생협의 가게 내에서는 무언가를 빼돌리고픈 욕망을 느끼다니요! 의문이 솟습니다. 혹시 그동안의 나의 착함은 불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형성된 '인위적인 착함'이었던 걸까요? 나의 시선이 아닌 남의 시선만을 의식한? 흥미의 수준에서 잠시 들린 풀무생협에서 그야말로 존재의 근원에 닿는 진지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요? 어쨌든 다행입니다. 제값에 맞추어 돈바구니에 돈을 넣고 정직하게 거스름돈을 챙겼습니다. 돈을 넣고 거스름돈을 챙기면서는 묘한 느낌이 가슴을 채우더군요. '너무 사소한 일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라며 살짝 비웃을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 그 순간의 느낌은 정말 새로웠습니다. 수년간 수도 없이 이용해왔던 기존 가게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움, 내가 착해지는 느낌?

그동안 도시의 가게는 소비자인 나를 불신했기에 내가 겉으로만 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곳 풀무생협은 한 명의 손님인 나를 믿어줌으로써 내가 진정 마음 속으로 착해지게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와 손님, 불신과 신뢰라는 큰 차이.

 느티나무 헌책방 역시 상주하는 점원은 없습니다. 구매자는 책 뒷표지에 책값이 적힌 종이를 유리창에 붙인 후 스스로 정직하게 계산을 하면 됩니다.
 느티나무 헌책방 역시 상주하는 점원은 없습니다. 구매자는 책 뒷표지에 책값이 적힌 종이를 유리창에 붙인 후 스스로 정직하게 계산을 하면 됩니다.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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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골 작은가게' 옆에 자리잡은 '느티나무 헌책방' 역시 상주하는 점원은 없습니다. 구매자는 책 뒤표지에 책값이 적힌 종이를 가게 한편에 마련된 유리창에 붙인 후 스스로 정직하게 계산을 하면 됩니다.

아, 점원의 눈치나 다른 손님들이 불러오는 혼잡함 없이 조용하고 느긋하게 책방에 머물 수 있다는 여유는 얼마나 마음을 평안하게 하던지요! 물론 비치된 도서의 양과 종류는 결코 풍부하진 못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찬찬히 한 권 한 권을 살펴볼 수 있으니 마음은 한결 풍족했습니다.

고운 정성으로 책 세 권을 고르고 다시금 계산대 앞에 섭니다. 물론 '아, 그냥 한 두 권 집어가면 어떨까'란 생각이 미약하게나마 마음을 스쳤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이미 한번 고민의 순간을 거쳐서일까요, 이번에는 마음의 큰 흔들림 없이 신속하게 계산을 마쳤습니다.


 느티나무 헌책방 내부의 모습. 헌책 외에도 '그물코' 출판사의 새책 등을 싼 값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느티나무 헌책방 내부의 모습. 헌책 외에도 '그물코' 출판사의 새책 등을 싼 값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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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생협 방문을 마치고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불신을 기반으로 한 사회 속에서 합리와 예절이라 칭해지는 우리의 작은 하나 하나의 행동들은 혹여 ‘인위적인 착함’, '강요된 착함'은 아닐까요. 나는 나 자신을 과연 얼마만큼의 깊이에서 성찰하며 살아온 것일까요.

풀무생협의 가게가 나에게 던져준, 존재를 흔들던 질문. 결국 먼저 앞서서 나를 신뢰해 준 풀무생협의 넓은 마음 덕에, 저 역시 신뢰를 되갚고 제 자신을 밑바닥에서부터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비록 순간일지라도, 제 자신이 마음 속부터 착해질 수 있었습니다.

홍성을 지나가실 일이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풀무생협에 들러보세요. 제가 배운 새로운 경험, 제가 착해짐을 느낀 감사한 순간. 여러분들도 저같은 경험과 순간을 얻어가실 수 있다면 참 멋질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풀무생협에서 느긋하게 맛있는 빵과 노릇한 책을 구입하며 서로가 신뢰하고, 다같이 착해지는 밝은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홍성을 지나실 일이 있다면 풀무생협에 들러보세요. 운치있게 쉬어갈 수 있는 그네의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홍성을 지나실 일이 있다면 풀무생협에 들러보세요. 운치있게 쉬어갈 수 있는 그네의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 이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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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풀무학교 생활협동조합 www.poolmoo.net/life



#풀무생협#풀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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