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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포 선셋>의 첫 장면. 비엔나에서 6개월 후 만남의 기약, 그러나 9년간 봉인돼버린 그들의 시간.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헌책방에서 그들의 단절된 시간은 접합된다. 과거의 시간과 지식과 정취가 그대로 보존된 헌책방에서 그들의 추억도 되살아난다.

정은서점 앞
▲ 정은서점 정은서점 앞
ⓒ 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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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정은서점은 신촌에 자리 잡고 있지만 번화함과는 거리가 먼 곳에 문을 열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쌍굴다리 지나 한적한 거리를 걷다보면 작지만 책으로 가득한 가게를 발견할 수 있다. 문을 열자 압도할 만한 양의 헌책과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맞이한다. 여기까지 걸어온 복잡한 신촌 거리가 딴 세상처럼 느껴진다.

높이 쌓여진 헌책들
▲ 정은서점 높이 쌓여진 헌책들
ⓒ 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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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높이가 내 키의 곱절은 돼 보인다. 그 높이로 벽면을 다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20,30평 넓이의 가게를 사람이 겨우 지나갈 길만 남겨두고 모두 그렇게 책이 쌓여있으니 책 권수가 엄청나다. 주인인 정재은 씨에게 몇 권이나 되나 물어보니 주인인 자신도 너무 많아 다 세어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존 헌책방 이미지와 달리 분야별로 책들이 잘 정리돼 있어 산만하지는 않다.

책의 종류도 다양하다. 컴퓨터 서적부터 철학서까지, 국내 소설부터 영미 소설, 불문 소설까지 대형서점 못지않게 스펙트럼이 넓다. 소장 도서의 다양성이 이 헌책방의 특색이자 자랑이라고 정씨는 말한다.

이곳에서만 16년, 명지대 근처에서 했던 시간까지 합하면 30년의 시간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덕분이다. 그리고 30년 동안 대학가 근처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책의 질적 수준 또한 높다. “책을 좀 아는 사람들은 우리 책방에 오면 딱 알죠.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가.” 정씨는 자랑 섞인 설명을 덧붙인다. 사실 이 곳에서 고전 중에 없는 책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절판돼 시중에서 찾기 어려웠지만 제목은 유명한 책도 곧잘 보인다.

주인 정재은씨. 기자가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
▲ 정은서점 주인 주인 정재은씨. 기자가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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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서점을 찾은 11월 13일은 수능시험일이었다. 정씨는 30년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대학시험 보는 날은 항상 손님이 없다고 한다. 이 날도 기자 외에 한 명의 손님만이 더 있었다. 그는 대학원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신촌에 올 때면 근처에 위치한 4곳의 헌책방을 포함해 이 곳에 들른다고 한다.

꼭 구입 희망 목록이 없어도 들러서 좋은 책을 발견할 때마다 산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찾던 책을 여기서 찾은 경험도 소개했다. 그럼 일반 서점이 아닌 헌책방을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 첫째로 구하기 어려운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저렴한 가격을 들었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헌책방만의 독특한 매력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원생 손님
▲ 손님 대학원생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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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가격이 일일이 쓰여 있지 않았다. 주인 정씨에게 물어보니 최근에 나온 책은 좋은 출판사의 책은 반값을, 그렇지 않은 출판사의 책은 반값 이하를 받는다고 한다. 옛날에 나온 책은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 당시 가격의 반절 가격으로 하면 천, 이천 원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은 희소가치에 따라 주인 임의로 가격을 책정한다. 절판돼 흔하지 않은 책은 비싸고, 흔한 책은 싼 편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이 요즘 책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우면 중고물건을 파는 가게가 잘된다고 한다. 헌책방도 그럴까? 주인 정씨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헌책방의 특성상 아는 사람들만 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사기 때문에 불황기에도 별 차이가 없단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과 다르게 옛것을 찾지 않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헌책으로 가득한 서점
▲ 정은서점 헌책으로 가득한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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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을 오랜만에 찾으니 잊고 있던 여유를 찾은 것 같다. 옛 사람들의 유물을 간직한 채로 시간이 멈춰버린 어느 동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곳은 으슥한 분위기가 아닌 설렘 가득한 공간이다. 삐뚤삐뚤 도열한 책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자니 마치 모든 책이 내 것만 같고, 지식인이 금방이라도 될 것 같은 순진한 두근거림. 책 세 권을 집고 나와 계산한다. 새 책이라면 삼, 사만 원 했을 텐데 만원이란다. 하지만 아낀 돈에 대한 만족감보다 지식에 대한 음험한 욕망이 마음 속을 채운다.


태그:#헌책방, #중고서적, #중고, #정은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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