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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이 2009학년도 수학능력시험라는 사실을 중학교 3학년 졸업시험을 끝낸 아들이 얘기해줘 알았습니다. 저의 이런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수험생을 둔 가정에서 지난 1년간 얼마나 온 가족이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불안한 생활을 감내해왔을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작년, 수험생을 둔 처지였었고 파주로 이사 온 저는 스스로 서울에 남겠다는 수험생 딸 때문에 제가 직접 한 집안에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불편은 적었습니다.

 

작년 수능을 코앞에 둔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고3 수험생의 삶을 살고 있는 둘째딸 주리로 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모든 수험생이 오직 수능에서의 고득점을 위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하고 있을 때였지요. 또한 시험이 임박한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주리에게 무슨 탈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 해서였지요. 하지만 대학노트 3페이지에 깨알처럼 촘촘하게 써진 편지내용을 보니 동생 영대를 위한 사랑 가득한 충고였습니다.

 

저의 자식에 대한 가정교육방침은 '방목(放牧)'입니다. 첫째딸 나리도 그랬고, 둘째딸 주리도 마찬가지였고 막내인 영대인들 예외일 수 없지요. '인생은 외길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저는 공부만이 인생의 대안없는 '외길'이라고 여기는 교육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학생의 신분인 제 둘째딸은 제 생각과는 다른 입장을 보입니다. 제가 특별난 교육관처럼 주장하는 '방목'은 저의 입장에서는 '자율'이지만 저의 둘째딸 주리에게는 '방치'로 여겨지는 듯했습니다.

 

UV하우스의 김정희 선생님께서 영대가 오가는 모습을 보시고 '헤이리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가진 아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것이 모든 과외와 학원에서 열외된 영대에겐 자신이 좋아하는 애완견과 동네를 어슬렁거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주리는 수능을 앞둔 자신보다 동생이 더 절박하다는 판단이었나 봅니다. 아무튼 누나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읽은 영대는 누나에게 '누나가 나의 누나임에 감사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영대가 컴퓨터의 인터넷 잭을 빼고 책을 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대는 누나의 편지를 꼬깃꼬깃 접어서 지금도 자신의 지갑 속에 넣어 다닙니다.

 

아래는 그 편지의 전문입니다.

 

 

영대에게 

 

영대야 주리누나야.

누나가 수능보기 전까진 파주는 못가고 너한테 얘기해 줄 게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쓴다.

요즘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있니? 여자 친구 생겼는데 누나한테 이름도 안 얘기해주고…. 여튼 뭐 재밌게 생활하면 되는 거지.  

 

파주로 이사 간 후로부터 언니랑 나도 따로 살고, 엄마랑 아빠도 바빠서 너한테 잘 신경을 못 쓰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수능만 끝나면 너 공부도 알려주고, 밥도 같이 먹고 할 텐데. 

 

영대야, 너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니? 사실 중학교 때는 공부고 뭐고 재밌게만 생활하면 땡이야. 공부야 고등학교 때 와서 하면 되지. 그런데 고등학교 와서 열심히 하려고 하잖아. 그땐 이미 다른 아이들과 너와의 실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열심히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중학교 때는 첫째로 중요한 게 재밌게 생활하는 건데 반드시 중학교 때 기본은 해놔야 되. 

 

아직은 네가 공부보다 재미있는 것도 많은 것 같고,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선생님이나 너 주위의 사람들이 공부하나만으로 널 평가하는 게 싫고 그럴 거야. 그런데 네가 조금만 더 크면 공부를 왜 꼭해야 하는지 알게 될 거야. 누나도 그리 오래 살아보진 않았지만 너보단 4년이나 더 오래 살았잖니. 

 

세상은 말이야 능력과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움직일 수 있어. 이건 누나가 19년 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실이야. 아무리 성격이 좋고 잘생겼어도 소용없어.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 돼. 내가 말하는 능력은 꼭 공부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노래를 잘해도 되고, 개에 대한 전문가여도 좋고, 외국어를 잘해도 좋고…. 뭐든지 될 수 있어. 어떤 분야에서도 능력과 열정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그런데 말이야,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세상은 네가 가진 모든 능력을 오직 공부로만 판단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대한민국의 모든 중·고등학생의 능력을 비교하기위해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 평가할 순 없는 일이니까. 말 잘 타는 사람은 승마로 점수주고, 노래잘하는 사람은 노래로 주고, 외국어 잘하는 사람은 외국어 시험보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좀 불합리한 것 같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후론 이제 마음껏 너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영대 너는 지금 확실한 꿈이 있니?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바꿨을 라나? 하여튼 아직 꿈이 확실히 없어도 좋아. 이제부터 찾아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지금 공부를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진짜로 너무너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지금 안 해놓은 공부가 너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 그럼 너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학생들 모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야. 

 

물론 공부를 하려면 어렵지. 아무리해도 성적은 안 오르는 것 같고, 선생님이 무슨 말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그래도 영대야, 우선 마음을 먹어봐. 열심히 하겠다고. 방법은 누나랑 같이 찾아보자. 그런데 공부하려면 꼭꼭 지켜야할게 있어. 정말 이건 죽어도 꼭 지켜줬으면 좋겠어. 누나가 부탁할게. 

 

우선 절대 수업시간에 자지마. 아무리 졸려도 눈이 저절로 감겨도 절대 엎드리지 마. 절대 절대 엎드리면 안 돼. 나도 학교에서 손꼽히는 잠보야. 그런데 아무리 졸려도 자진 않아. 졸린 건 어쩔 수 없지만 깨려고 노력해야 돼. 엎드리는 순간! 너한테 진거고 선생님한테 뻐큐를 날린 것과 같아.

 

생각해봐. 엄마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졸면 피곤한가보다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잖아. 그런데 엄마가 네가 얘기하고 있는데 엎드려서 자봐. 얼마나 화나니? 선생님도 마찬가지야. 절대 절대 자면 안돼. 아무리 못 알아듣겠고 아무리 듣기 싫어도 절대 자선 안 돼.

그리고 학교에서 안 자려면 집에서 푹 자고 와야겠지? 컴퓨터 하는 시간을 조금만 줄이고 한 하루에 8~9시간 자. 그럼 학교에서 잘 일은 없을 거야. 

 

또 한 가지는 공부할 때는 핸드폰을 꺼놔. 수업시간에 문자보는 건 죽어도 안 되고. 원래 핸드폰 있으면 신경 쓰이잖아. 문자도 안 오는데 괜히 열어보고. 공부할 땐 껐다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학교 끝나고 그때 실컷 문자 보내. 그런데 절대 수업시간엔 열어보지 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꼭 물어봐. 다~ 모르겠어. 그럼 다~ 물어봐.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모르는 게 있어서 질문하는데 어느 선생님이 안 알려주겠니? 물론 이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띠껍게하는 선생님도 있을 거야. 우리학교에도 그런 선생이 있거든…. 그래도 물어봐. 모르는데 어떻게 물어봐야지. 선생님께 물어보기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애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하지만 선생님이 제일 좋아. 교무실을 니 방처럼 자주 들락거려봐. 그럼 선생님도 최대한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너를 다시 보게 될 거야.  

 

우선 이 3가지를 꼭 실천해!

세 가지 뭐였지?

1. 수업시간에 절대 자지 말고,

2. 공부할 때, 수업시간 때 핸드폰 꺼놓고,

3. 모르는 게 있으면 절대 그냥 지나가지 말고 꼭꼭 물어보고. 

 

우선 이 3가지만 지켜봐. 그러고 학교생활 재밌게 하고. 영대야 절대 잊지 마. 나중에 네가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을 가졌을 때 지금 공부하지 않은 것이 너의 발목을 잡을 수 있어. 그때 아무리 후회해봐야 소용없단다. 평생 후회만 하면서 사는 거야. 영대 너 설마 평생후회만 하면서 살고 싶진 않겠지? 

 

누나도 지금 수능이 2주도 안 남았는데 항상 불안하고 내가 원하는 점수도 안 나오고 그래서 미치겠어. 그래도 어쩌겠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영대야 너도 항상 열정 있게 최선을 다해.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무술도 열심히 하고, 해피, 해모도 잘 보살펴줘.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어. 항상 기억하고 이 편지를 읽는 바로 이 순간부터 결심해! 열심히 하겠다고. 그까이꺼 공부 열심히 해보겠다고. 우선 내가 말한 이 3가지 꼭 지키고 내가 맨날 전화해서 확인할 거야. 지금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그래서 1년을 더 허송하게 된다면 네가 꿈꾸는 그 꿈을 꿀 수도 없단 말이야. 누나말 꼭 명심해. 꼭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야 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최선을 다해봐. 이 착한 누나가 도와줄게. 힘내고! 이만 쓸게. 

 

2007. 11.2.

주리누나가.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되었습니다.


태그:#수능, #이주리, #이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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