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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IMF 때보다도 더 어렵다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요즘 시국과 경제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그때 당시 자신이 기용하여 재경부차관이었던 강만수씨가 지금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경제정책 수장을 맡고 있으니 믿음직스럽겠지 뭘?"

 

뜬금없는 동생의 질문에 내가 왜 이리 퉁명스럽게 답변을 했는지 모릅니다. IMF 사태로 예기치 못한 시련을 겪은 아픈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구들을 크게 격파한 옥포를 지나 장문포 왜성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를 둘러보고 가겠느냐는 동생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장목면 외포리 생가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동생이 혼잣말처럼 묻는 말이 IMF와 요즘 경제 이야기였지요.

 

사실 지금 노동자들이 뼈저리게 당하고 있는 신분상의 불이익도 당시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비정규직이니 계약직이니 하는 노동자 신분이며, 정년이 몇 년씩 단축된 것도 IMF사태가 낳은 것들입니다.

 

당시 경제파탄으로 고통당한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도 평생 직장생활을 하다가 3년이나 단축된 정년으로 조기퇴직을 했습니다. 그 조기퇴직 때문에 요즘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나는 물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IMF사태의 피해자들인 셈이지요.

 

그 아픈 기억이 어딘가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무심코 던진 질문에 퉁명스런 대답이 튀어나왔나 봅니다. 생가마을은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안겨 있었습니다. 마을입구엔 제법 넓은 주차장 겸 마당이 만들어져 있더군요.

 

2001년도에 거제시가 5억 원을 들여 생가를 새로 지으면서 만든 공간일 것입니다. 그 마당가에는 주민들이 수확한 벼를 널어 말리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노인들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마을에서 배출한 전직 대통령의 생가를 찾아온 외지인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올 벼농사가 아주 풍년입니다."

 

요즘도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으냐고 물으니 널어놓은 벼를 가리키며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할머니에게 미소를 보내고 대문 앞쪽으로 향했습니다. 대문 앞에도 역시 벼와 고추를 널어 말리느라 마당가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그 뒤로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한그루가 서있었습니다.

 

십여 개의 계단을 올라간 곳에 솟을 대문이 높직하게 서있었지요.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주 보이는 본채에서 일하던 두 사람이 멈칫멈칫 비켜섭니다. 찾는 손님이 없어 작업을 하다가 우리들을 보고 비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본채라고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결한 살림도구와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마당 한 쪽 하얀 대리석 받침 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흉상이 놓여있고, 화단에는 '기념식수 김영삼 2001, 5, 9'이라 쓴 기념식수 표지판이 있었는데 그의 친필인 듯 보였습니다.

 

본채 오른편으로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랑채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물건은 별로 없었지요. 본채와 사랑채 사이 뒤뜰에는 장독대와 함께 별로 깊지 않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텐데 썩지 않고 맑은 물이네."

 

동생이 우물을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었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정말 맑은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물의 깊이는 낮아보였습니다. 물은 썩지 않고 맑은 모습이었지만 수많은 작은 벌레들이 물 위에 떠있는 게 사용하지 않는 우물임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사랑채에는 조금 전 본채에서 작업을 하고 나오던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혹시 기념품이라도 구입할까 싶어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에게 이 집에서 누가 거주하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뒤뜰 뒤와 사랑채 옆으로는 성벽 같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었지요. 특히 본채 뒷담은 높고 견고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랑채 옆으로 돌아가자 작은 샛문이 나타났습니다. 샛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아래쪽 넓은 마당과 마을 앞 지역이 훤하게 바라보입니다.

 

집 뒤쪽으로 돌아가자 담장 아래 생가의 지붕이 내려다보입니다. 생가 본채와 사랑채의 지붕구조는 모두 팔작지붕이었습니다. 보통 일반가옥에서는 맞배지붕형태가 많은 편인데 이 가옥들은 조금 특별한 모습이었지요.

 

안마당을 거쳐 대문 밖으로 나오자 동생부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 생가를 찾은 사람들은 우리들 외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문 밖으로 나서자 마을 노인들은 여전히 벼를 말리고 있는 멍석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차장에 서 있는 승용차에 오르며 다시 한 번 김영삼 생가를 뒤돌아보았습니다. 높고 견고하게 돌로 쌓은 축대 위의 전직 대통령 생가의 모습이 작은 궁궐처럼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멋진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로막고 함께 떠오른 것은 IMF라는 쓰라린 고통의 기억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김영삼 생가, #솟을대문, #감나무,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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