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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법화암 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목 오른편에 수목 사이에 모셔져 있었다.
▲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영산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법화암 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목 오른편에 수목 사이에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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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문화유적답사를 하면서 산문(山門)을 제도(制度)하고 있는 숱한 석조여래좌상을 경배(敬拜)했다. 청도 운문사(작업전), 밀양 무봉사(대웅전), 양산 용화사(본존), 진주 금선암(본존), 예천 청룡사(법당), 해남 도갑사, 창녕 관룡사(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 등은 모두 경내에 위치해 있어 절을 찾는 이들에게 쉽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영산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법화암 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목 오른편 수목 사이에 모셔져 있었다. 명색이 문화재라 비바람을 피할 거처를 마련하고 있으나, 찾는 이 없어 고고하고 외로워 보인다. 주변 잡풀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아 관리하는 사람은 있는 듯했다.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출입문,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 석조여래좌상 출입문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출입문,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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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에 싸인 섲조여래좌상 누각
▲ 석조오래좌상 전경 수풀에 싸인 섲조여래좌상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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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에 비해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출입문
▲ 좌상 출입문 누각에 비해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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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담장,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게 자연스럽게 돋보인다.
▲ 누각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새로 만든 담장,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게 자연스럽게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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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리 석조여래좌상(경남유형문화재 제9호)은 이곳 영상 영축산에 있었던 적조사(寂照寺)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질 뿐,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화강암 석불로 언뜻 들여다보아도 다른 석조여래좌상과는 달리 미륵불의 특정 부분을 갈아 마시면 득남한다는 속설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해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마멸이 심해 원형 파악이 힘들어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광배는 타원형의 거신형(擧身形)이며, 불상은 높게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세세한 조식(彫飾)은 보이지 않는다.
▲ 석불 모습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광배는 타원형의 거신형(擧身形)이며, 불상은 높게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세세한 조식(彫飾)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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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보았던 석조여래좌상의 경우 대부분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육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었고,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었다. 또한 법의도 두 어깨를 다 가린 통견의(通肩衣)이며, 법의 안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끼어 입은 승각기(僧脚岐)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광배는 타원형의 거신형(擧身形)이며, 불상은 높게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되어 세세한 조식(彫飾)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높은 육계와 이목구비, 긴 귀,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불보살의 수인 중 하나로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뜻)의 수인을 취한 고려시대의 석불로 지방화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운문사나 관룡사 등 일반적인 석불과 달리 좌대가 없이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높이는 140㎝, 폭은 70㎝ 정도다.

불상은 광배와 함께 하나의 돌로 조각돼

마침 불상을 찾은 때가 해질녘이라 사위가 거뭇거뭇해지자 흐릿했던 불상의 윤곽들이 촘촘하게 되살아난다. 얼굴은 갸름하며, 머리 부분의 상투 모양의 높은 육계가 솟아 있다.

또, 얼굴에 비해 크게 조각된 코가 특징적으로 드러나며, 귀는 비교적 길지 않다. 그러나 이목구비 등의 자세한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역시 구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오른쪽 어깨는 비교적 각이 뚜렷해서 둔중하게 느껴진다. 왼쪽 어깨는 오른쪽 어깨에 비하여 넓지만, 양 어깨 모두 아래로 조금 처져 있다. 다리 부분은 폭이 좁은 편이며, 양 무릎의 높이가 일정치 않아 불상이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약간 처져 있다. 그렇다고 엉거주춤한 자세는 아니다.

석불은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해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 석불의 이목구비 석불은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해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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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갸름하며, 머리 부분의 상투 모양의 높은 육계가 솟아 있다.
▲ 석조여래좌상 부분 얼굴은 갸름하며, 머리 부분의 상투 모양의 높은 육계가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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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체는 입체감이 없이 간략하게 처리되어 신체 표현 등에서 소박한 이곳 지방의 소탈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법의도 파악이 힘들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역시 훼손이 심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신체는 입체감이 없으나 소탈함을 잘 나타내고 있어

아무리 득남을 목적으로 미륵불의 코를 갈아먹었거나 비바람에 마멸되었다고 해도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외롭게 자리하고 있어도 길손에게는 어엿하게 자태로 화답하는 것이다.

얼굴은 소박한 이곳 지방의 소탈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석불 얼굴 부분 얼굴은 소박한 이곳 지방의 소탈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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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득남의 목적으로 갈았던 비바람에 마멸되었던 친근한 좌상
▲ 석불의 이목구비 아무리 득남의 목적으로 갈았던 비바람에 마멸되었던 친근한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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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대면했던 관룡사 약사전에 안치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었다. 그 형체(수인手印은 약사인 藥師印)가 뚜렷했으며, 16개 꽃잎이 겹쳐진 부연(附椽)이 아름답게 새겨진 대좌(臺座)위에 앉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이었다. 아쉽지만 크게 대별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길손이 만난 구계리 석조여래좌상은 제작기법이 거칠고 조잡해도 고려시대불상으로 추측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태그:#석조여래좌상, #석불, #미륵불, #시무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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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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