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선수들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3대 2로 승리를 한뒤 팀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SK선수들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3대 2로 승리를 한뒤 팀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답이 정해지지 않은 주관식 문제. 야구 감독들은 매 경기 이 난해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답을 서술하는 데 필요한 전력 분석 보고서나 기타 여러 통계들을 얼마든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오픈북 시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험은 오픈북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경기 전날 감독들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승리라는, 예측 불허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적의 답, 자신만의 야구 철학을 담은 선발 선수 명단(라인업)을 써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29일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둔 김성근 SK 감독은 언제나 그렇듯이 불면의 밤을 보냈다. 상대팀 두산의 선발, 왼손 투수 이혜천을 무너뜨릴 최적의 조합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벽이 깊어가는 만큼 고민도 깊어져 갔다. 썼다 지우기를 5차례. 산고 끝에 제출할 답안을 손에 쥐었다.

 

불면의 밤, 산고 끝에 완성한 답안

 

 SK 김성근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3대 2로 승리를 한뒤 팬들에게 모자를 들어보이며 인사를 하고 있다.

SK 김성근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3대 2로 승리를 한뒤 팬들에게 모자를 들어보이며 인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우선 1차전과 2차전에서 모두 홈런을 친 왼손타자 김재현을 뺐다. 이혜천이 왼손투수인데다 김재현이 올해 정규시즌에서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에서 유난히 강하고 현재의 컨디션이 아쉽긴 했지만 과거의 데이터를 따른다면 이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남은 문제는 김재현을 대신할 타자를 선택하는 것. 김 감독은 김재현의 이름을 지운 자리에 이·재·원이라는 석자를 써넣었다.

 

뜻밖이었다. 이재원은 정규 시즌에서 이혜천과 7번 만나 볼넷을 하나 얻어냈을 뿐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 감독에게 이재원의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직접 관찰한 이혜천의 볼 배합과 이재원의 현재 컨디션을 변수로 놓고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감'이 왔다. "통한다"고.

 

두 번째 고민은 1, 2차전에서 7번과 6번으로 활약한 최정의 타순이었다. 2경기 성적은 8타수 1안타. 하지만 이번엔 과거를 믿었다. 최정은 올 시즌 이혜천과 6번 만나 그중 홈런 1개를 포함, 4번을 안타로 연결했다. 한마디로 이혜천 '킬러', 그에게 5번 타자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1, 2차전에서 6번과 5번이던 이진영을 2번 타자에 전진 배치했다. 이진영은 왼손타자인데다 정규시즌에서 이혜천을 상대로 5타수 1안타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경기를 치를수록 타격감이 살아나고 있다고 판단해 전날 3시간동안 직접 '특별 과외' 수업을 시켰다.

 

때론 과거의 보이는 데이터를 따르고, 때론 최근에 직접 관찰한 데이터와 그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감을 따르는 '김성근식 데이터 야구'가 써 낸 3차전 해법은 이랬다.

 

1번 정근우(2루수) 2번 이진영(1루수) 3번 이재원(지명) 4번 박재홍(우익수) 5번 최정(3루수) 6번 박경완(포수) 7번 나주완(유격수) 8번 김강민(중견수) 9번 박재상(좌익수)

 

김성근의 '생각대로 라인업' 과연 몇 점?

 

경기는 끝났고 승부는 갈렸다. 이제는 답안과 정답을 맞춰볼 차례다.

 

먼저 이재원. 첫 타석에서 유격수 앞 병살타를 치고 말았다. 이재원을 선택한 것은 실수라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 무렵, 그는 두 번째 타석에서 이혜천을 상대로 깨끗한 중견수 앞 안타를 쳐냈다. 2루에 있던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여 선취점을 올리는 짜릿한 안타였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에서도 또 다시 좌전 안타를 쳐내면서 그때까지 동료 타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이혜천을 마운드에서 끌어내리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그리고 바뀐 투수 이재우를 상대로 최정의 홈런이 터지면서 역전 득점을 기록했다.

 

두 번째 이진영. 특별 과외수업의 효과였는지 첫 타석부터 방망이가 날카롭게 돌았다. 우전 안타였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 비록 이진영에게 안타 한방을 맞긴 했지만 이혜천의 기세는 무서웠다. 직구면 직구, 변화구면 변화구, 이혜천의 손을 떠난 공은 초구부터 과감하게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공략했다. 3회초 나주환은 공 3개에 삼진, 김강민은 공 2개만에 빗맞은 1루수 파울플라이, 박재상도 공 3개에 삼진을 당했다. 나주환, 박재상은 배트를 휘둘러 보지도 못했다.

 

4회초에 들어서도 선두타자 정근우가 역시 공 3개 만에 삼진을 당하면서 이혜천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이진영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면서 승부를 걸어오는 이혜천의 강공에 강공으로 맞섰다. 소극적으로 기다리다 당한 앞 타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초구 스윙은 파울이 됐지만 두 번째 몸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는 정확히 받아쳐 우익선상에 떨어지는 2루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잘 던지던 이혜천은 이재원에게 또다시 안타를 허용하면서 먼저 점수를 내주고 말았다.

 

최정의 과거를 두려워한 김경문 감독

 

 SK 최정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6회초 2사 1루 타석때 좌월 2점 홈런을 친뒤 그라운드를 돌며 이광길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SK 최정이 29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의 경기에서 6회초 2사 1루 타석때 좌월 2점 홈런을 친뒤 그라운드를 돌며 이광길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마지막으로 최정. 이혜천 킬러라는 과거 데이터가 무색하게도 이날 경기에서는 투수 땅볼에 이어 삼진까지 당하면서 체면을 구기는 듯 했다. 하지만 과거가 빛이 바랜 것만은 아니었다. 두산의 김경문 감독은 최정의 과거를 두려워했다.

 

6회초 이재원이 안타로 출루해 주자 1루인 상황에서 최정의 타석이 돌아오자 김경문 감독은 이혜천을 내리고 불펜의 가장 확실한 카드인 이재우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러나 이혜천을 만나 고전하던 최정은 이재우로부터 팀에 승리를 가져다준 결승 홈런을 뽑아냈다. 이혜천을 잡으려고 전진 배치한 최정이 뜻밖에도 이재우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야구는 모르는 것이고 야구의 라인업에는 정답이 없다. 김경문 감독은 "최정이 이혜천의 공을 잘 치는 타자여서 바꿨다. 우리팀 최고의 불펜투수인 이재우가 막아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초구에 홈런이 나왔다"며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야구"라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경기의 득점과 타점은 모두 김성근 감독이 고심 끝에 손을 본 지점에서 터져 나왔다. 이날 SK 승리의 8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넘나드는 김성근 감독의 '생각대로 라인업'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차전 두산의 선발은 1차전의 승리투수였던 랜들이다. 김성근 감독은 4차전이 열리는 새벽 1차전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목전에 닥친 경기의 선발 라인업을 썼다 지우기를 다시 반복할 것이다.

 

최종 제출된 답안은 또 어떤 승부의 변주를 만들어 낼 것인지, 감독들이 고심 끝에 제출하는 답안의 채점관이 돼 보는 것도 이 가을을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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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0 08:22 ⓒ 2008 OhmyNews
한국시리즈 김성근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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