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40km만 넘어도 '강속구 투수'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엔 시속 150km의 공을 던지는 투수도 흔해졌다. 이제 공이 느린 투수는 1군 무대는 커녕, 프로에 지명조차 받기 힘든 세상이 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무조건 빠른 공만 던지려는 어린 투수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역설했던 베테랑이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좌완 투수 전병호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투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삼성은 29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코칭 스태프 및 선수단 부분 개편'을 발표하며 전병호의 이름을 선수가 아닌 '투수 코치' 명단에 합류시켰다. 이렇게 전병호는 13년에 걸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공만 빠른 좌완 투수, '대한민국 대표 저속구 투수'로 거듭나다

 놀랍게도 초창기의 전병호는 빠른 공을 가진 좌완 유망주였다.

놀랍게도 초창기의 전병호는 빠른 공을 가진 좌완 유망주였다. ⓒ 삼성 라이온즈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영남대를 졸업하고 1996년 삼성에 입단할 때만 해도 전병호는 시속 145km의 강속구를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였다.

당시 전병호는 계명대 출신의 최재호, '해외파' 최창양(이상 은퇴)과 함께 '신인 3인방'으로 큰 기대를 모았고, 2억8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았다.

입단 첫 해에는 4승 7패 평균자책점 2.65로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생애 최초로 10승(8패)을 올린 이듬 해엔 평균자책점이 4.93으로 치솟았다.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들이 그렇듯, 전병호 역시 제구력이 문제였다.

이후 좋은 해엔 3점대 후반, 나쁜 해엔 5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근근이 버텨 나갔고, 유망주 명단에도 전병호의 이름은 사라져 갔다. 그러던 와중에 구속은 점점 느려졌고, 서른이 넘어 가면서 왼무릎까지 이상이 생기고 말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빠른 공까지 사라져 버린 30대의 좌완 투수. 이 후의 스토리는 뻔하다. 소속팀에서 방출된 후 쓸쓸하게 사라지거나 좌완 이라는 잇점을 살려 원포인트 릴리프로 변신하는 것.

그러나 전병호는 은퇴를 하지도, 원포인트 릴리프로 변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2의 전성기'를 열며 자신의 존재를 야구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전병호가 사는 법, '느린 공, 더 느린 공, 가장 느린 공'

 내년부터는 전병호의 느린 공을 볼 수 없다.

내년부터는 전병호의 느린 공을 볼 수 없다. ⓒ 삼성 라이온즈

강속구를 잃은 전병호가 택한 생존법은 '제구력'과 '완급 조절'이었다. 어차피 빠른 공이 타자를 압도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느린 공을 원하는 곳에 던져 타자들을 현혹시키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전병호가 던지는 빠른 공의 평균 구속은 시속 130km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를 쓰고 던져 봐야 시속 135km에 불과하다. 수준 높은 사회인 야구팀의 에이스도 그 정도의 공은 던질 수 있다.

그럼에도 전병호는 매년 100이닝 정도를 소화하며 많게는 10승(2006년), 적게는 5승(2004년)을 쌓아 올리며 투수 보는 눈이 가장 까다롭다는 선동열 감독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

사실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 보면, 전병호는 무척 짜증나는 투수다. 2-3 풀카운트까지 가는 경우도 많고, 주자가 나가면 견제구도 많이 던진다. 특히 공의 상표까지 보일듯한 느린 공을 던지면서도 강타자들이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걸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전병호의 투구 스타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 '타 팀 팬'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병호의 은퇴 소식은 후련하기는 커녕,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13년 동안 통산 72승 55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4.43의 평범한 기록을 남기고 떠나는 투수. 그러나 모두가 시속 1km라도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 기를 쓸때, 느린 공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대한민국 대표 '저속구 투수' 전병호.

최신 휴대폰을 사용하다가도 가끔씩 무선 호출기의 수줍은 음성 메세지가 그리워지듯, 류현진(한화 이글스), 김광현(SK 와이번스) 같은 '괴물'들의 시원스런 강속구를 보면서도 가끔은 전병호의 '느린 공, 더 느린 공, 가장 느린 공'이 그리워질 듯 하다.

전병호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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