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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금요일. 이른 아침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가마솥에 돼지 뼈다귀에 감자를 넣고 거기다가 밭에서 금방 구한 고추며 대파, 생강, 처마 밑에 매달린 양파에 마늘 등 온갖 양념을 넣고 오전 내내 푹푹 끊였습니다.   

 

오체투지순례단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올 몇몇 반가운 손님맞이 준비를 끝내고 큰 아이 인효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보통 어떤 일에 참여하게 되면 카메라를 챙겨 나서곤 했지만 이번에는 빈손으로 나섰습니다.

 

지리산에서부터 52일째, 오체투지순례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충남 계룡면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순례단 앞에는 연천봉에서부터 천황봉, 국사봉으로 이어진 계룡산줄기가 한 눈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오체투지'에 참여하다

 

올해 중학교 1학년인 인효 녀석은 처음 접하는 오체투지였지만 가쁜 호흡을 골라가며 씩씩하게 해냈습니다. 힘들어 할 만도 한데 녀석 코앞에 초등학교 4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부지런히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기에 꾹꾹 눌러 참았을 것이었습니다.   

 

오후 구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해 보니께 어뗘?"

"조금 힘들었지만 아스팔트 위에 누워 보고 싶었는데 실컷 해본 거 같혀."

"무슨 생각 들었어?"

"그냥 아무 생각 안났어, 코를 풀어보니까 시커먼 코가 나오데."

 

"아스팔트라 그려, 따지고 보면  맨땅이나 아스팔트나 우리 몸이나 모두가 한 몸 인겨, 우리가 어디서 왔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잖어, 오체투지 하면서 엎드려 있다 보니께 그런 거 같지? 차갑거나 뜨거운 체온 같은 것이 느껴지지?"

"그런 거 같기도 하구."

 

"그래서 모든 게 소중한겨, 물질과 나, 정신이 하나 인겨, 그걸 물질 할 때 물, '나아'에 '한일자'를 써서 물아일체, 물아일여라구 허는디. 암튼,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 겨, 그러니 뭐든지 함부로 하면 안되겠지."

 

녀석에게 물아일여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먼 거리를 기어오신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님, 전종훈 신부님 그리고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오체투지의 의미를 설명해 주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녀석 스스로가 느낄 수 있길 바랬습니다.

 

저녁식사는  문규현 신부님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있는 생명평화 마중물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문 신부님은 오체투지순례단과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생태건축을 연구하고 있는 장건 회원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접했다는 생태건축을 토대로 자신만의 공법을 창안해 제주도에 아주 튼튼한 생태 목조건물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생태 건축에 가장 적합하다는 목조 건축의 장점을 나열하던 중에 황토집에 대한 위험성을 얘기했습니다. 황토집은 몸에 좋지 않은 미세한 분진이 날려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조 건축물에서 사는 것보다 수명이 10년 가까이 줄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집은 아주 오래 전, 아마 70, 80년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미세한 분진이 수없이 날리는 황토로 지은 오래된 시골집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태건축물의 최고는 소박한 시골 황토집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 1차 모임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이동해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온갖 양념을 넣고 가마솥에 끓인 감자탕과 손님대접을 위해 담궈 놓은 솔방울 술 단지를 풀어놓고 생태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나는 흙만큼한 재생 가능한 것이 어디에 있으며, 공간이 좁은 옛 시골집이기에 자본이 많이 들지 않고, 흙집이라 공기 소통이 잘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따뜻하다, 방안에서 황토 분지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니라 공간이 좁으니 평소 밖에 나와 생활하기에 건강에도 좋다, 자본이 들지 않는 시골 황토 집이야 말로 최고의 생태건축물이라며 강변했습니다.   

 

그가 며칠에 걸쳐 준비한 자료 중에는 미국의 어느 해안 지방의 집채들을 모조리 휩쓸고 간 태풍에도 끄떡없이 홀로 살아남은 건축물 사진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본이 집약되었을 그 건축물에 대해 일류가 멸망할 때 바퀴벌레가 살아남은 것처럼 끔찍하다고까지 역설했습니다. 그 어떤 생태건축물이라 할지라도 일반 서민들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자본이 개입되면 생태건물이 아니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아무리 생태적이라 해도 그 막강한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목조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자본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 자본이 과연 생태적으로 획득한 자본일까? 생태 도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생태국가라는 독일, 그 독일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약소국가들을 착취했겠는가? 필요 이상의 자본과 결부되면 그건 이미 생태가 아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생태를 파괴해 왔다. 그 자본의 힘을 빌려 생태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손님을 모셔놓고 극단적이면서도 공격적으로 몰아 붙였던 것입니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물아일여니 모든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느니 자식에게 의미심장하게 했던 말들이 하루도 지나지 않고 와르르 무너졌던 것입니다. 스스로 '옳다'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 공격적인 '나의 공격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새벽 산책을 하면서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아빠와 함께 가지 않은 아들

 

회원들과 함께 감자탕으로 아침을 챙겨먹고 오체투지 53일째, 마지막 구간에 참여 했습니다. 전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무릎이 땅에 닿을 때마다 시큰거렸습니다. 술자리에서의 공격성을 털어내듯 길 위에 납작 엎드리고 또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내 안에 늘 웅크리고 있는 그 놈'은 또다시 되살아 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오체투지를 마치고 점심식사 시간을 이용해 서울에서 어린 남매를 데리고 온 이산씨의 부인과 그 어린 딸을 데리러 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에는 전날 담임선생님과 대천으로 놀러갔던 작은놈이 돌아와 있었습니다. 큰 아이 인효 녀석은 전날 오체투지가 힘이 들었던지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너희들도 함께 가자."

"아빠 안 가면 안 돼?"

"그래도 바로 코 앞인디 가자, 1킬로도 안 남았어. 너희들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고, 세 살짜리 강산이도 거기 있는디… 오체투지 하기 힘들면 강산이 하고 놀아."

 

녀석들이 머뭇거렸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역했습니다. 아내가 나섰습니다.

 

"인상이는 금방 여행 다녀와서 힘들어하고, 인효도 어제 힘들었나봐, 너무 부담 주지 말어."

"그럼 너희들이 결정해."

"아빠, 안가면 안 돼."

"꼭 가야 되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너희들이 알아서 결정해."

 

결국 녀석들은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 녀석들은 머리통이 커지면서 점점 내 생각과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녀석들의 생각을 존중해 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계룡산 신원사를 눈앞에 두고 다시 오체투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체투지에 참여한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의미 있는 행동'을 함께 하지 못한 것과 목적지를 의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부쩍 힘이 들었습니다.

 

모든 길이 그런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의미며 목적을 갖고 몸과 마음을 굴리면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평소 그냥 생각 없이 길을 걷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전날 큰 아이 인효와 함께 했을 때는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했기에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큰 힘이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부터 계룡산 신원사까지 장장 180킬로미터에 달하는 그 먼 거리를 온몸으로 기어왔던 성직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오체투지로 검게 그을린 성직자들의 얼굴에는 힘겨움 속에서도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규현 신부님은 마중물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미소로 반기셨습니다. 오체투지를 시작하기 이틀 전쯤에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때까지도 신부님이 오체투지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읍에 빈집이 났다는데 연락 받았나?"

 

큰 일을 앞두고도 신부님은 우리 식구 보금자리 걱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문 신부님은 늘 주변 사람들을 일일이 챙겼습니다. 미소로 반겼습니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잠시 잠깐 만났을 때도 웃음으로 반겼습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수경 스님은 오래전 실상사에서 아주 잠깐 바람처럼 스쳤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실상사에서 한창 공동체 마을을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2박 3일 동안 실상사 공동체 사람들을 취재하러 갔다가 새벽녘 산책길에서 수경 스님을 잠시 스쳐 만났던 것입니다. 새벽 산책을 나선 스님은 지나가면서 아무 말 없이 내게 미소를 건넸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수경 스님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 미소가 떠오릅니다. 

 

오체투지를 한 차례하고 나면 사람들은 서로 서로 인사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보다는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신원사 중악단에 도착했을 때도 힘겨운 얼굴들이었지만 저마다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사히 마쳤다는 미소이기도 하였겠지만 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미소입니다. 순례단 성직자들이 온몸으로 뿌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순례단이 미소를 띠우니 사람들이 웃고 사람들이 미소를 띠우니 순례단이 웃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미소 하나로도 족한데 자기 생각을 구태여 강요하기 때문에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집에 가까웠던 훈시를 하게 되고...

 

하지만 중악단 행사를 마치고 사람들과 웃음으로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불안한 얼굴로 반겼습니다. 함께 오체투지를 하지 못했다는 중압감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말없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전날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고 종일 오체투지를 했기에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아버지'라는 존재를 과시하는 '일장 훈시'를 늘어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트집에 가까웠습니다.

 

"너희들 그럴 수 있는겨, 그동안 아빠가 잔소리 안하고 오냐오냐 했더니, 이눔 자식들이 마음 쓰는 게 엉망여, 신부님이 너희들 얼마나 귀여워하시고 좋아 하셨냐? 지리산에서부터 그렇게 힘들게 오셨는디 코빼기도 안내보이면 쓰것어, 그것도 바로 앞까지 오셨는디, 거기도 못 간다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생명이니 평화니 뭘 깨닫고 그러라는 게 아녀, 힘든 사람 반기는 게 사람의 도리 인겨, 공부를 아무리 잘하면 뭘 혀, 그런 거 소용없는 겨, 백날 천 날 공부하믄 무슨 소용이 있는 겨, 사람의 기본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 쓰잘떼기 없는 겨."

 

나는 아이들 옆에 있던 아내가 듣기를 바라며 간접적으로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그런 일이 부담이 된다면 앞으로 너희들도 아빠한티 뭘 요구하지 마, 너희들에게 부담 안 줄 테니 너희들도 아빠한티 부담 주지 마, 그런식으로 자기만 챙기고 살려믄 차라리 아빠하고 따로 살어."

 

고집불통 아빠의 느닷없는 어거지 '폭탄 선언'에 아이들은 죄인이 된 것처럼 두 눈을 꿈뻑꿈뻑 거리며 학교에 갔습니다. 열명 가까운 손님 대접하랴 정신이 없었던 아내 역시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돌아서서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후회막급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이틀 동안 마음을 다 잡아 나가며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 다닌 것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좋은 마음을 품는 것보다 화내는 마음을 털어내는 것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게 오체투지는 그저 형식적인 오체투지일 따름이었습니다. 오체투지순례단에게 고맙고 죄송해서, 그 어떤 의무감이나 부담감을 털어내기 위해 참여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체투지순례단이 내걸고 있는 진정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위한 오체투지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체투지순례단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어리석은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 놈'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이 기사를 끝내놓고 아내에게 진정 '오체투지’ 하듯 화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따뜻한 미소로 반겨야 할 것 같습니다.


태그:#오체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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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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