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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스푸트니크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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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94년 대학교 1학년 봄이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알게되었고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지루하고 따분해서 읽다가 던져버렸다. 그리고 10년하고도 4년이 더 지난 오늘 다시 이 책을 읽어보았다.

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요즘 나름대로 '하루키 다시 읽어보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한편씩 다시 읽어보기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왜 하필 이 책에 먼저 꽂혔는지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공갈빵같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껍질은 부풀어오를대로 부풀어올랐지만 막상 그 속은 텅 비어있는 공갈빵.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었다는 너무나 급격한 변화와 갑자기 시간이 남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일정,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 술자리, 모꼬지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나날이 재밌고 신기한 일이 펑펑 터지는 나날이었다.

책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는 하지만 술렁술렁 읽어넘기고 일쑤였고 책은 눈에 박혀있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온통 신나는 생각뿐이었다. 그 당시 스치듯 만났다 이내 헤어져버렸던 <스푸트니크의 연인>. 대략 15년만의 해후다.

이 소설은 작품속 '내'가 사랑하는, '소울메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스미레', 그리고 스미레가 사랑하는 '뮤'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의 감정이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인만큼 애정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애정소설이라기에 뭔가 부족하다. 애정을 포함한 인간 실존에 대한 소설이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은 나와 타인사이의 교감, 존재의미를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고독하고 또 고독해져라, 비로소 자유로울 때까지 

오로지 스미레와의 교감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나'이지만 스미레는 언제나 자신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스미레의 부재로 인해 '나'는 자신의 일부가 죽어서 사라져버렸다고 느끼는 '나'이지만 스미레가 없는 곳에서도 나는 나대로 살아나가게 된다. 여전히 학교를 나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스미레가 없이도 나름대로 제 삶을 혼자서 꾸려나가는 것이다.

완벽한 타인이 없듯 완벽한 동반자도 없다. 결국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그 길을 나란히 할 수는 있지만 그 길을 걸어야하는 것은 결국 자기 혼자인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줄 수도 없고 누구와 함께 해줄수도 없다. 어찌보면 금속처럼 차갑고 냉정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인간을 러시아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후예'라고 말한다.

지구의 인력을 단 하나의 연줄로 삼아 쉬지 않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스푸트니크의 후예들을 생각했다. 고독한 금속 덩어리인 그들은 차단막이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순간적으로 스치면서 영원히 헤어져버린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243쪽)

"스푸트니크라는 말이 러시아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건 영어로 Traveling Companion'이라는 뜻이예요. '여행의 동반자'... 어째서 러시아인은 인공위성에 그런 기묘한 이름을 붙였을까요. 외톨이로 빙글빙글 지구 주위를 돌고있는 불쌍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데." (135쪽)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않는다는 사실을." (161쪽)

인용문 3개 중 첫 번째는 '나'의 독백이고 뒤의 두 개는 '뮤'가 한말이다. 작품속에서 '뮤'의 존재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스미레가 사랑하는 40대의 여성인 뮤는 굉장히 신비스러운 인물로 묘사되고있다. 그녀는 20대에 경험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머리가 하루아침에 백발로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잃어버린 그 반절도 그녀가 평생 동안 함께 끌고 가야할 '스푸트니크'인 셈이다. 어쩌면 작가 하루키는 뮤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온통 이 책을 읽는데 바쳤다. 이 책이 이렇게나 매력적이었던가. 식사준비를 잊고 책에 몰두했다. 이 책은 정말 쓸쓸하고 고독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난 뒤 우울하지는 않다. 외롭거나 슬프지도 않다. 도리어 마음이 한결 정화된 듯했다. 고운 빗으로 마음결을 고르게 잘 빗은 듯한 정갈함이 든다.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정말 그렇다는 것을.

미치도록 쓸쓸할 때 읽고싶은 책

15년 전, 그 맘 때의 나와 비교할때 지금의 나는 일상이 그렇게 재밌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신나는 일이 '펑펑' 터지는 일도 없다. 사건사고나 펑펑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다. 저녁놀이 유독 붉은 요즘, 설거지를 하다 노을을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어딘가에서 죽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쓸쓸할 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독할 때 이런저런 상념으로 뒤척이며 잠 못 이룰 때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분주하고 화려한 일상속에서는 듣기 힘든 나지막하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히 '전쟁'을 방불케하는 나의 정신없는 아침 식사시간, 아이들을 유치원차에 태우고 손을 흔들어 보낸 뒤 뒤돌아서면 일단 한숨이 연기처럼 퍼져나온다. 아침의 가장 큰 숙제인 '아이들 유치원 보내기'가 일단 끝나면 그 뒤로 이어지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허탈함이 느껴진다. 출근준비, 근무, 퇴근…. 소소한 일정의 수정과 변동은 있겠지만 대개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똑같은 영화를 재탕삼탕해서 보고 있는 듯, 마치 세상에 나 홀로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가는 듯 고독해진다. 평생 똑같은 궤도를 그리면서 움직이는 인공위성처럼. 인공위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똑같은 궤도를 가야만 하는 것일까. 지구에서 희미하게나마 바라보고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아니면 고독해짐으로써 더욱 빛나기위해서일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고독한 존재다. 고독해짐으로써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 15년만의 해후에서 만난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가르쳐 주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자유문학사(1999)


태그:#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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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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