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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8일, 중화부활의 신호탄이 될 중국 백년의 꿈, 베이징올림픽이 개최되는 날이 밝았다. 베이징에서 약 1000km 떨어진, 주(周), 진(秦), 한(漢), 수(隨), 당(唐)나라 등 단속적이긴 하지만 12대 왕조에 걸쳐 1000년 이상 수도였던 시안(西安, 1369년 이전에는 장안長安)에서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일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 10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시안으로, 500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으로, 그리고 1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上海)로 가라는 말이 있듯이 천 년 고도 시안은 어딜 파도 유물이 나오는 역사적인 풍취가 물씬 느껴지는 도시이다.

 

중원의 보물창고(華夏寶庫), 산시역사박물관

 

아침 일찍 찬란했던 중화 문명의 파편들이 모여 있는 산시(陝西)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상하이박물관, 난징(南京)박물관, 허난(河南)성박물관(정저우鄭州)과 함께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산시역사박물관은 당나라 때 국자감(國子監)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시안 시내에서 멀지 않지 곳에 있었다.

 

중국정부가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국가급박물관에 대해 입장료를 받지 않아서인지 박물관 앞은 꽤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입장료 35위엔(약 6000원)은 시안 서민들에게 하루 일당보다 많은 거금일 것이고 또 35도가 넘는 무더위에 냉방시설이 잘 되어 있는 박물관은 역사기행과 피서를 함께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다.

 

가이드는 박물관 내에서는 규정상 문물에 대한 설명을 해 줄 수 없다면서 많은 유물 중에서 3가지는 꼭 보고 오라고 숙제를 내 준다. 하나는 채윤(蔡倫)의 종이 만드는 과정,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없는 주전자, 마지막 하나는 짐승머리모양의 금박이 옥잔(镶金兽首玛瑙杯)이었다.

 

연대순으로 깔끔하게 진열된 박물관에는 37만5천 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18개는 국보이며 1709개는 1급 문물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의 문물이 많았는데 '악단을 실은 낙타 당삼채(三彩载乐驼)'는 서역과의 활발한 교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북송(北宋) 시기 만들어진 뚜껑과 몸통이 하나인 '물을 거꾸로 붓는 청자빛 손잡이의 주전자(青釉提梁倒注瓷壶)'는 사자와 봉황 그리고 목단꽃이 어우러진 걸작품이다.

 

러시아의 저명한 고고학자 로스톱체프(Rostovtzeff, M. I)는 "고대와 현대의 차이는 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적인 것에 있다"고 했다는데 정말 예술혼이 깃든 고대인들의 정교한 문물들 앞에서 저가의 대량생산에 의지해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가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박물관 출구 옆에 방명록이 있는데 한 중국관광객이 "왜 베이징올림픽 기간에만 입장료가 공짜인가? 이왕 공짜로 하려거든 식사비까지 주시지!"라고 적어 놓아 웃음을 자아냈다. 정말 타이꾸어펀(太過分, 너무하다)한 중국인이다.

 

가이드를 울게 만든 옥 가게! 

 

박물관을 벗어난 버스는 병마용을 향하는 줄 알았더니 이내 옥을 파는 한 가게에 들렀다. 연수단에게 한 마디 통보도 없이 쇼핑센터에 들른 것이다. 연수단장님의 항의에 바로 철수해 차에 탔는데 다른 차의 가이드가 눈물을 흘리며 가게에 들르지 않으면 20위엔의 소개비를 받지 못한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상의 없이 쇼핑을 하게 한 것은 화가 났지만 가이드의 사정을 들으니 또 선생님들의 마음이 약해져 돌아오는 길에 쇼핑센터 한 곳을 들르기로 했다. 선생님들이 옥가게에 들어갔을 때 거리에서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가 있어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공기(沙包, 안에 모래를 넣어서 이르는 말)를 만들어 파니 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한 개에 5마오(毛, 우리돈 100원)라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공기놀이를 중국에서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였고 또 그것을 손으로 직접 바느질하여 만든다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연수단이 잠시 들렀다 철수했지만 사실 시안은 란티엔위(藍田玉)로 유명한 고장이다. 양귀비는 살이 쪄서 숨소리가 거칠고 또 몸무게가 있어 발자국소리가 컸다고 하는데 이를 숨기기 위해 옥으로 된 방울을 몸에 달고 다녔다고 하며 옥으로 된 팔찌 등을 애용했다고 한다.

 

시안의 8가지 이상한 것들(西安八怪)

 

버스는 시안시내를 벗어나 진시황릉과 병마용이 있는 린퉁(臨潼)으로 향했다. 우리 차의 가이드는 자신이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왈패 왕희봉(王熙鳳)과 성격이 비슷하다며 쇼핑센터사건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시안의 8가지 이상한 것들(西安八怪)'에 대해 신명나게 설명을 해댄다.

 

우선 음식은 면발이 허리띠처럼 두껍고(面条像腰带), 고추를 요리처럼 즐겨먹고(辣子是道菜), 솥뚜껑 같은 구운 떡을 먹으며(锅盔像锅蓋), 밥그릇이 커서 세숫대야와 구분하기 힘들고(碗盆难分开), 생활면에서 먼지가 많아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帕帕头上戴), 의자에 앉지 않고 주로 쪼그려 앉아 생활하며(凳子不坐蹲起来), 문화적으로는 시안 여성은 시안 사람과만 결혼하며(姑娘不对外), 귀한 빗물을 자기 집으로만 흘려 받기 위해 지붕이 반쪽인 집이 많다(房子半边盖)고 한다.

 

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여행사 총경리는 두 가지를 덧붙이는데 시안 사람들은 노래를 하면 울부짖는 듯 하고(唱戏吼起来), 아낙네가 나무를 오르는데 원숭이보다 빠르다(婆娘上树比猴子快)는 것이었다. 린퉁의 3가지 보물이 옥, 석류, 감인데 석류와 감을 따기 위해 나무를 잘 오르는 여인들이 많아서라고 한다.

 

병마용은 목숨을 건 예술혼의 정교한 걸작품들!

 

작은 야산처럼 보이는 진시황릉을 얼마 지나지 않아 병마용 입구 상가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진시황 석상이 우뚝 서 있다.

 

13살에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겁 없는 아이, 6국을 통일하고 자신이 3황5제를 능가했다며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한 당돌한 아이,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 병마용을 건설하며 200만 명을 동원한 잔인한 청년, 문자, 도량형은 물론 사상까지 통일하려든 불도저 같은 지도자, 자신의 제국을 무리하게 둘러보다 50세에 객사한 그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진시황 석상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병마용갱으로 가는데 길가에 늘어선 상가의 상인들은 찜통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바탕 왁자지껄한 호객소리를 쏟아 놓는다. 진입로며 매표소, 전시관은 2000년에 왔을 때보다 한결 깔끔해져 있다.

 

검표원은 40대가 넘는 선생님들이 버젓이 학생 할인표를 들고 입장하자 일일이 학생증 제시를 요구하며 심술을 부렸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문물전시관이었는데 그곳에는 진시황이 탔다는 동거마(銅車馬)가 전시되어 있다.

 

청동으로 정교하게 제조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는 우산모양의 햇빛가리개와 방풍설비를 갖춘, 이른바 당시의 냉난방차량이었던 셈이다. 수레바퀴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있는데 한 달 30일을 의미한다.

 

전시물 중에 청둥오리가 있어 가이드에게 의미를 물으니 땅을 밟고 살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오리는 땅에서 살다가 영혼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인간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영혼의 길잡이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죽어서의 일은 살아서의 일과 같다는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천하를 통일했지만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진시황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을 보호할 수호천사를 이렇게 지하에 은밀히 감춰놓고 있었던 것이다. 진흙으로 빚은 이 지하군단은 죽은 진시황을 위협하는 악귀들을 물리친 비장의 특수정예부대였던 셈이다.

 

1974년 3월 29일, 우물을 파던 중 발견된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주변에서 발굴된 181개의 매장갱 중 하나로 1.7m-2m 높이에, 무게가 200kg에 가까운 병사 도용이 8천여 개, 말 수백 필, 100여 대의 전차가 출토되었다. 이는 진시황이 즉위(B.C247년)에서 사망(B.C210년)까지 36년 동안 72만 명이 동원되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놀라운 것은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의 것이 없고 저마다 머리, 얼굴, 손동작이 다르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기본 골격을 만들고 세부적인 머리, 손모양은 도공이 직접 모델을 보고 만들었는데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도공의 목을 잘라 도용에 올렸다고 한다.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목숨을 건 도공들의 예술혼이 병마용에 녹아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계 최대의 지하군사박물관

 

제1, 2, 3호갱을 차례로 둘러보는데 군대에서 열병 사열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병마용갱은 '세계 최대의 지하군사박물관'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고대 전투대형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고 있다. 문득 사극의 세트장을 둘러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다가도 도용들의 자못 심각한 표정을 마주 대하면 나도 마치 전장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가로 230m, 세로62m로 규모가 제일 큰 제1호갱에는 6천 명의 보병과 160필의 말, 40대의 전차로 이뤄진 보병주력부대가 도열해 있다. 맨 앞 전위부대와 궁수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경계를 맡았고 3열씩 격량(隔梁, 격리된 담)으로 나눠 선 주력부대에 전차도 가세해 있다. 예전에는 사진촬영을 금지해 경비원 눈을 피해 몰래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이번엔 들고 간 캠코더가 너무 커서 촬영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또 경비원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2호갱은 기갑부대쯤 된다. 전차 한 대당 3명이 탔는데 가운데는 운전수고 좌우는 전투병이다. 말이 300여 필이니까 약 900명의 병사용이 있으며 전차 주변으로는 궁수들이 전차를 엄호하며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병력배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재미난 것은 이곳에 도굴의 흔적이 있는데 현지 가이드는 어떤 사람이 무사용을 훔쳐 집에 두었는데 다음날 색이 산화한 것을 얼굴이 바뀐 것으로 착각해 귀신인 줄 알고 놀라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제3호갱은 규모가 가장 작고 보존상태도 열악하지만 갱내에서 전쟁 때 점을 치며 사용하던 짐승뼈가 발굴되고, 복식의 형태로 짐작컨대 지휘부가 이곳에 위치했던 곳으로 보인다고 한다.

 

병마용은 원래 채색이 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발굴로 인해 색이 산화하였다고 하며 보존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진시황릉처럼 추가 발굴이 보류되어 있는 상태이다. 제1호갱에는 불에 탄 함몰흔적과 검은 대들보 등이 눈에 보이는데 항우(項羽)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8년 시라크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해 "피라미드를 보지 않으면 이집트에 갔다고 할 수 없듯이 병마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갔다고 할 수 없다"며 병마용을 세계 제8대 불가사의로 명명한 바 있다. 그러나 직접 병마용을 처음 둘러본 선생님들의 반응은 의외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의견이 많았다.

 

포스트모던한 현대, 웬만한 규모의 음식점만 가도 병마용의 병사들이 진짜처럼 진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줄지어 서 있는 마당에 진짜 병마용을 현장에서 본들 그 익숙함에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다. 복사본이 더 진본 같고, 수많은 복사본이 상업화되어 도처에 진열되다 보니 정작 2200년 전의 예술혼이 묻어 있는 불가사의한 진본을 대해도 조금은 시큰둥한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8월5일~14일까지 중국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태그:#섬서역사박물관, #병마용, #진시황, #산시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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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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