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일정 잡기

 

추석 이후 처음 맞는 금, 토, 일의 황금연휴.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젠 각자 짝들이 생겨 모임의 몸집이 커진 덕에 전처럼 전격적으로 장소와 시간을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한 번쯤 모여서 우의를 확인해야 한다는 명제에 모두 암묵적으로 공감했던 터라 이번 여행은 비교적 쉽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각자의 의견을 조합해 본 결과, 이번 여행의 조건은 크게 세 가지. 바다를 보고 싶다는 것이 그 첫 번째였으며, 휴양이 아닌 여행의 개념으로서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이었다. 

 

또다시 얼떨결에 길잡이의 역할을 맡게 된 나. 냉큼 지도를 펼쳐든다. 어디 보자. 우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를 찾는다 하니 서해가 될 것이요, 그 중에서도 경기도와 충남의 바닷가가 될 것이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바닷가로 와서 가을전어와 대하를 먹으면 되겠군. 그렇다면 여기저기 둘러 볼 곳은?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바닷가는 바닷가 그 자체가 관광지일 뿐, 그 주변의 관광지와 연계되어 있는 곳이 드문 탓이었다. 게다가 볼거리로 유명한 강화도나 영종도 등은 이미 다들 한 번씩은 다녀왔다지 않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고민하고 있던 내게 회사 선배가 한마디 건넨다. 자기 고향 보령은 어떻겠냐고. 비록 보령하면 대천해수욕장으로 유명하지만 근처 오서산이나 칠갑산 등 꽤 괜찮은 산도 많다고. 게다가 충남의 명산으로 일컬어지는 오서산은 정상의 억새밭으로 유명한데 지금이 딱 억새축제 기간이라는 것이다. 가을 전어와 대하 등이야 서해 모든 곳이 한창 맛있을 테고.

 

 

당장 인터넷으로 오서산을 찾아본다. 백두대간이 금북정맥으로 갈라져 서해에 빠지기 전 용트림을 한 번 하는데,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산이 오서산이었다. 비록 난 몰랐지만 오서산은 100대 산 안에 들어가는 명산이었다. 예로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았기에 까마귀 오(烏)자에 살 서(棲)를 붙여 '까마귀 둥지'라는 뜻으로 불렸다는 오서산.

 

그러나 인터넷 블로그를 여기저기 둘러본 결과, 오서산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정상에서 바라본 서해 낙조와 가을 이맘때쯤 절정에 달하는 억새밭이었다. 무엇을 더 이상 망설이겠는가.

 

여행 일정을 짜서 모임 게시판에 올렸다. 첫째 날에는 오서산에 올라 억새밭과 서해의 낙조를 보고난 뒤 무창포쯤에서 전어구이와 대하를 먹고 자고, 다음날에는 그 옆의 칠갑산 장곡사를 들른 뒤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 장고는 하지 않았지만 뭐, 이 정도면 훌륭한 여행 일정 아니겠는가.

 

충남의 명산 오서산

 

연휴의 첫째 날, 일어나자마자 짐을 꾸리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이렇게까지 서둘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웬걸 서해안고속도로는 서울의 초입부터 꽉 막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자동차의 행렬.

 

2년 전 같은 날이 떠올랐다. 2006년 10월 3일에도 난 아침부터 서둘러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고창으로 가고 있었고 차는 평택쯤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반대편이 뜸해지면서 역주행하기 시작하는 렉카와 소방차, 경찰차들. 뭐지? 서해대교 29중 추돌 사고였다. 겨우겨우 움직여 서해대교에 도착하니 서해대교는 소방차가 뿌려놓은 흰 거품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얽히고 설킨 불탄 차량들과 우왕좌왕 정신없는 사람들. 어쨌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끝도 없는 자동차의 행렬은 화성휴게소를 지나도, 서해대교를 지나도, 당진을 지나도 계속되었다. 장장 아침 7시부터 시작해서 2시까지 계속되는 7시간의 운전. 도대체 명절 때 귀성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운전을 하는 것인지 원.

 

고속도로는 서산을 지나자 그제야 뚫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광천IC에서 나와 오서산으로 향했다. 길 옆으로는 그 유명한 광천 새우젓과 광천 김과 관련된 간판들이 요란하게 서 있었고, 새우젓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만 산을 오르기에는 시간이 만만치 않은 터라 들를 시간은 없었다.

 

오선사 주차장 도착. 오서산의 첫인상은 완만하고 무난했다. 친구의 말마따나 오서산은 어렸을 적 미술시간에 그리던 전형적인 산의 모습처럼 크게 퍼진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순하게 보였다.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운전했던 터라 처음부터 막걸리 한 잔에 파전을 먹고 오르기 시작한 오서산. 술을 먹었기 때문일까, 결코 쉽지 않은 등정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건만, 막상 오르려 하니 오서산의 경사는 40도에 가까웠다. 백두대간이 서해로 빠지기 전 용트림을 했다고 하더니 역시 괜한 말이 아니었다.

 

등산로 중턱에 위치한 오서산 정암사. 비록 정선의 정암사와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찰의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아담했다. 대신 사찰은 오고가는 등산객의 유용한 쉼터가 되고 있었는데, 특히 사찰에서 키우는 듯 한 삽살개 두 마리가 등산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정암사를 지나 다시 산을 오른다. 경사는 더 급해졌고, 덕분에 조금만 올라도 발아래 풍경은 금세 달라져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드디어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고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 서해 바다였다. 오호라, 정상에 서면 억새밭에서의 서해 일몰을 감상하게 되는 것인가.

 

등산로를 감싸던 높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낮은 잡목들이 등장한다 싶더니, 드디어 전방에 오서산의 능선과 은빛의 억새밭이 펼쳐졌다. 살랑대는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물결. 가을의 황금들판을 바라볼 때 느끼는 풍족함 대신, 약간의 애잔함이 배어 있었지만 그래서 더 가을의 정취가 묻어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땅거미 질 무렵, 뉘엿뉘엿 기우는 해 덕분에 일렁이던 은빛 물결은 금빛 물결로 변해가고 있었다.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달 밝은 밤의 억새밭 역시 장관일 터. 시야가 조금만 선명했어도 보였을 저 멀리 서해의 일몰이 계속해서 아쉬웠지만, 본디 여행이란 미련을 남기고 떠나는 법, 다시 찾아 올 오서산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 찍는 족족 화보가 되는 그 마술 같은 풍경에 반해 오서정을 맴돌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데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짧은 터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여러 명이 그 험했던 등산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오서산 정상에서의 일몰은 다 좋은데 하산 문제가 흠이려니.

 

어찌 내려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산악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백발의 노신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 정상 능선까지 군용도로로 보이는 길을 따라 올라왔다는 그들. 다행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올라온 등산로 대신 그 노신사들이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어두운 산길, 좀 많이 걸어도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최우선이지 않겠는가.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산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밝을 때라면 산 정상까지 2차선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길을 닦은 그 누군가의 무식함에 혀를 끌끌 찼겠지만, 짙은 어둠이 깔린 산에서 그 무식함에 기대어 내려오는 주제에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그렇게 산 정상까지 길을 닦아버리는 이 시대의 천박함을 가슴 아파하는 수밖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오랜만에 걷는 어두운 산길.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덕에 별이 쏟아질 것만 같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당연하다 생각했을 저 별빛을 보기위해 우리는 현재 얼마나 큰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 별은 별이요, 달은 달일 뿐인데 왜 우리는 그 단순한 진리 앞에서도 진리를 찾지 못해 야단일까?

 

이윽고 도착한 주차장. 어두운 산길을 걸었음에도 사고 나지 않은 바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마도 쉽지 않은 발걸음을 옮긴이들에 대한 충남의 명산 오서산의 선물이려니.

 

다시 차를 몰아 선발대가 먼저 가 있는 무창포로 향했다. 일몰 쯤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햇볕에 산란되는 바닷물결이 가장 아름다웠던 무창포였기에 항상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무창포, 그 지명의 음운도 아름답지 않은가. 과거 조선시대 세곡미를 실어 나르던 포구라 하여 무창포라 불린다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그 입에 착 달라붙는 음운이 좋았다.

 

무창포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벌써 친구들이 대하구이에 전어구이, 전어회무침을 시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 집나간 며느리도 다시 오게 한다는 바로 그 전어구이. 역시 모든 음식은 제철에 먹는 것이 가장 맛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약간의 음주와 함께 다시 긴긴밤 못 나누었던 이야기를 이어간다. 힘들고 고단한 이 시대,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친구들. 그들이 있어 외롭지 않은 10월의 밤이 깊어만 간다.

 

화려한 단풍의 계절, 외려 수수하고 담백한 가을의 정취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충남의 명산 오서산을 추천한다. 참, 정상에서 일몰을 보고 싶으시다면 그 날 시야거리와 일몰 시간, 등산로를 확인하시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오서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