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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늘이 높다. 안개가 걷히자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뭉게구름도 두둥실 떠다닌다. 이런 날씨를 두고 전형적인 가을날씨라 하는가 싶다. 해가 중천에 떴다. 촉촉한 이슬방울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밤새 수도 없이 내렸을 작은 물방울들, 맑은 햇살과 함께 영롱한 빛을 발하다 어느새 숨어버린다.

 

아내가 마당에 멍석을 편다.

 

"햇볕이 이렇게 따사로울 수가! 이젠 햇살이 좋네!"

 

며칠 전 거둔 끝물고추가 아내 손에 널린다. 땅콩이며 토란 줄기도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차지한다. 빨간 고추, 하얀 땅콩, 녹색 토란줄기로 마당이 가득하다. 우리 집도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들깨밭에 노란 단풍색이 들다

 

"여보, 무시래기도 삶아 말릴까?"

"무청은 김장 때 가서 말려야지. 왜 지금 서둘러?"

"아니에요. 무 겉잎이 쳐지던데요. 겉잎을 미리 따주면 밑도 실해지고…."

"그럼 당신이나 열심히 알아서 하라구."

"당신은 뭐할 건데요?"

"나야 할 일이 많지!"

 

아내는 모처럼 밭에 나와 일 좀 하려는데, 손발이 안 맞는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낫을 찾아든 나에게 묻는다.

 

"당신, 깻대 베려고? 좀 이르지 않나요?"

"아랫밭 할머니네는 벌써 베었던데. 빨리 베 놓지 않으면 바닥에 깨가 쏟아진다고 했어!"

 

아내가 들깨밭을 둘러본다. 며칠 상간에 일어난 변화가 놀라운 모양이다. 들깻잎이 누런 잎으로 변화되었다. 들깨밭에 노랑 단풍잎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얼마 전만해도 싱싱하던 녹색 잎이 시들시들하다. 꽃이 진 자리에는 씨가 여물어 갈색을 띠기 시작했다.

 

낫을 들었다. 곁에서 볼 때와는 달리 똑바로 선 것 같은 깻대가 정상이 아니다. 장마철 거센 비바람에 휘고, 엎드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스스로 일어서 고개를 쳐들고 제 몸을 추슬렀다. 어렵고 모진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제 역할을 다 해낸 힘은 어디서 왔을까? 신비롭다.

 

깻대 밑동을 잡고 하나하나 베어나간다. 여문 알갱이가 쏟아질까 조심스럽다. 먼저 여문 놈들은 낫으로 건들자 몇 알씩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어쩌랴. 허실이 있을 수밖에. 아직 덜 여문 것들도 더러 있다. 남겨둘까. 녀석들은 마르면서 여물겠지! 낫을 든 김에 죄다 베었다.

 

얼마 베지 않았는데도 허리가 아프다. 겨드랑이에는 땀이 밴다. 세상에는 만만한 일이 없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내는 "들깨 베는 일도 일이예요!" 한다.

 

좀 늦게 모 얻어 심었는데도 잘만 여물었네!

 

아내가 가져온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아래 밭에서 당신네 일을 하다 말고 할머니께서 오셨다. 오시자마자 말씀이 푸짐하시다.

 

"요집도 들깨 베네! 그래, 지금 거두면 똑 참이야. 실하게 여물었남?"

"털어봐야죠. 깜냥에는 많이 달린 것 같아요."

"아냐. 깻대를 보니 꽤나 수확하겠는 걸!"

"그래요? 별 기대 안했는데."

 

할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기분이 좋다. 그런데 정말 많이 거둘 수 있을까? 내심 기대가 된다. 할머니는 내가 베어놓은 깻대가 맘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들깨는 말이야, 밑동까지 싹싹 베지 않아도 돼! 그렇게 베면 말리는데도 더디고, 터는데도 일이 많아지지! 지금부턴 잘 베라구!"

 

할머니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가 그럴듯하다. 씨가 달린 데만 베면 말리기도 쉽고, 들깨를 터는데도 수월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부산만 떨지 농사일은 아직 멀었나 보다. 아직 깻대 베는 요령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내 역성을 든다.

 

"할머니, 그래도 애 아빠 훌륭한 농부죠? 일머리는 몰라도 농사짓는데 열심이잖아요?"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땅 놀리지 않고 들깨모를 얻어다 이만큼 자라게 했으니까!"

 

할머니 말마따나 우리 들깨농사는 거저 지은 거나 다름없다. 농사도 다 때가 있는 법! 감자 캔 자리에 들깨를 심어야 하는데, 우린 들깨 모 붓는 시기를 놓쳤다. 거기다 싹트는 것도 더뎠다. 우리는 영락없이 들깨농사를 포기해야했다. 이때 할머니 귀띔이 큰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들깨는 좀 늦게 심어도 거두는 시기는 별반 차이가 안나! 모가 어리다고? 괜찮아! 그리고 모 부족하면 우리 밭에 있는 거 죄다 뽑아 심으라고. 우리 밭에 다 옮겨 심고 남은 거니까."

 

할머니 도움으로 다른 집보다 늦은 들깨농사이다. 우리 들깨 모는 어리고, 얻어다 심은 모는 키가 컸다. 모종이 좋지 않아 처음에는 제대로 구실을 할까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잘 자랐다.

 

작물은 거둘 때까지 열두 번도 더 변한다더니 우리 들깨밭도 그랬다. 모를 옮겨놓고 사나흘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러다 한 차례 비를 맞더니만 깨어났다. 그리고는 몇날 며칠을 시나브로 크다가 어느 순간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데 장마 통에는 모진 비바람에 푹석 주저앉았다. 그런데 눕혀진 줄기가 고개를 쳐들고 질긴 생명력을 발휘했다. 잘 자라는 줄기를 벌레가 부러뜨리기도 했다.

 

모를 옮기고 한두 차례 풀을 뽑아준 것 외에는 달리 손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에 거둘 수 있다니 고맙고 또 고맙다.

 

고맙게 자란 들깨, 참 요긴한 먹을거리이다

 

들깨는 자라면서도 소중한 먹을거리를 주었다. 깻잎이다. 봄채소가 떨어질 즈음 깻잎은 쌈 채소로 손색이 없었다.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 맛도 좋고 향도 좋았다. 아내는 영양도 만점이라고 했다.

 

보름 전, 아내는 깻잎을 한꺼번에 엄청 따서 장아찌를 담았다. 깻잎장아찌는 밑반찬으로 짭조름한 맛이 그만이다. 한 잎 한 잎 쟁여쌓고, 거기에 간장을 달인 뒤 식혀 붓는다. 여기에 붉은 고추, 풋고추, 양파, 마늘을 함께 넣어 담은 뒤 김치냉장고에 두고 먹으면 오래 먹을 수 있다.

 

두어 시간 깻대를 베었다. 한 며칠 잘 마르면 아내와 함께 토닥토닥 두들겨 털어야겠다. 소중한 알곡이 쏟아질 것이다.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마저 건네는 아내가 호들갑이다.

 

"여보, 우리 집에도 곧 깨가 쏟아지겠네! 행복과 함께…. 그나저나 들깨가 얼마나 나올까? 기름도 짜고, 남은 것은 갈아 나물도 무치고, 토장국도 끓이고요!"

 

맑은 가을하늘 아래에서 아내는 벌써 입으로 들기름 넣어 나물을 무치고, 들깨 갈아 구수한 된장국을 끓이고 있다. 깨 쏟아지는 고소한 냄새가 풀풀 나는 것 같다.

 


태그:#들깨, #들깻잎, #깻잎장아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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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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