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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땅끝 해남은 조선 중기 호남이 낳은 대시인이자 조선조 시조문학을 갈무리 한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유적지 녹우당이 있는 곳이다. 고산 선생은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벽지에 있는 유배지에서 보냈다. 하지만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음양·지리에도 통달했으며, 특히 시조는 정철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인자한 행실과 검소절약을 제1로 삼았던 고산 선생의 발자취를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보자. 선생은 전란과 당쟁이 소용돌이치는 사회현실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을 가진 선비로 조선시대 손꼽히는 지성이었다. 정치의 중심에 서서 나랏일을 볼 때에도 국가경영의 대도를 폈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선생의 삶은 유배(세 차례)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늘상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노비와 어민, 농민, 빈자 등 여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인생의 덕목을 벼슬에 두지 않고 수신(修身)과 근행(謹行), 적선(積善)에 두었음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녹우당이야? 녹우단이야?

 

지난 2일(목) 낮 12시 55분. 고산 11대 직손 윤재걸(61·언론인) 시인도 만나고, 우리 국문학사의 큰별 고산 윤선도 선생의 그림자를 밟으려 서울고속터미널에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3시간 반 남짓 걸려 도착한 광주고속버스터미널 앞에는 윤 선배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광주에서 1시간 가까이 볼 일을 마친 우리는 곧장 윤 선배 생가가 있는 해남 옥천 동리로 향했다. 그날, 윤 선배 생가에서 고산문학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3일(금) 오후, 제8회 고산문학축전(9월 27일~10월 4일)이 열리고 있는 해남 읍내로 나서는 길에 고산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녹우당에 들렀다.

 

저만치 녹우당(사적 제167호) 앞에는 황금빛을 살짝 내비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파수꾼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근데, 한 가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은 안내표지판과 표지석에 '녹우단'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특히 표지석에는 '녹우당'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누군가 억지로 '녹우단'으로 바꿔놓았다.

 

이에 대해 국가공인예절지도사이자 해남향교 전교 김금수씨는 "당과 단은 같은 격이지만 단이 당보다 조금 더 폭넓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김씨는 "건물에 '전'(殿)자가 있는 것은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건물이다. 왕을 부를 때 전하(殿下)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갈바람에 고산 선생의 그림자가...

 

"절에서도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건물에만 '전'(殿)자를 붙인다. 부처님 계신 건물을 대웅전, 극락전, 적광전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궁궐이나 일반 여염집에서는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 하더라도 왕이 아닌 이상 전자를 붙이지 못한다. 따라서 '당'(堂)자나 그 아래인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등 다른 글자를 붙여 격을 낮춘다."

 

김씨는 "녹우당은 고산 유적지 안에 있는 녹우당 한 건물만 가리키는 말이고, 녹우단(壇)은 고산 유적지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라며 "해남군에서도 고산 유적지를 찾는 군민들과 관광객들이 헛갈리고 있어 통일된 문구로 바꾸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녹우당은 효종이 내린 것으로 현판은 공재 윤두서 친구인 옥동 이서가 동국진체로 썼다.

 

돌담길을 옆에 끼고 쭈욱 늘어선 녹우당, 안사당, 고산사당, 어초은 사당, 추원당, 유물관 등을 골고루 둘러보고 난 뒤 해남 읍내로 향한다. 황금빛 들판을 부채살처럼 쫘악 펼쳐놓고 있는 해남 읍내 곳곳에는 해남문학축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고산 선생의 그림자처럼 갈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2008 고산문학축전'은 지난 9월27일 고산유적지 안에 있는 녹우당에서 열린 전국 청소년 백일장을 시작으로 녹우당 견학, 고산시가 낭송대회, 고산문학의 밤, 서예체험, 그리기체험, 도예체험, 퍼포먼스, 가훈 써주기, 고산문학대상, 해남문화원 소속 실버풍물단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일주일 내내 펼쳐지고 있다.

 

 

고산 기리는 시조에 고산 같은 올곧은 사상 없다?

 

우리는 이날(3일) 오후 4시부터 오후 7시까지 3시간 동안 해남문화원에서 열린 '전국 정형시인 시조문학 어울림 한마당'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김학성 교수(성균관대)의 '고산 윤선도 시조의 미적 성취와 그 가치'를 시작으로 고산시가 '만흥' '어부사시사' 가야금 병창, 윤금초 작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입체 낭송, 시조창, 판소리(수궁가) 등으로 이어졌다.

 

전국에서 참가한 시조시인 김영완, 문수영, 박지현, 박희정, 이교상, 이태순, 임채성, 정평림, 최오균, 홍준경 등의 시조도 공연 중간 중간에 곁들여졌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고산 선생을 기리는 행사장에서 읽는 시조시인들의 시조 내용이 한결 같이 고산 선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한 시조였다는 점이다.   

 

행사가 끝나자 일행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해남 읍내에 있는 널찍한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 차림은 전어회덮밥이었는데, 소주 한 잔 곁들여 먹는 전어회 맛이 새콤달콤 쫄깃하게 씹히는 게 맛이 아주 좋았다. 저녁을 먹은 뒤 길라잡이와 윤 선배는 곧바로 일행들과 헤어져 생가로 돌아와 고산문학축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4일(토) 오후 3시30분. 길라잡이는 이날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고산문학대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피스텔에 있는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후배에게 연락한 결과 5일(일)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황금빛 들녘이 끝없이 펼쳐지는 고속버스 차창에 앉아 고산문학대상 심사평과 수상소감을 읽는다.

 

 "시조는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

"사십 평생을 숯막서 숯하고 살아온 외길 인생이제 숯막 일은 버릴 게 하나도 읎어 나무 태워 숯 만들지 연기 모아 목초액 받지 가마에선 찜질허지 또 남은 재는 거름 허지 이게 바로 백 프로 무공해 산업인 기라

 

고생한 거야 어찌 말로 다해 그래도 이 일로 다섯 남매 학교 보내고 집 장만허고 건강 돌보고... 달리 부러울 게 뭐꼬? 숯막 일 중에는 불 보기가 상일인디 굴뚝 연기 보고선 불구녕을 조절허지 불 떼고 대엿새 지나 파란 연기가 사그러들믄 얼추 다 탄 거야 말은 쉽지만 이거 감 잡기가 그리 만만찮어

 

한 오 년 꾀 안 피우고 하믄 불이 조만치 보일러나?" - 박기섭 연작사설시조집 <엮음 수심가> 중 '숯막-서석구(67)'

 

"박기섭의 시 여러 국면에는 따라지 인간군상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인본주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고, 질퍽한 리얼리스트의 기질이 배어난다는 것을 가늠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박기섭 시조가 내포하고 있는 남다른 미덕이다." - '제8회 고산문학대상 심사평' 몇 토막


"지구촌 시대, 문화의 침윤과 혼융이 진전될수록 전통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시조는 우리 전통문학의 정수이자 우리말과 우리 정서의 결속체입니다. 시조 장르 자체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 시조는 형식에 갇힌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춘 시가 양식입니다." - '수상소감' 몇 토막

 

1천만원의 상금과 상패가 주어지는 제8회 고산문학대상은 대구 출신인 박기섭 시조시인(54·KT 근무)에게 돌아갔다. 수상작은 연작 사설시조집 <엮음 수심가(愁心歌)>이며, 심사는 시인 신경림, 정진규, 윤금초가 맡았다. '엮음 수심가'는 평안도 민요로 긴 사설을 마치 이야기하듯 엮어나가다가 끝에 가서 수심가 가락으로 늘어뜨려 여며주는 것이 특징이다.

 

시조시인 박기섭은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나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키 작은 나귀 타고> <묵언집> <비단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엮음 추심가>가 있다. 대구문학상, 중앙시조신인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대구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


태그:#고산문학축전, #녹우당,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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