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끝에 보이는 곳이 전망대다. 전망대 주변 평지에서 주민들이 말을 방목하고, 농사를 짓는다.
▲ 송악산 전망대 근처 끝에 보이는 곳이 전망대다. 전망대 주변 평지에서 주민들이 말을 방목하고, 농사를 짓는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제주도 서남쪽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정표는 해안 가까운 곳에 우뚝 솟은 산방산이다. 이 산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형제섬이 내다보이는 절경으로 인해, 전국에서도 아름다운 도로로 손꼽힌다.

이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3km쯤 가면, 대정읍 상모리에 속해있는 산이수동 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이물'이라는 우물을 끼고 있어서 산이수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마을에는 작은 포구가 있다. 과거에는 포구의 이름이 '산이물개'였는데,  마라도행 유람선은 이 작은 포구에서 출발한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
▲ 산방산 송악산에서 바라본 산방산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산이수동 마을 서쪽 해안에는 남쪽으로 곶이 길쭉하게 돌출된 자리에, 높이 104m의 오름이 버티고 있다. 소나무가 많아서 '솔오름'이라 부르던 오름인데, 최근에는 이 이름을 한자로 차용해서 '송악산'이라 부른다.

과거 산이수동 마을 주민들에게 송악산은 서풍과 파도를 막아주는 의지였는데, 지금은 송악산 절경이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주민들에게 수입을 만들어주고 있다.

송악산의 동쪽에 있다. 마라도행 유람선은 이 포구에서 출발한다.
▲ 산이수동 포구 송악산의 동쪽에 있다. 마라도행 유람선은 이 포구에서 출발한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조선 초기에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송악산을 가리켜 "대정현 남쪽 15리에 있다. 세속에서는 '저별리(貯別利)'라 부른다. 산의 동쪽, 서쪽, 남쪽이 바다와 닿아서 석벽이 둘러있고,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직경이 백여 보가 된다"고 했다.

송악산은 둥글고 완만한 봉우리 위에, 새로운 봉우리들이 형성된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 두 차례 이상의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말이다.

폭발당시 쌓인 응회암 지층이 노출되었다.
▲ 송악산의 서쪽 지층 폭발당시 쌓인 응회암 지층이 노출되었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첫 번째 폭발은 바다 밑 뜨거운 열점에서 일어났다. 해양지각을 뚫고 솟아오르던 뜨거운 마그마가 해수를 가열하니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솟아오르면서, 폭발은 증폭되었다. 이 대규모 수성 분출은 수증기와 함께 쏱아진 화산쇄설물이 둥근 모양의 섬을 형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이 섬 가운데서 다시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때는 수성 분출이 아니라 마그마가 직접 분출했다. 당시 마그마와 함께 분출된 화산 쇄설물들이 쌓여 송악산 정상부 봉우리와 그 주변의 퇴적층을 만들었다. 이후, 폭발에 의해 형성된 응회암 퇴적층 중 바다와 접한 남쪽 부분이 파도에 의해 침식을 당하자,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이 형성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파도를 맞도 있다.
▲ 절벽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파도를 맞도 있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산이수동 마을에서 송악산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포장되어 있다. 그래도 주변 해안절경을 두루 감상하고, 운동도 할 겸해서 차를 입구에 세워두고 걸었다.

송악산 남쪽에 병풍을 세워놓은 것 같은 절벽과 아래는 파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일찍이 백호 임제는 이 절벽의 형상을 가리켜 "기괴한 것은 끊어질 듯한 절벽이 높이 천 길이나 솟았는데, 모두 파도가 깎아먹은 형상이었다"며 감탄한 바 있다.

입구에서 완경사 길을 따라 절벽 건너 바다를 바라보며 20분 정도 걷노라니, 좁은 평지가 이어졌다. 그 평지위에 주민들은 농사도 짓고,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또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좁게 이어지는 평지 도로가 끝나갈 즈음에, 망원경 시설을 갖춘 전망대가 나왔다.

송악산 전망대에 이르기 전에 평지가 나온다. 멀리 왼쪽에 보이는 섬이 마라도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가파도이다.
▲ 평지 송악산 전망대에 이르기 전에 평지가 나온다. 멀리 왼쪽에 보이는 섬이 마라도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가파도이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제주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순무어사의 명을 받고 제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1601년(선조34년) 9월 22일에 제주에 도착하면서부터 이듬해 정월 24일까지 제주에 머물며 민정을 살폈고, 제주 곳곳을 순회하며 민폐를 시정했다. 김상헌은 1601년 8월 어사에 명을 받으면서부터 이듬해 2월 상경할 때까지 일기를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을 <남사록>(南傞錄)이라 한다. 그가 송악산을 구경한 후 느낀 소회를 남긴 남사록의 기록이다.

'산은 멀리 뻗는 산세가 없고 바다에서 툭 튀어 일어서 있는데, 둘레가 겨우 몇 십리이다. 울멍줄멍하고 울퉁불퉁한데 동남쪽  한 구석은 평평하고 넓은 것이 마치 제단과 같다. 몇 백  명이 앉을 만한데 그 아래는 높은 절벽이다. 몇 만 길도 더 될 것이다. 우뚝하게 서 있어 바닥을 볼 수도 없다. 큰 파도가 거세게 솟아오르고, 멀리 바라보니 하늘과 이어졌는데 한점의 섬도 없다.

하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바다 갈매기가 암벽의 중간에 와서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그때의 목사가 그 병아리를 잡으려고 큰 새끼줄에다가 한 사람을 매달리게 하여 내려뜨렸습니다. 끌어당기려고 할 때에 갑자기 새끼줄이 끊어져, 그 사람은 뼈가 부서져 바다에 가라앉았는데,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모릅니다"한다. 무부(武夫)의 방종한 욕심이 거리낌이 없어서 사람의 목숨을 장난하며 가지고 노는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이런 따위가 많다.'

평지위에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모여있다.
▲ 송악산 봉우리 평지위에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모여있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훗날,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은 척화의 중심에 서서 청나라에게 굴욕하기를 거부했다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제주의 유림들은 그가 어사로 부임하는 동안 민폐를 크게 시정한 점과, 존명반청의 입장을 굳건히 지킨 점을 받들어, 5현에 포함시켜 귤림서원에 배향했다. 

청음은 하인에게서 '절벽에서 새끼줄이 끊어져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고산 수월봉에 전해지는 '수월이와 녹고의 전설'과 비슷하다. 수월봉과 송악산이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지형의 모양이나 그 생성과정까지 비슷하니, 한 쪽의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청음의 표현대로 '평평하고 넓은 것이 제단과 같은' 곳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봉우리 정상을 향해 걸었다. 이쪽 정상에 오른 듯 하면, 다른 정상이 보이고, 그 곳에 오르면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 '울멍줄멍하고 울퉁불퉁하다'는 청음의 표현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송악산 분화구는 크고 깊다. 그 안에는 붉은색 스코리아로 가득차 있다.
▲ 분화구 송악산 분화구는 크고 깊다. 그 안에는 붉은색 스코리아로 가득차 있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송악산 정상부에는 둘레 500m 정도에 깊이 약 80m에 이르는 분화구가 있는데, 그 경사각이 70도에 이르러 매우 가파르다. 분화구가 보통 것보다 크고 깊은 것을 보아, 이 분화구가 만들어질 당시 폭발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분화구 안에는 붉은색 스코리아(제주 사람들이 ‘송이’라고 부르는 붉은색 자갈)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송악산 절벽에 파도가 부딪치는 높이 즈음에, 군데군체  큰 굴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태평양전쟁당시 일제가 군사적 목적으로 섬 주민들을 강제동원해서 파 놓은 진지동굴들이다.

군데군데 진지동굴이 보인다.
▲ 송악산 동쪽 군데군데 진지동굴이 보인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에서 최후 방어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제주로 일본군 병력이 집중되어, 1945년 1월까지만 해도 1000명에 불과했던 제주주둔 일본군 병력이, 8월이 되자 8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군은 제주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섬 전역을 진지로 만들었다. 송악산 절벽에 남아있는 15개의 동굴도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제는 미군 군함을 상대로 자살특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강제동원해서 이 동굴을 팠다. 군국주의자들에게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은 삽과 괭이만 들고 굶주림 가운데서 고역에 시달려야 했다. 주민들 가슴 속에는 송악산 절벽에 남아있는 진지동굴 못지않게 깊은 상처가 남아있으리라.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 말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 장태욱

관련사진보기


오름 중간중간에 방목중인 말들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워보였는지, 부러운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청음도 이 곳을 방문해서 남긴 시에 "문득 바람에 나부끼어 신선이 된 듯, 허공을 넘어 바로 봉도(신선이 살고 있는 섬) 언덕에 이르고 싶네"라고 했다.  그가 일찍이 경계한 것처럼 무사들의 방종이 없었더라면, 나도 송악산에서 반나절동안이나마 시름을 잊고 신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태그:#송악산, #상모리, #진지동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