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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은 후에 아무리 청결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준다 하여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기는 내 책 한편을 읽어주고 내 책 한 부분이라도 베껴두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꼭 이점을 새겨두기 바란다." - 책속에서

자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는 지독한 책벌레는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또 "책은 견실한 세계로 순수하고 이롭다, 그 세계는 살이 되고 피가 되는 튼튼한 덩굴손이 있어 즐거움과 행복이 무성해진다"라며 시시때때로 자손들에게 책읽기를 강조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목민심서>를 다산의 대표작으로 손꼽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수백 권 저술 중 "나머지 책들은 모두 없앤다 해도 이 두 권만큼은 남기고 싶다"며 <주역사전>과 <상례사전>을 내세운다. 다산이 "왼쪽 팔이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이 아주 형편없이 나빠져 오직 안경에 의존하면서 썼다"는 그 책들이다.

겉그림
▲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겉그림
ⓒ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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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의 저자, 혹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용학자로 만나던 다산 정약용을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동아시아 펴냄)을 통해 한 마리 지독한 책벌레로 만날 수 있음이 새삼스럽게 좋다. 어떤 책에서든 만나면 참 반가운, 내가 좋아하는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절에 다산과 함께 정조의 책동무였던, 책을 너무 읽은 나머지 눈병까지 나고 말았다는 이덕무의 이야길 읽으며 청소년기 한때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재미있게 읽은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암굴왕은 일본식 책 제목)의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처럼 감옥에 얼마간 갇혀도 좋으니 책만 실컷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몽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책이 얼마나 좋았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6개월이나 1년 정도, 조용한 곳에서 책에 흠뻑 빠져보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급도 꼬박꼬박 받으면서 조용하고 풍경 좋은 곳이라면 더더욱 좋을 텐데….' 이런 호사스러움을 종종 품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결코 이루기 힘들 나의 이런 호사스런 꿈이, 조선 시대 이미 제도화 되었었단다. 세종대왕의 아이디어로 창설된, '독서당(讀書堂) 제도'가 그것이다.

신하들에게 책 읽도록 창설한 세종의 '독서당제도'

"세종은 1426년 12월, 총명 준재한 젊은 문신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책을 읽도록 틈(여가)을 주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만들었다. 세종이 독서당 제도를 설립한 것은 유능한 인재를 길러 뒷날 크게 쓸 요량이었다. 여기에는 인재를 배양하고 문풍을 진작하려는 왕의 깊은 뜻이 배어 있었다. 동서고금에 임금이 유능한 문사들을 뽑아 전문적으로 책을 읽도록 집을 마련해주고 후원한 사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싶어도 시간을 내기 어려운 젊은 신하들에게 풍광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책을 읽도록 한 임금의 처사는 남다르다. - 책속에서

소문난 책벌레였던 세종 또한 순수한 자연인으로 돌아가 오직 책만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창설 당시 국가 정책의 일환이었던 독서당 제도는 전통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까지 70여 년 동안 유지된다. 또 다른 문헌에 '400여 년 동안이나 국가에서 문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크게 기여했다'고 기록된 경우도 있다.

[저자] 김삼웅은 누구?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다. 2008년 현재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친일정치 100년사><한국 민주사상의 탐구> <해방 후 양민학살사> <금서> <한국필화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겨레유산 이야기> <보는 사람 없어도 달은 거기 있는가> <왜곡과 진실의 역사>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위서> <白凡 金九全集>(12권, 공편)<박은식, 양기탁 전집>(10권, 공편)<단재 신채호전집>(9권, 공편)<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박열 평전>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등이 있다.(책표지 참고)

2008년 상반기부터 <오마이뉴스>블로그에 '안중근 평전'을 연재했고, 10월부터는 '장준하 평전'을 연재중이다.

그렇다고 이 독서당제도가 항상 유지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흉년이 들거나 전란 중에는 잠시 중단되기도 했고 폭군들이 중단시키기도 했다. 세조와 연산군이 대표적인 폐지자다. 

세종 24년에 2차로 선발된 독서당 출신 대부분이 훗날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고, 세조는 비위에 거슬리는 독서당 제도를 폐지하고 만다. 이후 성종이 부활시키지만, 현명한 선비들이라면 작정하고 죄다 내쳤던 연산군에 의해 독서당은 궁인들의 유희 터로 전락하고 만다.

성종과 중종은 독서당 제도를 잇고자 노력한 왕들이다. 초창기와 달리 아는 사람들의 독서당 방문이 늘어나 책읽는 시간을 방해받는 일이 잦자 성종은 서울 근교의 유명 사찰을 이용하는 '상사독서제'를 마련한다. 하지만 서거정을 비롯한 유학자들의 반대로 '남호독서당'을 대체 개설, 독서당의 전통을 이어간다.

중종은 갑자사화 여파로 한때 폐지된 독서당을 부활, 정업원을 독서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게 한다. 하지만 "책 읽을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두모포라는 사람의 정자를 고쳐 독서당을 설치, '동호독서당'이라는 당호까지 직접 짓는다.

세종과 정조는 소문난 책벌레들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책벌레들은 대부분 이 두 왕의 책동무인 경우가 많다. 이 책벌레들은 세종과 정조가 조선시대 문화와 과학의 꽃을 활짝 피우는데 자신들이 책에서 얻은 것들을 적극 보태고 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각 부처마다 현대판 독서당 제도를 신설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각 분야 국내외 전문가들의 책들을 최대한 섭렵, 이를 통해 얻은 지식이나 정보, 아이디어 등을 국가정책에 적극 활용하거나 반영한다면 우리의 현실과 미래는 훨씬 밝지 않을까?

나는 책을 왜 읽는가?

책에서 만나는 책벌레들의 이야기들
▲나 죽으면 한마리 책벌레 되리▲저승갈 때 무슨 책 넣어갈까 ▲천국은 틀림없이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 ▲책읽는데도 궁합이 맞아야 ▲책 읽는 사람의 얼굴은 다르다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하나 ▲지인의 서가에 꽂힌 <후한서>(송판)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애첩을 넘긴 명나라 사람 주대소

▲책을 읽는 중에는 하품도 하지 말라는 연암 박지원 ▲책을 무척 좋아해 조선시대에 독서회를 조직한 김득신▲후손이 분서한 유일한 경우인 원천석의 운곡야사▲아침의 친구가 저녁에는 적이 되는 시대를 개탄하며 책을 벗 삼았다는 지붕유설의 저자 이수광

▲정조의 책동무인 채제공과 이가환,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등의 책읽기 ▲일본 메이지 시대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기치의 남의 책 베끼기 ▲연못 한가운데 다락집 서재를 짓고 건널 수 있는 외나무다리조차 밤이 되면 걷어버린 중국의 한 재상 ▲이희승의 '서권기' 정신 ▲플라톤의 책에 대한 역설 ▲김구 선생과 김남주 시인의 거국적인 작명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은 수많은 책벌레들과 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빠져 살았던 책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모음이다.

저자에 의하면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 2007년 1년 동안 '책벌레 좌충우돌'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라고. 앞으로 4권을 더 낼 계획이라고 한다.

저자는 책벌레들의 책이야기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책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과 철학, 글쓰기의 정신과 자세까지 함께 들려줌으로써 책이 우리 삶에 미치는 '무한하고 대단한 영향들'을 일깨운다.

'독립운동가들의 혼이 깃든 글쓰기', '책의 향연 그리고 글짓기의 메뉴', '대구에 나타난 촌철의 글짓기', '문사철의 살아있는 글쓰기', '문질빈빈한 글이라야 산다' 등, 우리 역사에 굵직한 선을 그은 역사적 인물 평전으로 유명한 저자의 글쓰기 정신과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글들도 다수 있다.

"한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읽은 책과 그가 쓴 글이다"라고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인간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를 읽은 책과 쓴 글에 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간 내 삶의 책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세상 수많은 것들 중 책과 오랜 인연을 맺게 된 건 내 삶의 대단한 행운이다. 이 책은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책과 함께 살아온 날들, 내가 책에서 얻는 것들을 대신 잘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한 장 한 장 넘겨 읽는 동안 내게 스며들어 내 안에서 발효되는 나만의 느낌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각자 스스로 느낄 일이지. 올 가을,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책벌레들을 만나 그들이 책에 죽고 못사는 이유를 들어보면서 부디 직접 느껴 보시기를!

덧붙이는 글 |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 책에 살고 책에 죽은 책벌레들의 이야기>(저자:김삼웅 / 출판사:동아시아 / 펴낸날:2008.7.24 / 책값:1만5000원)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 책에 살고 책에 죽은 책벌레들의 이야기, 개정판

김삼웅 지음, 시대의창(2017)


태그:#김삼웅, #독서당제도, #책벌레, #독서의 계절,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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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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