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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중소기업 A사 로비에서 만난 정진호(가명) 경영재무팀 이사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약속시간을 30분 넘겨 뒤늦게 나타난 그는 "키코(KIKO·통화옵션상품)와 관련해 사장님 결재를 받느라 늦었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 이사는 "내일(2일) 은행에 물어줄 12억원을 마련하느라 숨이 막힌다"며 "협력업체 직원까지 종업원 1000명이 종일 일해야 하루 매출 3억인데…"라고 말을 흐렸다.

 

키코로 인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달 16일엔 상반기 매출 3400억원을 기록한 잘 나가던 중견기업 태산엘시지가 무너졌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에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환율 폭등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작년 매출 1000억원, 수출 700억원, 영업이익 70억원을 기록했던 A사 역시 키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 이사는 "망하는 걸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선 사업 못 하겠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도대체 수출 유망 중소기업 A사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정 이사는 회사의 이름·업종·위치 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그간의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내일 12억 물어줘야 한다, 망하는 걸 기다리는 중"

 

A사가 처음 키코에 가입한 건 지난해 4월.

 

A사는 유로 결제 대금이 많은 데다가 당시 원/유로 환율이 1250~1260원대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환헤지(환 변동 대비)상품 가입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달 담보 없이 100억원을 대출해준 B은행의 키코 가입 요구는 뿌리치기 어려웠다. B은행 지점장이 본점 파생영업부 직원과 함께 회사를 수 차례 방문하고 하루에 여러번 전화를 걸어와 실무자가 업무를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 이사는 "100억원 신용 대출을 해준 은행 지점장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는데,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지점장은 "주요 기관에서 환율이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설마 내려가겠느냐? 다른 기업들도 다 키코에 가입했다, 걱정 말라"며 A사 경영진을 안심시켰다.

 

이후 7월 B은행의 대출 만기가 돌아오자, 지점장이 "키코에 가입하면 연장이 쉽지 않겠느냐"고 두 번째 가입을 부탁했고 A사는 이에 응했다.

 

대출이 있는 C은행 역시 같은 방법으로 가입을 요청해 키코 계약 건수가 3건으로 늘었다.

 

A사가 가입한 키코는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약정환율은 1260원, 상한선(Knock-in)은 1300원, 하한선(Knock-out)은 1200원. 한 달에 100만 유로를 은행에 팔 수 있고, 환율이 상한선을 넘기면 약정금액의 2배를 팔아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문제가 생긴 건 원/유로 환율이 상한선인 1300원을 넘어선 10월. 결제일이 빠른 B은행의 키코에서 8000만원 손해가 났다. 수출로 벌어들인 비싼 유로를 약정 환율만큼 싸게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약정금액의 2배 만큼이었다.

 

이에 대해 A사가 B·C은행에 "도와달라고 해서 가입했더니 손해가 났다"고 따지자 B은행은 15억원을 추가 대출해줬고, C은행은 상한선을 30원 높게 하는 내용으로 키코를 재설계해줬다. 대신 약정금액은 50만 달러 올린 150만 달러로 변경해, 위험도는 더 높아졌다.

 

 "설마 환율 오르겠냐"... 두 얼굴의 은행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올해 2월 말 이후 원/유로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환율이 상한선을 훌쩍 뛰어넘는 1400원대를 기록하자 손실이 크게 늘어났다. A사는 B은행과 계약을 해지하려 했지만 40억원의 계약 청산금을 요구했다.

 

벌써 20억원에 가까운 손실이 난 상황에서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A사는 한국은행으로 찾아가 피해 대책을 호소했다. 결국 B은행과 맺은 2건의 키코 계약을 당장 취소하는 대신 상한선이 1377원인 새로운 계약을 7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B은행과의 키코를 4개월 유예하게 됐지만, C은행과 맺은 키코는 한 달에 10억원 안팎의 손해가 나고 있었다. 2008년 1100억원의 매출과 110억원의 영업이익을 예상했던 A사는 매달 그 달치 영업이익을 C은행에 고스란히 넘겨야 했다.

 

7월부터 은행들이 중소기업에 대한 여신을 축소하기 시작한 터라 A사는 키코 손실을 막을 새로운 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특히 D은행의 경우, 최근 키코 피해 기업이라는 이유로 50억원의 대출 연장을 거절했다. D은행 역시 키코 가입을 권유했던 곳이었다.

 

지금의 환율이 올해 말까지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A사의 손실은 150억원으로 예상된다. 올해 영업이익도 '-50억원'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C은행과 맺은 키코는 이번 달이 마지막이지만, 4개월 유예된 B은행의 키코는 내년 6월에야 종료되기 때문이다.

 

정 이사는 "얼마 전까지는 회사가 겨우 버틸 수 있는 상황이라 환율이 더 이상 오르지 않길 바랐다"면서도 "지금은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버려 자포자기 수준이다, 이미 주변 많은 중소기업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키코로 인한 타격은 단순히 당장의 재정 손실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경영진이 온통 키코에만 신경쓰고 있어 기업 경영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 회사의 미래를 위해 올해 완공하려던 중국 공장은 돈이 없어 언제 문을 열지 알 수 없다.

 

직원들의 동요는 회사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회사는 구체적 피해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직원들의 이직이 늘고 있다. 최소한 물가상승률만큼 오르던 임금이 올해엔 동결이 됐고, 매년 나오던 추석 상여금도 올해는 없었다.

 

중소기업의 절규 "다 같이 망했으면 좋겠다"

 

A사는 1일 발표된 정부의 대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돌아온 건 절망이었다. 정부는 이날 대책에서 기업평가 A~D 등급 중 A·B 등급을 받은 기업에 대한 은행의 유동성 공급을 유도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정 이사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부실 징후가 있는 C·D등급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인 A·B등급 기업만 지원하는 게 5개월 만에 내놓은 대책인가. 또한 자기들도 어려운 은행이 자율적으로 부실기업에 왜 지원을 해주겠느냐. 차라리 인센티브 안 받고 안 도와줄 것이다. 도와준다 해도 키코 관련 소송 취하하라고 압력을 넣을 게 뻔하다."

 

그는 "원하는 건 나중에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당장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에서 키코 손실에 대한 보증을 서달라는 것뿐"이라며 "돈을 떼어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지적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중소기업의 울분을 전해주는 듯 무척 강렬했다.

 

"은행이 키코 가입을 권유한 곳이 수출 유망 중소기업이니 지금까지 겨우 버텼다. 고사시키면 고통이 심하니 한 번에 죽여달라. 차라리 환율이 2000원으로 올라 다 같이 망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부가 심각성을 알고 공적자금도 투입하고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키코(KIKO) 가입이 중소기업의 도산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키코(KIKO·Knock In Knock Out)는 은행이 수출 유망 중소기업을 상대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집중적으로 판매한 통화옵션상품이다.

 

환헤지(환율 변동에 대비하기 위해 거래 시의 환율을 현재 시점의 환율로 고정시키는 것)를 위해 만들어진 이 상품은 환율이 치솟자 역설적으로 중소기업의 목줄을 죄고 말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8월말(원/달러 환율 1089원 기준) 현재 키코로 인한 중소기업 피해는 1조2846억원에 이른다.

 

이처럼 키코 피해가 막대한 이유는 키코 상품 설계 자체에 있다. 키코는 환율 변동이 크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다. 환율이 미리 정한 상한선(Knock-in)과 하한선(Knock-out) 사이의 범위 내에서 움직일 경우, 키코에 가입한 기업은 약정 환율로 외화를 팔 수 있어 환 변동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환율의 극심한 변동으로 상한선과 하한선을 벗어날 경우, 기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다. 환율이 하한선보다 내려갈 경우, 키코 계약이 자동 소멸돼 환헤지 효과가 사라진다.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의 가치가 떨어져 이를 원화로 바꿀 때 환차손을 입는다.

 

원화가치가 하락해 환율이 상한선을 넘어설 경우가 더 위험하다. 가치가 상승한 외화를 은행에 약정 환율만큼 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약정금액의 2~3배에 이르는 금액을 은행에 내놓아야 한다. 환율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손실은 무제한적으로 커진다.

 

특히, 은행의 '묻지마' 판매 등으로 오버헤지(over-hedge·환율이 상한선을 넘을 때 은행에 물어줘야 하는 금액이 수출대금 규모를 초과하는 것)한 기업은 도산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자라는 외화를 시중에서 비싸게 사와 약정환율로 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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