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여름은 참으로 뜨거웠다. 그 뜨거웠던 여름도 어느덧 지나고 시나브로 가을이다. 여름 지나 가을, 가을바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망산 등반을 끝내고 난 뒤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명사해수욕장 근처에서 해금강 방향으로 차를 돌린다. 다대마을을 거쳐 학동 동백군락지를 지나 학동해변에 도착한다. 오후 4시 10분이다.

 

학동 몽돌해변

 

학이 날아오르는 지형이라 하여 학동해변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은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에 위치해 있다. 학동 몽돌해변은 해변 면적이 3만 제곱킬로미터나 되고 길이가 1.2킬로미터, 폭이 50미터로 거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몽돌이 깔린 해변이 해수욕장으로 활용되어 여름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붐비는 곳이다. 학동해변에서 해금강과 외도 일대를 도는 유람선관광을 할 수 있다.

 

지난 8월에도 이쪽방향으로 지나갔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많은 피서객들과 주차할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도로를 점령한 차량들에 질려 그냥 갔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학동해변에 갔다 왔노라 자랑하며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때 사진 속에는 노을이 붉게 물든 바다에 떠 있는 배가 있는 멋진 풍경이었던 걸 기억한다.

 

마음 속으로는 늘 여행을 꿈꾸며 상상 속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지독히도 가 본 곳이 한정적이고 여행의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커서는 일찍 결혼해 한창 돌아다닐 그런 시절에 나는 생활에 매여 있었고, 이래저래 여행을 많이 해 보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 같다. 그 흔한 학동몽돌해변에도 올 기회도 많이 있었지만 오늘에야 그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몽돌해변을 걸어보며 파도소리 듣는다.

 

철 지난 바닷가, 가을에 찾은 학동 몽돌해변은 선선한 바닷바람이 먼저 반기고 곧 눈앞에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는 몽돌밭과 푸른 바다가 안겨든다. 가을 바다는 한적하면서도 서늘한 가을 바다에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가족들과 함께 나와 자리를 깔고 앉아 바다를 보며 앉아 있기도 하고, 몽돌해변을 걷는 연인들도 보인다. 할머니와 손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 나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어린 손자는 물수제비를 뜨고 있고 그 옆에서 지켜보는 할머니가 있다. 등산 갔다 와 홀로 쉬고 있는 것일까. 한 남자가 등산가방을 옆에 놓은 채 몽돌해변에 길게 누워 있는 것도 보인다. 한참 동안 꿈쩍하지 않고 누워 있다. 뭍에 묶여 있는 작은 배는 가끔 배가 드나들면서 일으키는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저만치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저기 바다 맞은편 왼쪽 끝엔 외도가 보이고 외도 해금강행 유람선이 학동몽돌해변 옆 선착장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고 간다.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변으로 달려온다. 몽돌밭에 하얗게 부서진다. 처얼썩 철썩…. '쏴~' 소리 내어 부서진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소리 듣고 있으면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그리움 같은 것이, 잊고 있었던 아련한 추억들이 연신 밀려오는 파도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달려오는 듯 하다.

 

가을에 듣는 파도소리는 아련한 추억을 물보라를 터뜨린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온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는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몽돌해변에 앉아 파도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먼 바다에 눈을 두고 나는 잠시 앉아 있다. 내 눈이, 내 마음이 아련해진다.

 

얼마동안 몽돌 해변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다. 학동해변으로 온 기념으로 몽돌 하나 주워 손에 넣는데 '몽돌 하나에 과태료가 20만원이야' 하면서 옆에 있던 남편이 말린다. 몽돌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학동몽돌해변의 바다와 파도소리 듣는 듯 바라보고 싶었건만 아쉬운 마음으로 손에 만지작거리던 몽돌을 다시 내려놓는다. 안녕~다음에 또 보자.

 

구조라 해수욕장, 추억 속을 걷다

 

구조라 해수욕장 역시 지난 여름에도, 그 지난 여름에도 그냥 지나갔었다. 바다는 아무래도 여름바다보다는 겨울바다가 더 조용하고 깨끗하고 고즈넉하다. 많은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한 뜨거운 여름바다보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듯한 겨울바다를 더 좋아한다. 수많은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 붐볐던 이곳 구조라 해변은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바다엔 너무 번잡하지도 고즈넉하지도 않고 너무 조용하지도 않다.

 

아주 오래전에 기억 속에 있는 구조라는 지금 모습과는 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많이 변한 모습이다. 구조라해수욕장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완만하여 여름 피서철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해수욕장 주변에는 멸치, 미역 등의 특산품을 파는 상점과 생선회를 즐길 수 있는 횟집, 민박집들이 늘어서 있고 바다 옆에 있는 구조라항에서는 내도, 외도, 해금강 등을 관람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이곳 역시 주말이라 그런지 가족과 함께 하거나 연인과 함께이거나, 해변을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해는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다.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에서 두 아이가 모래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래집을 짓고 있다. 손을 모래사장 위에 펴고 한 손은 그 손등 위에 모래를 파서 얹는다. 도닥도닥 손등 위에 둥글게 높이 쌓은 모래를 도닥거린다. 나도 어릴 적에 그렇게 모래성을 쌓으면서 노래를 불렀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주께 새 집 다오~.'

 

이 순간, 전혀 생각지 않았던 또 하나의 노래가 내 입을 통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가고~내가 만든 모래성이… 산 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 가사도 다 생각나지 않는 노래가 내 기억의 깜깜한 창고에서 불쑥 내 입으로 흘러나온다. 기억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 저 무의식의 밑바닥 구석진 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이 기지개를 켜며 올라오다니.

 

긴 모래해변을 따라 걸어본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모래를 핥는 바닷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속살거리듯 달려와서 두 아이의 발밑에 간지럼을 태운다. 모래해변에서도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인다. 밀짚모자를 쓰고 긴 낚싯대 끝에 달린 낚싯줄을 당겨 멀리 던지는 해질 무렵의 낚시꾼 앞에는 모래 위로 밀려오는 파도가 긴 레이스를 만들고 있다.

 

제법 많은 물고기들이 낚시 통에 담겨 있다. 하루 종일 저렇게 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바다, 파도는 모래 해변을 핥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물소리에 섞여들고 바닷가에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들은 파도가 숨긴다. 혼자서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젊은 처녀도 보인다. 모래는 아주 부드럽고 입자가 곱다.

 

구조라 해변은 아주 오래오래 전, 늦가을이었을까, 겨울이었을까.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계절도 희미하지만 차가운 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 친구랑 함께 이 해변을 걸었던 적이 있다. 단 한 번. 차가운 밤하늘의 별이 총총했고 달빛이 아련하게 비추던 그런 밤이었다. 달빛과 별빛, 그리고 너무나 조용한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소리에 할 말도 잃고 친구와 나란히 걷기만 했었다. 모래 해변에 발자국을 길게 남기면서.

 

많은 시간들이 세월을 따라 지나갔다. 아주 오래전에 걸었던 해변을 걸어본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만큼 또 많이 변해버린 내 모습으로. 말총머리 묶은 소녀,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아직 채 여물지 못했던 비릿한 풋내기였던 그때의 내가, 마흔의 나이를 훨씬 넘고도 아직도 덜 여문 내가 그때의 그 바다를 다시 걸어본다. 고운 모래 위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들 위로 내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그때 이후 처음으로 이 해변을 걸어본다. 친구와 나란히 모래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모래해변 끝까지 걸었던 그 바다에 다시 왔다. 사춘기 소녀가 걸었던 해변의 밤길은 애틋하고 다정하고 알 수 없는 서러움 같은 것이 울컥 명치끝을 건드리는 미묘하고 아릿하고 감미로운 그런 밤이었다. 밤바다라면, 거기에 달빛 환한 밤 해변이라면 더 좋으련만, 그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며 가을 해변을 걷는다. 돌아올 수 없는 시절들을 추억하며.

 

파도 소리 벗 삼고, 달빛 벗 삼고 친구와 나란히 걸었던 그 해변을 남편과 함께 다정스레 걷는다. 해는 꼴깍 넘어가버리고 점점 어둠이 찾아든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우린 왔던 길을 돌아서 간다. 지난 추억이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성이 차례로 무너지듯 스러지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안녕~ 내 인생의 어느 한때, 그렇게 짧았던 한 순간 내 추억의 보물창고에 점을 찍은 날들이여, 그래서 가끔 잊었던 보물을 닦듯 꺼내보는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준 아련한 추억이여. 안녕.

 

가을 바다

( 1 / 29 )

ⓒ 이명화

덧붙이는 글 | 학동 몽돌해변: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에 위치.
구조라해수욕장: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구조라 항에서는 내도, 외도, 해금강 등을 관람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구조라 주변에는 거제어촌민속 전시관, 외도바타니아, 윤돌섬 등의 관광명소가 많아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태그:#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