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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12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예배가 끝난 후 확인해 보니 누나가 건 전화였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믿기지 않았다. 곧장 버스터미널로 갔다. 갑작스런 소식을 들은 탓인지 눈물이 흘렀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아버지는 월남전에서 오늘쪽 다리를 다치셨다. 젊은 나이에 '장애인'이 된 아버지는 술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정이 많으셨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어하셨다. 노는 것도 좋아하셨고 지인들에게 인기가 참 좋았다. 유독 가족들에게만 못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해가 된다. 자신의 신체마냥 동강나 있는 사회적 낙인과 과거의 상처를 가족들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초라함을 애써 과장된 행동으로 덮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하셨을 거라 믿는다. 가족은 아버지의 왜소함이 감춰질 수 있는 마지막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50대 초반에 아버지를 여윈 어머니를 두고 주변분들이 "아직 네 엄마는 젊은 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울증까지 앓았던 어머니를 보며 누나와 남동생, 나는 좋은 분이 나타나면 재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8월에 누나가 전화를 했다. 어머니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지 않냐고 맞장구를 쳤다. 말을 좀 더 듣고 있자니, 문제가 있었다. 남자 친구분은 공사장 먼지를 방지하는 물을 뿌리는 장비사업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사업자등록증에 대표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자니, 엄마 명의의 카드를 남자 친구분이 사용하는 등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나는 추석이 되기 전까지 누나가 해 준 이야기를 어머니께 모르쇠 잡았다. 추석에 내려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해와 걱정은 예상 외로 쉽게 풀렸다. 어머니가 사업자 대표가 맞았고, 남자 친구분이 영업을 하고, 어머니에게 고용된 형태였다. 자식들을 의지하지 않고 노년을 보내시려는 나름 자구책으로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형제들은 아무리 남자 친구라해도 금전적인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 선만큼은 분명히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노년이 되면 하던 사업도 마무리하는 판에 어머니는 왜 사업을 하시려고 했을까. 홀로 된 어머니는 같은 또래의 아주머니들과 만나 자주 노셨다. 외로움을 달래신 것이다. 아버지가 있던 자리는 그래도 채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누나는 어머니가 남자 친구분을 만나고 더 밝아지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돈을 모아 그분과 실버타운에 들어가실 계획을 하셨단다. 자식 중에 노년을 같이 살 자식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서운하기도 했지만 여태껏 어머니께 무관심하고 거리를 둔 내가 뭐라 드릴 말씀은 없었다.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들은 때부터 추석을 거친 지금까지 나는 어머니를 잘 알고 있는지 되묻게 되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슬프셨을까'를 나는 가깝게 느끼지 않았다. 아니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 남자의 인생을 가까이 지켜본 어머니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나는 유쾌함을 조장한다며 어머니를 위로하기는커녕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실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예전이나 이후나 나는 똑같이 연락을 자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은 내게 큰 상실이었고 내 아픔만큼 어머니도 아프실 것이라 상상했다.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는데도 애써 그렇게 상상한 것이다. 남자 친구가 생기고 화상통화를 하며 밝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 나는 되묻고 있었다.

 

20대 초반에 어머니를 여자라고 생각하게 됐던 계기가 있었다. 어머니 생일날, 미용용품을 선물로 드렸는데 매우 좋아하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십대를 지나오면서 나는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로 지냈고, 이번 추석을 계기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아들인 나를 중심으로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남편을 잃은 어머니, 그리고 우울증을 겪고 남자친구를 사귄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는 다른 차원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머니가 가족의 시선에 갇혀 자유를 억압한 채 살아가지 않고 뜻하는 대로 살아가시기를 응원하고 싶다.


태그:#어머니, #추석,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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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시 대야미. 사람, 도시, 농도 교류, 사회창안에 관심이 많습니다. 겨리와 보리를 키우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소농학교에 다니며 자급/자립하는 삶을 궁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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