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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다리에는 오토바이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시민들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 전태일과 대화하는 임옥상 화백 전태일 다리에는 오토바이들이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시민들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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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거리에서 동판을 찾는 사람들. 2005년 제막식 직후의 모습
 전태일거리에서 동판을 찾는 사람들. 2005년 제막식 직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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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9일 밤 11시 30분경,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다리 위. 35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사망한 전태일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트럭 짐칸에 타고있던 전태일이 내리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 임옥상미술연구소 관계자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까지도 벅찬 감동에 환호하며 손뼉을 치다가 이내 숙연해졌다.

그로부터 3년 뒤, 9월 30일 열리는 전태일 거리, 다리와 전태일 동상제막식을 앞두고, 최종적으로 전태일상을 전태일 다리(일명 '버들다리') 위에 설치하는 작업은 바쁘게 이루어졌다. 바로 이 작업을 총괄 지휘한 사람이 임옥상 화백이었다.

3년 전, 그 거리에 전태일이 부활했다

당시(2005년 9월)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단순히 개발독재 시대 때 복개된 청계천을 여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청계천에 삶의 뿌리를 둔 민중들의 삶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현대사를 복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념사업회와 추진위원회에서는 진작부터 주장해 오던 청계천 4~7가 사이를 전태일 거리로 만들고, 청계천 복원으로 생기는 평화시장 앞 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다리 위 전태일상을 설치해서 명실공히 자연과 민중의 삶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청계천 복원이 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옥상 화백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며, 전태일거리·다리 조성 사업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임 화백은 민중미술 화가로서 민중운동 내에서 이미 친숙했으며, 미술관을 벗어난 공공미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가장 알맞은 예술가였다. 임 화백은 기꺼이 전태일거리·다리 조성에 앞장서주었다.

기념사업회와 추진위원회는 청계천 5~6가 거리에 시민들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뜻을 밝히는 동판 블록 6000여 개를 설치하기로 했다. 추진위원회와 <오마이뉴스>는 그 해 7월 21일부터 <전태일 거리, 시민의 힘으로 만들자> 캠페인을 함께 벌여나갔다. 시민 참여자는 1인당 1000원 이상 10만원 미만을 내고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글귀를 새기기로 했다.

전국의 노동자를 비롯해 농민, 학생, 전현직 대통령 등 정치인, 문화예술인, 일반 시민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참여해 동판 약 4000여 개가 만들어져 전태일 거리·다리가 조성됐다.

"지금은 노동운동이 우릴 동지로 안 봅니다"

전태일을 부활시킨 지 3년 만에 나란히 선 임옥상 화백.
▲ 전태일과 임옥상 전태일을 부활시킨 지 3년 만에 나란히 선 임옥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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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거리·다리가 만들어진 지 3주년이 된 29일 임옥상 화백과 함께 전태일거리·다리를 찾았다. 감회가 어떤지 물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행복합니다."

시민들이 이 거리에서 전태일과 함께 만지며 놀고, 사진도 찍고 동판 글귀도 찾아가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그렇지만 그는 마냥 행복해 할 수 없다. 즉 우리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나빠지고 있는 모양새 때문이다.

"우러러보는 전태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져서 빛나게 하는 친근한 전태일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양극화는 심화되고 비정규직은 더 늘어나니 자괴감마저 듭니다."


그러면서 노동계에 한 마디 쓴 소리를 한다.

"요즘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은 물론 신자유주의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 내에서 암묵적으로 승인한 측면은 없는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기업 노동운동은 생계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지 묻고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힘을 가진 노동자들이 여전히 자기들을 약자라고 생각한다면 노동운동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와 관련해서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예전에 노동운동이 어려울 때 우리 예술인은 예술동지라고 생각하고 함께 어려움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느 정도 힘을 가진 노동운동은 우리를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걸개 그림을 그린 최병수 화백에게, 어떤 대기업 노조에서 '걸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나 봅니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데 드는 돈이) 비싸다면서 노조가 대학생을 써서 그림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문화 예술인을 소모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지고 노동운동을 하면 '자기들 먹고살기 위해 노동운동을 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동안 참았던 말인 듯 임 화백은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정희 이마에 별 그려넣고, 이승만 얼굴 흔들었더니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 쪽 벽에 붙어있는 임옥상 작품.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 쪽 벽에 붙어있는 임옥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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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마에 별이 붙어있다.
▲ 전태일과 박정희 박정희 이마에 별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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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흔든 모습의 이승만.
 역사를 흔든 모습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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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화제를 전태일 상으로 옮겼다.

- 당시 작업 시간도 짧았고 비용도 적었는데, 전태일거리 작업을 흔쾌히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88년 대학생 중심으로 전국 걸개그림전이 연세대에서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주제로 한 걸개그림전입니다. 열몇개 그림 중에, 그 때 제가 전주대에 있을 때인데 제자들과 함께 전태일 부분을 그렸죠. 전태일기념관에도 찾아가고 이소선 어머니도 만나면서 자료도 수집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림 그리면서 전태일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죠.

그 뒤 95년 서울시에서 지하철 장식 모뉴멘트를 모집했는데, 제 작품이 당선되었습니다. 광화문의 역사, 즉 서울의 역사를 주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적 인물 33인을 벽화로 넣었는데, 전태일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서울시에서 전태일을 빼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32인이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박정희는 머리에 별을 그려 넣어서 기분 나쁘다고 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우리 역사를 흔들었기 때문에 내가 얼굴을 흔들어 겹치게 표현했더니, 처음엔 통과되었는데…, 이승만 추앙회인가 하는 곳에서 항의하니까 서울시에서 뺐습니다. 내 개인 작품이지만 계약에 '서울시 뜻에 맞게 한다'는 조항이 있어 할 수 없이 빼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임옥상 화백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는 군부독재 시절도 아니고 '문민화'된 김영삼 정권이었는데, 그것이 얼치기 민주화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태일을 제대로 표현해보겠다고 바라고 있었고, 10년 만에 전태일 작업을 하게 되었다. 10년 만에 전태일의 복권이었다. 임옥상 화백은 자신의 개인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전태일 작업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시민 힘으로 얻어낸 거리에 전태일을 '소환'하다

전태일 거리·다리 작업은 서울시에서 순순히 허용한 것이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얻어냈다. 독지가가 돈을 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자발적 시민 성금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공공미술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작가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당시 어떤 방향으로 전태일상과 거리 디자인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마디로 "36년 만에 전태일을 소환했다"고 한다. "이 판에 전태일 당신이 와서 일해야 한다"면서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 양산이 가속화 되는데 당신이 와서 새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말한다.

전태일은 '아름다운 청년'이면서 '보통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러러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길거리에 나오게 한 것이다. 그런 전태일을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밟고 갈고 닦아서 빛나게 해야 한다.

작가는 전태일 거리 동판에 어떤 글귀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비움의 공간을 주었다. 이 비움의 공간에 대중이 내용을 채워 나간 것이다.

전태일거리는 시민들이 참여한 동판으로 만들어 졌다.
 전태일거리는 시민들이 참여한 동판으로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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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화두 찾아나선 임옥상... 요즘은?

임옥상 화백의 요즘 화두는 '사회통합'이다. 디자인도 노동운동도 사회통합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자기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정치야 말할 것도 없이 더 큰 틀에서 사회통합을 이루어 내야 함에도 이명박정부는 1~2%만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불상과 불두(佛頭)를 만들고 있다. 한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한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철로 한글을 오려 불상을 형상화한다. 작품은 구멍이 뻥뻥 뚫려있어 속이 텅 비어있다. 그러면서도 볼륨이 있다. 텅 비어있어 군림하지 않고 그 사이로 비, 바람, 빛 등이 들어가 풀들이 자라고 꽃이 핀다. 주위 환경과 어울리면서 그 사이에서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태일을 소환한 지 3주년을 맞이하면서 그와 함께 전태일의 힘을 빌려 양극화, 아니 상극화된 우리 사회를 어떻게 하면 바람직하게 통합할 수 있을까 길을 물어본다.

임옥상 화백 약력
불상 앞에 선 임옥상 화백
 불상 앞에 선 임옥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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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충남 부여 출생
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74 동대학원 졸업
1986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 졸업
현(現) 임옥상 미술 연구소 대표

<개인전>13회
<그룹전>87회

▲환경조형물
1996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조형물 : '광화문의 역사'
1997 생산 기술 연구원 조형물 : '생명의 일곱기둥'
1998 진주박물관 조형물 : '새는 물을 좋아한다'
- 담배인삼공사조형물 : '다함께 부르는 노래'
- 정신대 역사관조형물 : '누가 이들에게, 대지의 어머니'
1999 증산동 우방 아파트 조형물 : '달 따러 가자'
2000 전남 영암 구림도자센터 : '세월'
- 매향리 상징 조형물 : '자유의 신 in KOREA'

▲수상
1985 학원 미술상, 1992 가나 미술상, 1993 토탈 미술상, 2004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교육 및 단체활동 연혁
1979-81 광주교육대학 교수, 1981-92 전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1993-94 민족 미술협의회 대표

▲저서
<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생각의 나무, 2000), <벽 없는 미술관>(생각의 나무, 2000), <가을이야기 다이어리>(명상, 2003)

덧붙이는 글 | 광화문역 모뉴멘트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난 뒤 필자가 현장에 가서 확인 했을 때는 전태일, 박정희, 이승만 그림이 모두 있었다. 이에 필자가 임옥상 화백한테 이 사실을 알리자, 임 화백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다.

* 기사를 쓴 민종덕 기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며, 전태일거리·다리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입니다.



태그:#임옥상화백, #전태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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